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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子道德經注

노자도덕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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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 上德 不德이라 是以 有德이요
38.2 下德 不失德하니 是以 無德하니라
上德 無爲하나 而無하고 下德 爲之하나以爲하니라
上仁 爲之하나 而無以爲하며
上義 爲之하나 而有以爲하며
上禮 爲之호대 而莫之應이면 則攘臂而扔之하니라
故失道而後德이요 失德而後仁이요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니라
夫禮者 忠信之薄이니 而亂之首 前識者 道之華 而愚之始
是以 大丈夫 處其厚 不居其薄하며 處其實이요 不居其華니라
去彼取此하니라
[注]德者 得也
常得而無喪하고 利而無害
故以德爲名焉이라 何以得德잇가 由乎道也
何以盡德잇가 以無爲用이니 以無爲用하면 則莫不載也
故物 無焉하면 則無物不經이요 有焉하면 則不足以其生이라
是以 天地雖廣이나 以無爲心하고 聖王雖大 以虛爲主
故曰 以復而視하면 則天地之心하고 至日而思之하면 則先王之 覩也
故滅其私하여 而無其身이면 則四海莫不瞻하고 遠近莫不至로되
殊其己하여 而有其心이면 則一體라도 不能自全하고 肌骨 不能相容하니라
[注]是以 上德之人 唯道是用하니
不德其德하고 無執無用이라
故能有德而無不爲하니 不求而得하고 不爲而成이라 故雖有德이나 而無德名也
下德 求而得之하고 爲而成之하니 則立善以治物이라 故德名 有焉이라
求而得之하면 必有失焉하고 爲而成之하면 必有敗焉하며 善名生이면 則有不善應焉이라
故下德爲之而以爲也라하니라 無以爲者 無所偏爲也
凡不能無爲하여 而爲之者 皆下德也 仁義禮節 是也
將明德之上下하여 輒擧下德으로 以對上德하니라
至于無以爲 極下德之量이니 上仁 是也
足及於無以爲로되 而猶爲之焉하니 爲之而無以爲
本在無爲하고 母在無名한대 하니 功雖大焉이나 必有不濟 名雖美焉이나 僞亦必生하리니
不能不爲而成하고 不興而治하면 則乃爲之 故有弘普博施仁愛之者
而愛之無所偏私 故上仁爲之而無以爲也
不能兼이면 則有抑抗正而義理之者
忿枉祐直하고 助彼攻此하니 物事而有以心爲矣
故上義爲之而有以爲也
直不能篤이면 則有飾修文禮敬之者 尙好修敬하고 校責往來 則不對之間忿怒生焉이라
故上禮爲之而莫之應이면 則攘臂而扔之 夫大之極也 其唯道乎인저
自此已往 豈足尊哉리오
有萬物이나 猶各其德하여 而未能自周也
故天不能爲載하고 地不能爲覆하고 人不能爲贍하니라
萬物雖貴 以無爲用이니 不能無以爲體也
不能(捨)[至]無以爲體 則失其爲大矣 所謂失道而後德也
以無爲用하면 其母 故能己不勞焉而物無不理니라
下此已往 則失用之母 不能無爲而貴博施하고
不能博施而貴正直하며
不能正直而貴飾敬하니
所謂失德而後仁하고 失仁而後義하고 失義而後禮也
하고 通簡不이러니 責備於表하고 機微爭制하니라
夫仁義發於內어늘 爲之猶僞하니 況務外飾而可久乎리오
故夫禮者 忠信之薄而亂之首也라하니라
[注]前識者 前人而識也 卽下德之倫也
竭其聰明以爲前識하고 役其智力以營庶事하니
其情이나 姦巧彌密하며
雖豐其譽하나 愈喪篤實하니 勞而事昏하고 務而治하니 雖竭聖智하나 而民愈害하니라
舍己任物하면 則無爲而泰하고 守夫素樸하면 則不須典制하니 彼所獲하여 棄此所守
識者 道之華而愚之首
故苟得其爲功之母 則萬物作焉而不辭也 萬事存焉而不勞也니라
用不以形하고 御不以名이라 故仁義可顯하고 禮敬可彰也
夫載之以大道하고 鎭之以無名하면 則物無所尙이요 志無所營하니
各任其 用其誠하리니 則仁德厚焉이요 行義正焉이요 禮敬淸焉이니라
