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2 旣
其母
하여 知其子
하고 旣知其子
하여 復守其母
면 沒
不殆
니라
注
[注]兌는 事欲之所由生이요 門은 事欲之所由從也라
注
[注]爲治之功은 不在大니 見大不明이요 見小乃明이며
시간의 부분들이 사슬로 연결되어 있을 때, 한 부분의 종결은 또 다른 부분의 시작을 나타낸다. 이렇게 시작과 끝은 시간의 지속에 있어서 상호의존적이며, 둘 다 시간의 전개 과정 속에서 동일하게 중요한 부분이다. 만일 어떤 것이 ‘적시성適時性’이 ‘탁월’하다면 누군가는 시작처럼 끝에 대한 고려를 해야만 할 것이다. 시간의 과정이 끝을 상정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특정한 단계들은 그것들의 시간이 다 되었을 때 종결되어야만 한다. 영속永續은 ‘중단의 통제(숙달)’에 의해 좌우된다.[지지知止]
영속과 같은 《노자》의 시간개념은 영속과 중절中絶을 구분하는 토대에서 확립되었다. 영속은 시간의 완벽한 형상이고 이것은 그 안에 중단이 없을 때 실현된다. 그러나 중단되지 않는 영속은 동일한 영속이 아니라 오히려 한 부분에서 그 다음 시간의 한 부분으로의 영속적이고 매끄러운 전환이다.
영속은 이와 같이 사물이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 시간이 중단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것은 질서 정연한 전환을 의미한다. 따라서 시간을 교란시키는 두 가지 주요한 원인이 있다. 활동들이 너무 빨리 끝나버려서 그 활동의 목표에 도달하는 데 실패할 수 있거나, 그것들이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서 시간의 진행을 저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속은 정확한 종결과 시작의 지속적인 감독에 기반을 둔다.
만일 시작과 종결이 영속을 탐구하는 도가道家에서 그렇게 중요하다면 아마도 질문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도가적 ‘시간의 사슬’은 때에 맞춘 ‘완전무결’한 시작을 가지고 있는가? 혹은 그것이 시작이나 끝이 없는 주기와 유사한 것인가?
《노자》에서의 몇몇 구절은 정말로 시간에 시작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시작은 우리가 볼 것처럼, 사실 정말로 시간을 선행先行하지는 않는다. 시작은 시간요소의 안에 있다. 《노자》에서 몇몇 구절들은 ‘시작’의 문제나 혹은 제14장에서 표현하는 ‘고대에 시작이 있었다.’와 같은 것들을 논한다.
여기의 제52장은 말한다. ‘천하에는 시작이 있으면 이를 천하의 어미로 여긴다.’ 이런 문구들은 ‘시작’과 ‘모성母性’에 대해 말하는 제1장과도 공명共鳴한다. 그것은 시간이 어떤 것을 시작했던 것처럼, 그러므로 먼 과거에서 현재와 미래에 이르는 화살의 형상처럼 어떤 것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노자》의 제52장은 그러한 선형적線形的 형식에서 진행되지 않다. 거기에는 이러한 상당히 수수께끼 같은 신비한 단어들을 덧붙인다.
천하에 시작이 있으면 이를 천하의 어미로 삼을 수 있으니,
注
그래서 천하에 시작이 있으면 천하의 어미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이미 그 어미를 얻어 이를 통해 그 자식을 알고, 이미 자식을 알아 〈이를 통해〉 다시 그 어미를 지키면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다.
注
근본을 얻어 말단을 알아야지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좇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욕심이 나오는〉 구멍을 막고 〈욕심이 나오는〉 문을 닫으면,
注
태兌란 일 벌이려는 욕심이 생겨나오는 곳이요, 문門이란 일 벌이려는 욕심이 따라 나오는 곳이다.
注
일이 없이 길이길이 편안하므로 죽을 때까지 수고롭지 않은 것이다.
〈욕심이 나오는〉 구멍을 열고 그 일을 다스리면 죽을 때까지 구제받지 못한다.
注
그 〈욕심의〉 근원을 막지 않고서 그 일을 다스리기 때문에 비록 그 몸이 다하더라도 구제받지 못하는 것이다.
작은 것을 보는 것을 ‘밝다’ 하고,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을 ‘강하다’ 하니,
注
다스림을 이루는 공은 큰 것에 있지 않으니 큰 것을 보는 것은 밝은 것이 아니며, 작은 것을 보아야 밝은 것이다.
강함을 지키는 것은 강한 것이 아니라 부드러움을 지켜야 강한 것이다.
注
도를 드러내어 백성들의 미혹됨을 제거한다는 뜻이다.
注
〈성인은 자신의〉 밝음으로 〈까칠하게〉 살피지 않는다는 뜻이다.
제 몸에 재앙거리를 남기지 않으니 이것이 ‘늘 그러함을 익힌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