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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子道德經注

노자도덕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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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因自然也
56.2 言者 不知
[注]造事端也
56.3 塞其兌하고 閉其門하며
[注]含守質也
56.4 挫其銳하고 解其紛하며
[注]除爭原也
56.5 和其光하고
[注]無所特顯이면 則物無偏爭也
56.6 同其塵하니
[注]無所特賤이면 則物無偏恥也
56.7 是謂玄同이라 故不可得而親이요 不可得而疎
[注]可得而親이면 則可得而疎也
56.8 不可得而利 不可得而害
[注]可得而利 則可得而害也
56.9 不可得而貴 不可得而賤이니
[注]可得而貴이면 則可得而賤也
56.10 故爲天下貴니라
[注]無物可以加之也


‘말하지 않음[불언不言]’이란 주제는 《노자老子》에 자주 보인다. 예컨대 제2장, 제23장, 제43장 그리고 제73장이 그러하다. 그런데 이 불언不言무위無爲와 연결된다. 성인 군주는 무위를 행하여 모든 행동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수행되도록 한다. 이와 비슷하게 성인 군주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개인적으로 어떠한 명령도 내리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하는 모든 말 즉 명령이나 지시가 제23장에서 진술하듯 ‘자연스럽게’ 일어나도록 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성인 군주의 말하지 않음은 또한 무명無名에 상응한다. 도에 이름이 없다는 것이 천하에 어떠한 이름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성인 군주의 ‘불언不言’ 또한 천하에 아무런 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름 없는 도는 모든 이름 있는 것들을 정박시켜주는 돛(the anchor of all the named)이며, 말하지 않는 성인 군주는 천하 모든 말의 중심(the center of all speech in society)이다.
또한 한 번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제33장에서 보았듯이 ‘안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가를 아는’ 것이거나 ‘완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통치의 노하우를 가진 성인 군주는 무위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하지 않을 것이며, 이와 반대로 이러한 노하우를 갖지 못한 군주는 자신의 언행言行으로 나라를 다스리고자 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혼란해지게 될 것이다.
둘째 부분은 제50장과 제52장에서 보았던 ‘구멍 닫기’라는 주제를 언급하고 있다. 다소 ‘그윽한(dark)’ 언어로 둘째 부분은 사람에게 아끼고, 마찰이나 정력의 낭비를 피하라고 조언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은 다시 정치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성인 군주는 어떠한 종류의 ‘특수한 관계’도 발전시키지 않으려 한다. 모든 바퀴살에 대해 동일하게 관계를 맺는 수레바퀴의 중심인 ‘(hub)’과도 같이 군주는 완벽하게 치우침이 없다. 예를 들어 제13장에서 선물도 받지 않고 호의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하듯이, 군주는 누구와도 친구가 되지 않으며 또한 누구도 멀리하지 않는다. 이러한 ‘치우침 없음(indifference)’으로 인하여 성인 군주는 명성이 있게 되고 또한 백성들의 존경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본성에〉 따른다는 뜻이다.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말하는 자는〉 사단을 만든다는 뜻이다.
〈성인은 감정이 나오는〉 구멍을 막고, 〈욕정이 나오는〉 문을 닫으며,
질박함을 품고 지킨다는 뜻이다.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그 엉킴을 풀며,
다툼의 원인을 제거한다는 뜻이다.
그 밝은 빛을 부드럽게 하고
유독 드러내는 게 없으면 누구도 특별히 다툴 게 없다는 뜻이다.
그 티끌을 고르게 하니,
유독 천시하는 게 없으면 누구도 특별히 수치스러울 게 없다는 뜻이다.
이것을 일컬어 ‘현묘한 고름’이라 한다. 그러므로 이는 친할 수도 없고, 멀리할 수도 없으며,
친할 수 있으면 멀리할 수도 있다.
이롭게 할 수도 없고, 해롭게 할 수도 없으며,
이롭게 할 수 있으면 해롭게 할 수도 있다.
귀하게 할 수도 없고, 천하게 할 수도 없으니,
귀하게 할 수 있으면 천하게 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 아래 귀함이 되는 것이다.
어떤 것도 그에 보탤 수가 없다는 뜻이다.


역주
역주1 知者不言 言者不知 : 竹簡本에는 ‘知之者不言 言之者不知’라고 되어 있다. 풀이하면 “도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도에 대해 말로 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는 道에 대한 것에 한정되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후대의 판본들은 知와 言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로 내용이 바뀌어 있다. 이 구절에 대해 《淮南子》 〈道應訓〉과 《莊子》 〈知北遊〉에서는 太淸과 無窮, 無爲, 無始의 대화를 통해 우화한다. 《淮南子》 〈道應訓〉에서 太淸이 無窮에게 도를 아느냐고 물으니 무궁은 모른다고 답한다. 다시 태청이 無爲에게 도를 아느냐고 물으니 무위는 안다고 답한다. 태청이 다시 無始에게, 무궁은 도에 대해 모른다 하고 무위는 안다 하는데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르냐고 물었더니, 무시는 “도는 들을 수 없으니 들린다면 도가 아니고, 도는 볼 수 없으니 보인다면 도가 아니다. 도는 말할 수 없으니 말하면 도가 아니다.[道不可聞 聞而非也 道不可見 見而非也 道不可言 言而非也]”고 답한다. 이 대화를 소개한 후, 《회남자》는 《노자》의 經2.1과 함께 이 문장을 인용한다.

노자도덕경주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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