棄其所載하고 舍其所生하며 用其成形하고 役其聰明하면 仁則이요競焉이요 禮(其)[則]爭焉이라
故仁德之厚 非用仁之所能也 行義之正 非用義之所成也 禮敬之淸 非用禮之所濟也
載之以道하고 統之以母 故顯之而無所尙하고 彰之而無所競이라
用夫無名이라 故名以篤焉하고 用夫無形이라 故形以成焉이라
守母以存其子하고 崇本以擧其末하면 則形名俱有而邪不生하고 大美配天而華不作이라
故母 不可遠이요 不可失이라
仁義 母之所生이니 非可以爲母 形器 匠之所成이니 非可以爲匠也
捨其母而用其子하고 棄其本而適其末하면 名則有所分하고 形則有所止하리니
雖極其大 必有不周하고 雖盛其美 必有患憂리니 功在爲之라도 豈足處也리오


제38장은 《도덕경道德經》 후반부의 첫 장이다. 마왕퇴馬王堆 백서帛書에서는 ‘도경道經’과 ‘덕경德經’의 순서가 뒤바뀌어 있으므로, 제38장은 전반부前半部의 첫 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제38장은 분명 ‘’을 다루고 있으며, 그래서 후반부後半部 전체는 나중에 ‘덕경德經’이라는 제목이 붙여지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이 책은 이른바 ‘도덕경道德經’, 즉 ‘’와 ‘’에 관한 경전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제38장의 처음 세 절은 제18장과 유사한 주제로서 유가儒家의 ‘’을 비판하고 있다. 유가의 ‘’은 영어권에서는 ‘virtue’라고 번역하는 반면, 《노자老子》의 맥락에서 ‘efficacy(효력效力)’ 또는 ‘power(힘)’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유가에서 ‘덕’은 강력한 도덕적 함축을 가지면서 인의례지仁義禮智와 같은 개념들과 연결되지만, 《노자》에서 ‘’은 이러한 도덕적 함축은 사라지고 대신에 ‘’와 더욱 밀접하게 연관된다.
《노자》의 은 일종의 효력으로 ‘’에 부수되는 것이다. 첫째 절에서 말하는 더 높은 차원의 ‘덕’, 즉 ‘상덕上德’은 유가의 도덕적 의미의 덕이 아니다. 진짜 덕은 그러한 덕 너머(beyond)에 있으며, 도덕적이지 않다. 그것은 순수한 효력이 된다. 유교적儒敎的 가치價値에 매달리는 덕은 《노자》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무력하기(powerless) 짝이 없다.
따라서 제38장은 제18장과 같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유교적 가치의 하향적 악순환을 묘사하고 있다. 일단 삶을 도덕적인 방식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강제적인 행위로 가는 길이 시작되고 따라서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우주적 질서로의 회귀는 더욱 더 어려워지게 된다.
마지막 두 절은 흔히 상호 해명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마지막 절은 분명 ‘대장부大丈夫’가 ‘’나 ‘전식前識’에 매달리지 않을 것임을 함축한다. 따라서 ‘전식前識’의 개념은 부정적인 것이다. 하상공河上公 에서는 ‘전식’이 실질을 놓친 부적합하고 겉치레적인 지식을 의미하며 표면적이거나 도의 ‘꽃’ 수준에 머무는 것이라고 주석한다. ‘전식’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이 장의 맥락에서는 근거가 충분하지만, 다른 장들과 연결하여 읽을 때에는 약간 의심스러운 부분들이 있다.
