注
故不仁也라하니라 仁者는 必造立施化하니 有恩有爲로되
有恩有爲
면 則物不具存
이요 物不具存
하면 則不足以
러라
地 不爲獸生芻
하나 而獸食芻
하고 不爲人生狗
하나 而人食狗
하니
無爲於萬物이면 而萬物各適其所用하니 則莫不贍矣라
5.3 天地之間은 其猶槖籥乎인저 虛而不屈하고 動而愈出이라
注
天地之中은 蕩然任自然이라 故不可得而窮이 猶若槖籥也라
注
槖籥而守數中하면 則無窮盡하니 棄己任物이면 則莫不理하니
도가道家의 성인은 인간의 덧없음에서 자유롭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결정하려는 충동에서도 자유로운 유일한 인간이다. 즉, 추한 것보다 아름다운 것을 선호하려는, 이것은 선善이고 저것은 악惡이라 규정하려는, 죽는 것을 사는 것보다 더 감정적으로 불안하게 여기려는, 하나의 의견은 옳고 다른 것은 옳지 않다고 여기려는 어떠한 욕망도 가지지 않은 유일한 인간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도가의 성인이 그러한 인간의 특성들을 부정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그들이 그러한 것으로 “내면적으로 자신의 인격에 상처를 입고 있다.”는 것도 아니다. 성인은 따라서 인도적이지 않고 자연적이다.
‘인도적인’ 것 대신에 도가의 성인은 하늘과 땅의 태도를 가지고 인간을 마치 ‘짚강아지[추구芻狗]’처럼 대한다. 고대와 근대의 주석자들이 다 같이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짚강아지는 희생제에서 대단히 숭배되는 요소지만 의례 이후엔 모든 의미를 상실하고 그저 버려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도가의 성인은 사람들에게 크게 연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맥락을 고려할 때, 우리는 《노자》의 다섯 번째 장이 유학자儒學者와 ‘인본주의자人本主義者’의 의례에 대한 집착을 공격하는 것으로 읽혀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의례, 특히 죽음을 처리해야만 하는 것들은 유교 문화에서는 최우선시된다. 버려진 짚강아지를 언급하는 것은 의례적 수행을 조롱하는 것이다. 명백하게 영속성 - 인간의 선조와 그 일족들의 영속성 - 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가정되는 의례는 대단히 일시적인 사건이다. 의례가 끝나자마자, 그 의례에 사용된 도구들은 그것들에게 부여되었던 모든 의미를 상실한다.
여기에서 《노자》는 인간의 영속성에 대한 유교의 탐구를 실패한 것으로 비판하는 듯 보인다. 도가의 관점에서 영속성은 〈선조와 일족의〉 진행 중인 존재에 대한 기념에 기반을 둘 수 없으며, 오직 끊임없는 변화의 인식에만 기반을 둘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은 영속적이지 않고 유교적인 의례는 또한 인간을 그러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게다가 도가적 관점에서 유교의 의례는 삶과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감정적 집착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장자》처럼 《노자》도 죽음에 대한 유교의 감정적 집착을 비판한다. 도학자에게, 삶을 죽음보다 선호하는 인간적 경향에서 생겨난 그러한 감정적 애착은 짚강아지에 대한 감정적 애착만큼이나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짚강아지의 이미지가 유교의 의례에 대한 집착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반면, 무엇보다도 우리는 여기서 논쟁이 되는 것이 그 이미지와 얽혀 있는 ‘인본주의(humanism)’라고 생각해보는 것은 재미있다. 하늘과 땅과 마찬가지로 도가의 성인은 특히 ‘인간적’이거나 각별하게 인간에게 관심을 갖지도 않는다. 도가 성인에게 인간은 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심지어 짚강아지하고도 다르지 않다! 인간은 마치 짚강아지가 의례 수행 뒤에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삶에서 사라진다. 짚강아지가 아궁이를 위한 연료가 되는 것처럼, 인간은 하늘의 조상이 아니라, 도가의 성인 - 《노자》 5장 세 번째 부분에서 인간이 아닌 풀무에 비견되는 존재 - 은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무관심하다. 이것은 물론 성인들이 인류를 싫어한다거나 심지어 경멸한다는 말이 아니라, 단지 다른 종보다 인간 종에 더하거나 덜한 애착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인들은 스스로를 비워냄에 있어 감정을 버릴 뿐 아니라 자신의 성性과 종種까지 버린다.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 만물을 짚강아지처럼 여기고
注
하늘과 땅은 저절로 그러함에 맡겨 함도 없고 만듦도 없으나 만물이 스스로 서로를 다스린다.
그래서 ‘어질지 않다’고 한 것이다. ‘어질다’는 것은 반드시 무언가를 만들어 세우고 펼쳐서 변화시키니 은혜가 있고 함이 있다.
그러나 만들어 세우고 펼쳐서 변화시키게 되면 만물은 그 참된 본성을 잃게 될 것이요,
은혜가 있고 함이 있게 되면 만물이 함께 보존될 수 없고, 만물이 함께 보존될 수 없으면 온전히 실어주기에는 부족하게 된다.
하늘과 땅이 짐승을 위하여 꼴을 내는 것은 아니지만 짐승들은 꼴을 먹고, 사람을 위하여 개를 낳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은 개를 먹는다.
만물에 무위無爲하면 만물은 저마다 제가 쓰일 바에 맞추어 나아가게 되니 넉넉하지 못함이 없게 된다.
만약 지혜가 자기로부터 세워지게 되면 맡기기에 부족하다.
성인은 어질지 않아 백성을 짚강아지로 여긴다.
注
성인은 천지와 그 덕이 합치하기에 백성을 짚강아지에 견준 것이다.
하늘과 땅의 사이는 아마도 풀무나 피리와 같지 않은가? 비어 있으나 쪼그라들지 않고 움직일수록 더욱 나온다.
注
‘탁槖’은 ‘풀무[배탁排槖]’이고 ‘약籥’은 ‘피리[악약樂籥]’이다.
풀무와 피리의 속은 텅 비어 있어서 어떠한 마음도 없고 무언가 함도 없다.
그래서 비어 있으면서도 다하여 쪼그라들지 않을 수 있고 움직여도 다 소진되지 않을 수 있다.
하늘과 땅의 가운데는 텅 비어 스스로 그러함에 맡긴다. 그래서 다할 수 없는 것이 마치 풀무나 피리와 같다.
풀무(국립민속박물관)
피리[약籥](《악학궤범樂學軌範》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니 가운데를 지키느니만 못하다.
注
하면 할수록 더욱 잃게 된다. 만물이 〈군주의〉 지혜를 피하고 하는 일마다 〈군주의〉 말과 어긋나니, 그 지혜가 다스려지지 않고 그 말은 조리에 맞지 않게 되어 반드시 막히는 상황이 자주 일어난다.
풀무와 피리가 그 속을 지키면 궁하거나 다함이 없다. 자신을 버리고 만물에게 맡기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게 된다.
만약 풀무와 피리가 어떤 소리를 내겠다는 뜻을 갖게 되면 함께 〈그 피리를〉 부는 사람이 원하는 소리를 낼 수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