여기서 언급된 ‘단순한 마음가짐’을 뜻하는 ‘’가 제10장과 제65장에서는 부정적이지 않고 오히려 긍정적이다. 도와 일치하게 되는 것은 흔히 어떤 특정한 지식이 없이 그렇게 사물의 추이에 직관적으로 따를 줄 아는 능력을 소유한 것으로 묘사되곤 한다. 이런 맥락에서 읽게 되면 ‘전식’에 관한 경구는 또한 지적인 소박성에 대한 찬양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전식前識’은 도의 추이에 대한 직관적 통찰이 된다.
왕필王弼상덕上德무위無爲하지만 무불위無不爲(하지 못하는 것이 없는)하는 반면, 하덕下德위지爲之(무언가를 추구)하지만 무이위無以爲(무언가를 가지고 함이 없이)하는 것으로 크게 대별大別하여 나눈 뒤에 다시 하덕下德위계적位階的으로 나눈다. 상인上仁무이위無以爲하고, 상의上義유이위有以爲(무언가를 가지고)하는 것으로 다시 구분하여 《노자》에 보다 확실한 위계를 부여하고자 한다.
하지만 왕필王弼은 이렇게 에서 으로, 그리고 다시 로 멀어지는 과정이 자체의 한계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에 해당하는 소박素樸함을 잃고 겉을 꾸미는 데에만 치중하는 데서 온 것이라 본다. 그러면서 근본을 되찾으면 다시 긍정될 수 있는 것이라는 “어미를 지켜 자식을 보존하고 근본을 지켜 말단을 받든다.[수모이존기자守母以存其子 숭본이거기말崇本以擧其末]”는 논리를 통해 인의仁義의 회복을 긍정하는 암시를 한다. 이는 《노자》의 역설逆說의 논리를 통해 오히려 인의仁義를 긍정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높은 덕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덕을〉 덕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 때문에 덕이 있고,
〈높은 덕을 지닌 사람은〉 덕을 가지고 있으면 〈그 덕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버리고, 〈자신의 덕을〉 덕으로 여기지 않으면 〈그 덕을〉 얻으려고 하는 〈마음을〉 버린다.
낮은 을 지닌 사람은 그 덕을 잃지 않으려 하니 이 때문에 덕이 없다.
높은 덕을 지닌 사람은 함이 없으나 하지 못하는 게 없고, 낮은 덕을 지닌 사람은 무언가를 하나 무엇을 가지고 함이 없다.
높은 을 지닌 사람은 무언가를 하나 무엇을 가지고 함이 없으며,
높은 를 지닌 사람은 무언가를 하나 무엇을 가지고 함이 있으며,
높은 를 지닌 사람은 무언가를 하는데 〈사람들이〉 그에 응하지 않으면 팔을 걷어붙이고 사람을 잡아당겨 〈억지로〉 한다.
그러므로 를 잃은 후에 덕이요, 덕을 잃은 후에 인이요, 인을 잃은 후에 의요, 의를 잃은 후에 예이다.
무릇 예란 진실함[]과 믿음[]이 얇으니 어지러움의 머리이고, 미리 안다는 것은 도의 〈허황된〉 꽃이요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이 때문에 대장부大丈夫는 그 두터운 곳에 처하지 얇은 데에 머물지 않으며, 실질적인 것에 처하지 그 〈허황된〉 꽃에 머물지 않는다.
이 때문에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이란 것은 ‘얻음’이다.
늘 얻어 잃음이 없고, 늘 이로워 해를 당하지 않는다.
그래서 ‘덕’으로 이름한 것이다. ‘덕’은 어떻게 얻어지는가? 도를 말미암아서이다.
어떻게 그 덕을 다하는가? ‘’를 그 쓰임으로 삼아서이다. 를 쓰임으로 삼으면 싣지 못하는 게 없다.
이 때문에 어떤 사물이 의 상태이면 경유하지 못하는 것이 없고, 의 상태이면 을 온전히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천지天地는 비록 넓어도 를 마음으로 삼고, 성왕聖王은 비록 위대하나 를 기본원칙으로 삼는다.
그래서 〈《주역周易》에서〉 “복괘復卦를 가지고 보면 천지天地의 마음이 드러나고”, “동짓날에 〈이르러 이에 대해〉 생각하면 선왕先王의 기본원칙이 보인다.”고 했다.
그러므로 〈군주가〉 자신의 사사로움을 버리고서 제 몸이 없는 〈경지에〉 있게 되면 사해四海 〈안의 모든 백성들이〉 존경하지 않음이 없고, 멀고 가까운 곳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이와 달리〉 자신을 남과 다르게 하고서 제 〈사사로운〉 마음을 갖게 되면 한 몸뚱이조차 스스로 온전히 할 수 없고 〈몸 안의〉 살과 뼈마저 서로 용납할 수 없어 〈다투게〉 된다.
이 때문에 높은 을 지닌 사람은 오로지 를 쓴다.
자신의 덕을 덕이라 여기지 않고, 〈어떤 원칙에〉 집착함도 없고 〈어떤 것만을〉 쓰려고 함도 없다.
그래서 덕이 있고 하지 못하는 것이 없을 수 있으니, 구하지 않아도 얻고 하지 않아도 이루어낸다. 그래서 〈높은 덕은〉 비록 덕이 있으나 그 덕의 이름이 없다.
〈이와 달리〉 낮은 덕은 구해야 얻고 해야 이루어내니, 〈이것은〉 곧 〈일정한〉 을 세워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래서 덕의 이름이 있게 된다.
구해야 그것을 얻는다면 반드시 거기에는 잃는 게 있고, 해야 이룬다면 반드시 거기에는 실패가 있게 되며, 의 이름이 생겨나면 불선不善이 그에 응하여 〈생겨난다.〉
그래서 “낮은 덕을 〈지닌 사람은〉 무언가를 하나 무엇을 가지고 함이 없다.”고 했다. ‘무엇을 가지고 함이 없다.’는 것은 치우치게 하는 바가 없다는 뜻이다.
무릇 무위無爲를 할 수 없어서 무언가를 하는 것은 모두가 낮은 덕에 해당하니 , 예절禮節이 이것이다.
〈이는〉 덕의 높고 낮음을 밝히려고 번번이 낮은 덕을 들어 높은 덕에 대비시킨 것이다.
‘무엇을 가지고 함이 없는’ 데에 이르는 것은 낮은 덕의 역량을 다한 것이니 높은 이 이에 해당한다.
〈높은 인은〉 무엇을 가지고 함이 없는 데에는 충분히 도달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오히려 무언가를 하니, 무언가를 하되 무엇을 가지고 함이 없는 까닭에 유위有爲의 우환이 있다.
근본은 무위無爲에 있고, 어미는 무명無名에 있는데, 〈높은 인의 경우〉 근본을 버리고 말단으로 나아갔고, 어미를 버리고 자식을 쓰니, 공이 비록 커도 반드시 다스리지 못하는 게 있고, 이름이 비록 아름다워도 반드시 거짓이 생겨날 것이다.
무언가를 하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고 일으켜 세우지 않고서는 다스릴 수 없으면 곧 무언가를 하게 되기 때문에 두루두루 널리 인애仁愛를 베풂이 있게 된다.
하지만 그 사랑에 치우침이나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에 높은 인을 지닌 사람은 무언가를 하나 무엇을 가지고 함이 없는 것이다.
사랑은 모두에게 똑같이 할 수 없으면 어느 쪽은 누르고 어느 쪽은 막으면서 정직正直의리義理로 따지는 사람이 나오니,
〈이런 사람들은〉 구부러진 것에는 성내고 바른 것은 도와 저것은 도와주고 이것은 공격하니 일에나 사람에 대해 〈일정한〉 마음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높은 의를 지닌 사람은 무언가를 하나 무엇을 가지고 함이 있는 것이다.
곧음이 돈독하지 못하면 문식文飾을 잘 꾸미고 닦아 예경禮敬을 갖춘 사람이 나오니, 〈이런 사람은〉 예경을 닦는 것을 숭상하고 좋아하며 관계 맺음의 사소한 것까지 따지면 서로 맞지 않는 사이에는 분노의 감정이 생겨난다.
그래서 높은 예를 지닌 사람은 무언가를 하는데 〈사람들이〉 그에 응하지 않으면 팔을 걷어붙이고 〈사람을〉 잡아당겨 〈억지로〉 하는 것이다. 저 지극히 큰 것은 아마도 뿐일 것이다.
이로부터 이미 나아간 것이 어찌 존경받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서 성인聖人에 대해 말하였듯이〉 비록 덕업德業성대盛大하고 만물萬物을 다 갖추었으나 오히려 각자 저마다의 덕을 갖고 있어 아직 두루 다 포괄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하늘은 〈땅이 하는 만물을〉 싣는 일을 할 수 없고, 땅은 〈하늘이 하는 만물을〉 덮어주는 일을 할 수 없고,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은 〈만물 모두를〉 풍족하게 할 수는 없다.
만물은 비록 귀하나 를 쓰임으로 삼는 것이니, 를 온전히 로 삼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를 온전히 체로 삼는 데에 이르지 못하면 그 위대함을 잃으니, 이른바 ‘도를 잃은 후에 덕’이라는 것이다.
를 쓰임으로 삼으면 어미를 얻기 때문에 몸소 수고하지 않아도 만물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다.
이 이하로 나아가면 쓰임의 어미를 잃으니 무위할 수 없어 널리 베푸는 것을 귀히 여기고,
널리 베풀 수 없어 바르고 곧음[정직正直]을 귀히 여기고,
바르고 곧게 할 수 없으니 꾸미고 공경함을 귀히 여기게 되니,
이른바 ‘덕을 잃은 후에 이고, 인을 잃은 후에 이고, 의를 잃은 후에 이다.’라는 것이다.
는 진실함과 믿음이 돈독하지 못하고 소통과 쉬움이 분명하지 않은 데서 시작되니 겉꾸밈만 따지고 갖추며 하찮은 것을 가지고 싸우고 나뉜다.
인의仁義란 안에서 우러나오는 것인데 이를 〈일부러 하려고〉 하면 오히려 거짓이 되니, 하물며 바깥을 꾸미는 일에 힘을 쓰는데 오래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 “무릇 예란 진실함과 믿음이 얇으니 어지러움의 머리이다.”라고 한 것이다.
전식前識은 남보다 먼저 아는 것이니 곧 낮은 덕의 부류이다.
자신의 총명함을 다해 남보다 먼저 알려 하고, 자신의 지력智力을 써서 사소한 일까지 헤아리고자 하니,
비록 실정을 파악해도 간교함이 더 치밀해지고
비록 칭송하는 소리가 가득해도 돈독함과 실효성이 더 사라지니, 수고해도 일처리는 혼란스럽고 힘써서 해도 다스림은 거칠어지니, 성지聖智를 다해도 백성들은 오히려 더 해롭다 여긴다.
자기를 버리고 사물 〈그 자체에〉 맡기면 무위無爲해도 평안하고, 저 소박함을 지키면 전장제도가 필요치 않으니 저 〈미리〉 얻은 것에 사로잡혀 이 지켜야 할 것을 버린다.
그래서 ‘미리 안다는 것은 도의 〈허황된〉 꽃이요 어리석음의 시작’인 것이다.
그래서 진실로 공을 이루는 어미를 얻으면 만물이 그에 의해 자라지만 잔소리 않고, 만사가 그에 의해 보존되지만 수고롭지 않다.
〈사람을〉 쓸 때 그의 형체[]로 하지 않고 〈사람을〉 부리되 그의 이름[]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인의仁義를 드러낼 수 있고 예경禮敬을 빛나게 할 수 있다.
무릇 〈만물을〉 실을 때에는 큰 도로 하고 〈《노자》 37.3에서 말하듯이 만물을〉 진압할 때에는 무명無名으로 하면, 사람들이 숭상할 것이 없고 야심 있는 사람들이 바빠질 까닭이 없다.
각자에게 합당한 일을 맡기고 저마다 성실함을 다하면 인덕仁德이 후해지고 를 행함이 바로잡히고 예경이 맑게 된다.
실어야 할 것을 버리고 살려야 할 것을 버리며 이미 자신의 완성된 형체를 쓰고 자신의 총명함을 쓰면 은 숭상의 대상이 되고 는 경쟁의 대상이 되고 는 다툼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인덕의 후함은 인을 써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요, 의를 행하는 바름은 의를 써서 이룰 수 있는 게 아니요, 예경의 맑음은 예를 써서 다스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만물을〉 실을 때에 도로 하고 〈만물을〉 통솔할 때에 어미로 하기 때문에 드러나도 숭상할 게 없고, 빛나도 다툴 게 없는 것이다.
무명無名을 쓰기 때문에 이름이 돈독해지고 저 무형無形을 쓰기 때문에 형체가 이루어진다.
어미를 지켜 자식을 보존하고 근본을 숭상하여 말단을 받들면 형명形名이 함께 갖추어져 사특함이 생겨나지 않고, 큰 아름다움이 하늘에 짝하여 〈허황된〉 꽃이 피지 않는다.
그래서 어미는 멀리해서는 안 되고 근본은 잃어서는 안 된다.
인의는 어미가 낳은 것이니 어미가 될 수 없고, 그릇은 장인匠人이 만든 것이니 〈그릇 그 자체가〉 장인이 될 수 없다.
어미를 버리고 자식을 쓰며 근본을 버리고 말단으로 나아가면, 이름에 나뉨이 생기고 형체에 그침이 있게 될 것이니,
그 큼을 끝까지 다해도 반드시 두루 다 하지 못하는 게 있고 그 아름다움을 융성히 해도 반드시 우환이 있게 되니, 공이 무언가를 하는 데에 있다 해도 어찌 처할 만하겠는가.


역주
역주1 有德……則遺其得 : 저본에는 없고 范應元本에만 있다. 樓宇烈 등은 이 부분을 받아들이지 않으나, 波多野太郞은 《老子王注校正》에서 바그너는 이 注가 王弼의 것으로서 논의의 맥락이 王弼의 기조와 일치하므로 수용하는데, 여기서는 이를 따른다.
역주2 (以)[不] : 저본에는 ‘以’로 되어 있으나, 《韓非子》 〈解老〉, 嚴遵의 《老子指歸》, 傅奕本, 范應元本에는 ‘不’로 되어 있다. 王弼本의 경우 ‘以’와 ‘不’ 가운데 어느 것이 맞느냐는 불확정적인데, 바그너는 注38.2에서 “故能有德而無不爲 不求而得 不爲而成”이라 하였으니 ‘無不爲’로 보는 것이 맞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보면 王弼의 논리는 上德은 無爲 - 無不爲, 下德은 爲之 - 無以爲라는 틀에서 下德을 위계적으로 구분하여 仁 - 無以爲, 義 - 有以爲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 명쾌한 해명이므로 이를 따른다.
역주3 (有)[無] : 저본에는 ‘有’로 되어 있으나, 傅奕本, 范應元本에는 ‘無’로 되어 있고, 帛書本에는 이 부분 전체가 없다. 바그너는 注38.2에서 王弼이 먼저 크게 上德과 下德으로 大別하고, 이어서 下德을 位階的으로 논하는데 上仁에 대해 ‘無以爲’라고 말하고 있기에 이 부분은 마땅히 ‘無以爲’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만약 下德을 ‘有以爲’라 한다면 上仁에 대해 ‘無以爲’라 한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또한 注文에서 이 문장에 뒤이어 바로 ‘無以爲者 無所偏爲也’라고 ‘無以爲’의 뜻을 설명한 것을 보아도 문장의 맥락상으로 ‘無以爲’가 되어야 한다. 바그너의 설에 따라 ‘無’로 수정한다.
역주4 (免)[全] : 저본에는 ‘免’으로 되어 있다. 樓宇烈은 그대로 수용하나 바그너는 ‘全’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그너는 이 부분의 해석이 상당히 어렵다고 전제하면서,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든다. 《周易》 ‘復卦’ 〈彖傳〉의 “복괘에서 천지의 마음이 드러난다.[復 其見天地之心乎]”고 한 부분에 왕필은 이렇게 주석한다. “그런즉 하늘과 땅이 비록 커서 온갖 생명체로 가득하여 우레가 치고 바람이 부는 데에 따라 온갖 자연의 변화가 일어난다 해도, 고요히 無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 天地의 근본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괘의 上卦와 下卦 즉 움직임을 나타내는 辰卦(☳)와 땅을 나타내는 坤卦(☷)로 이루어진 卦象이 보여주듯이〉 자연의 변화가 땅속에서 멈출 때 바로 天地의 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만약 天地가 有를 마음으로 삼는다면 부류가 다른 것이 함께 공존할 수 없게 될 것이다.[然則天地雖大 富有萬物 雷動風行 運化萬變 寂然至無是其本矣 故動息地中 乃天地之心見也 若其以有爲心 則異類未獲具存矣]” 여기에서 道 자체가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도가 만물을 온전하게 지켜줄 수 있다고 하는 사고가 드러나는데, 이와 유사하게 注40.3의 ‘將欲全有 必反於無也’, 注45.6의 ‘靜則全物之眞’ 등에서도 그러하다. 바그너는 이를 근거로 ‘免’을 ‘全’으로 교감하는데 여기서는 이를 따른다.
역주5 : 張之象本에는 ‘至’가 ‘主’로 되어 있는데, 바그너는 ‘主’가 맞다고 보았다. 至로 보면 ‘선왕의 지극함’의 뜻이고 主로 보면 ‘선왕께서 지켰던 원칙’의 의미가 된다. 어느 것을 택하더라도 크게 무리가 없으므로 바그너의 의견은 참고로 소개한다.
역주6 (有)[無] : 저본에는 ‘有’로 되어 있으나, 范應元本, 李善本에는 ‘無’로 되어 있다. 앞의 經38.2의 역주 2)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바그너의 설에 따라 ‘無’로 바로잡는다.
역주7 (下) : 저본에는 ‘下’가 있으나 衍文으로 처리하였다.
역주8 有(爲)[有]爲之患 : 저본에는 ‘有爲爲之患’이라 되어 있으나, 樓宇烈과 바그너 모두 ‘有有爲之患’의 잘못이라 보았다. 또한 中國科學院에서 펴낸 《中國歷代哲學文選》 〈兩漢隨唐編〉에서도 이를 ‘有有爲之患’의 잘못이라 지적하였다. 이에 의거하여 바로잡는다.
역주9 (棄本捨母而適其子)[棄本而適其末 舍母而用其子] : 저본에는 ‘棄本捨母而適其子’로 되어 있으나, 陶鴻慶은 이 부분을 이와 같이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王弼이 本末, 母子의 관계를 통해 설명하는 논리를 구사하는 것으로 본다면 ‘捨母而適其子’는 분명하지만 ‘棄本’은 문장상의 짝이 맞지 않는다. 樓宇烈은 陶鴻慶의 설을 소개하지만 따르지 않고, 바그너는 이를 채택한다. 여기서는 陶鴻慶의 설에 따라 바꾸었다.
역주10 (眞)[直] : 저본에는 ‘直’이 ‘眞’으로 되어 있으나 道藏集注本에 ‘直’으로 되어 있고, 아래 注文에도 ‘忿枉祐直’이라 하였으므로 ‘直’으로 바로잡는다.
역주11 (游)[斿] : 저본에는 ‘游’로 되어 있으나, 바그너는 陸德明의 《經典釋文》과 張之象本에 의거하여 ‘斿’로 보았다. 여기서는 의미상 ‘꾸미다, 장식하다’는 뜻이 와야 하므로 이를 따라 ‘斿’로 바로잡는다.
역주12 [而] : 저본에는 ‘而’가 없으나, ‘修文禮敬之’는 바로 앞의 ‘正直而義理’와 짝을 이루는 문장이므로 ‘修文而禮敬之’가 맞다는 바그너의 주장에 따라 ‘而’를 보충하였다.
역주13 雖德盛業大……而未能自周也 : 《周易》 〈繫辭傳 上〉의 “성대한 德業이 지극하도다. 너르고 크게 다 갖추어짐을 大業이라 하고, 날로 새로워짐을 盛德이라 한다.[盛德大業至矣哉 富有之謂大業 日新之謂盛德]”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
역주14 (而) : 저본에는 ‘而’가 있으나 道藏集注本에 의거하여 衍文으로 처리하였다.
역주15 (得)[有] : 저본에는 ‘得’으로 되어 있으나 道藏集注本, 張之象本에 ‘有’로 되어 있는 것을 따른다.
역주16 (捨)[至] : 저본에는 ‘捨’로 되어 있으나, 《周易》 〈繫辭傳 上〉의 “만물을 고동시키되 성인과 더불어 같이 근심하지 않는다.[鼓萬物而不與聖人同憂]”는 부분에 대한 韓康伯의 注에서 “성인은 비록 도를 체득하여 用으로 삼지만 아직 無를 온전히 體로 삼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천하에 따르고 통하니 〈도와 달리〉 경영의 흔적이 남게 된다.[聖人雖體道以爲用 未能至無以爲體 故順通天下 則有經營之跡也]”를 근거로 한다면 ‘至’로 바꾸는 것이 타당하다. 바그너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至’를 ‘全’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의미상으로는 같은 주장이다. 아래도 같다.
역주17 [則](德)[得] : 저본에는 ‘德’이라 되어 있으나, 樓宇烈은 道藏集注本에 의거하여 ‘則’을 보충하고 문장의 의미에 맞게 ‘德’을 ‘得’으로 바꾸었는데 이를 따른다.
역주18 夫禮也 所始首於忠信不篤 : 波多野太郞은 ‘也’를 ‘之’로 바꿀 것을 주장하였으나, 그대로 두어도 무리는 없어 보인다. 바그너는 服部南郭을 따라서 ‘夫禮之所始首忠信不篤’으로 바꿀 것을 주장하였는데 참고할 만하다.
역주19 (陽)[暢] : 저본에는 ‘陽’으로 되어 있으나, 道藏集注本에 따라 ‘暢’으로 바로잡는다.
역주20 (德)[得] : 저본에는 ‘德’으로 되어 있으나, 道藏集注本에 의거하여 ‘得’으로 바로잡는다.
역주21 (薉)[穢] : 저본에는 ‘薉’로 되어 있으나, 陸德明의 《經典釋文》에 의거하여 ‘穢’로 바로잡는다.
역주22 (聽)[耽] : 저본에는 ‘聽’으로 되어 있으나, 陸德明의 《經典釋文》에 의거하여 ‘耽’으로 바로잡는다.
역주23 [故 前] : 저본에는 없으나, 樓宇烈이 東條弘의 설에 따라 보충한 것에 의거하여 ‘故前’ 두 글자를 보충하였다.
역주24 (貞)[眞] : 저본에는 ‘貞’으로 되어 있으나, 宇惠‧東條弘‧波多野太郞‧바그너 등은 ‘眞’으로 교감하였다. 하지만 樓宇烈은 經39.2의 “王侯得一以爲天下貞”을 근거로 ‘貞事’로 볼 것을 주장하였다. 여기서는 우혜 등의 설에 따라 ‘眞’으로 교감하였다.
역주25 (誠)[尙] : 저본에는 ‘誠’으로 되어 있으나, 樓宇烈이 앞의 ‘物無所尙’에 근거하여 ‘尙’으로 바로잡은 것을 따른다.
역주26 (其)[則] : 저본에는 ‘其’로 되어 있으나, 樓宇烈이 앞뒤 문장에 근거하여 ‘則’으로 바로잡았는데 이를 따른다. 아래도 같다.

노자도덕경주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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