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老子道德經注

노자도덕경주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50.1 出生入死하나니
[注]出生地하여 入死地하니라
50.2 生之徒十有三이요 死之徒十有三이로되 十有三이니
夫何故 以其生生之厚일새라
蓋聞 善攝生者 陸行 不遇兕虎하고 入軍 不被甲兵이니
兕無所投其角하고 虎無所措其爪하고 兵無所容其刃이니라
夫何故 以其無死地일새라
[注]十有三 猶云十分有三分이라
取其生道하여 全生之極 十分有三耳이요 取死之道하여 全死之極 十分亦有三耳
而民生生之厚 更之無生之地焉하나니 善攝生者 無以主爲生이라 故無死地也
器之害者 莫甚乎戈兵하고 獸之害者 莫甚乎兕虎로되
而令兵戈無所容其鋒刃하고 虎兕無所措其爪角하니 斯誠不以欲累其身者也
何死地之有乎리오 夫蚖蟺以淵爲淺하여 而鑿穴其中하고 鷹鸇以山爲卑하여 而增巢其上이라
矰繳不能及하고 網罟不能到하니 可謂處於無死地矣
然而卒以甘餌 乃入於無生之地하니 豈非生生之厚乎
故物 苟不以求離其本하고 不以欲渝其眞이면
雖入軍而不하고 陸行而不可犯也
赤子之可則而貴 信矣니라


삶과 죽음은 분명히 다르다. 사물들은 삶에서 죽음으로 바뀔 때 변형된다. 죽은 것은 잘 부러지고, 살아 있는 것은 탄력적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단계는 모두 동일하게 실재하며 상호보완적相互補完的이다. 부서지기 쉬운 것은 탄력적인 것 못지않게 실제적이다. 제50장의 서두에서는 또한 삶과 죽음의 ‘동반자同伴者’적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는 유사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제76장과 관련해서 이러한 구절들은 삶과 죽음이 상호의존적이라는 또 다른 실례로 이해될 수 있다. 삶과 죽음은 서로 대치되고 따라서 서로 따른다. 일생은 ‘죽음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삶으로 나오는 것은 동시에 죽음으로 가는 것이다. 는 삶과 죽음 둘 모두로 구성되어 있고, 이 순환적인 운동은 항상 태어나는 것이기도 하고 죽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견해에서 볼 때, 노년老年에 이르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가 때에 알맞은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살았다는 것, 즉 그가 너무 빨리 을 마감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그가 불멸不滅이 될 것임을 의미하진 않는다. ‘철학적哲學的인’ 관점에서 늙어가는 것은 단지 너무 이른 시기에 죽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자연적 일시성을 중단시키지 않았다는 것만을 의미한다.
이것은 예를 들어 제42장이 진술하는 것처럼, 위험하게 살고 그러므로 ‘그의 자연적인 끝을 보지 못할’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남자와는 다른 것이다. 이상 사회에서 사람들은 오래 살겠지만 끝없이 살진 않을 것이다. 그들은 딱 알맞은 때 죽을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집에 머물고 ‘노년에 이르고 생을 마감한다’는 제80장에 기술된다.
언급한 것과 같은 구절들은 죽음이 궁극적으로 피할 수 있는 것이라고 암시하지 않는 반면, 다른 구절들은 만일 어떤 이가 단지 충분히 주의하기만 한다면 아마 예방될 병이나 사고의 일종으로 죽음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삶에서 나와 죽음으로 들어가니
살 곳을 나와 죽을 곳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삶으로 가는 무리가 열에 셋이요 죽음으로 가는 무리가 열에 셋인데, 백성 가운데 살고 또 살려고만 하여 움직이다가 모두 사지死地로 가는 것이 또한 열에 셋이다.
〈이는〉 무슨 까닭인가? 〈백성들이〉 살고 또 살려고 하는 마음이 강하기 때문이다.
대저 듣건대 섭생攝生을 잘하는 자는 육지로 다녀도 외뿔들소나 호랑이를 만나지 않고 군대에 들어가도 갑옷과 무기를 착용하지 않으니,
외뿔들소의 뾰족한 뿔에 치받힐 일이 없고 호랑이의 날카로운 발톱에 할퀼 일이 없고 병장기兵仗器의 날카로운 칼날에 베일 일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섭생을 잘하는 자에게는〉 사지死地가 없기 때문이다.
시兕(《삼재도회三才圖會》)시兕(《삼재도회三才圖會》)
‘열에 셋’이란 전체의 10분에서 3분을 차지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생명의 길을 취해 가능한 한 오래 살고자 하는 사람이 10분 가운데 3분이며, 죽음의 길을 취해 가능한 한 빨리 죽고자 하는 사람이 또한 10분 가운데 3분이다.
〈그런데〉 백성들이 살고 또 살려고 하는 마음이 강하면 도리어 생명이 없는 땅으로 가게 된다. 섭생攝生을 잘하는 자는 살기 위해 살려고 함이 없다. 래서 사지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만든〉 기물 가운데 〈전쟁에 쓰이는〉 칼이나 창보다 더 해로운 것이 없고, 짐승 가운데 〈뾰족한 뿔을 가진〉 외뿔들소나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호랑이보다 더 해로운 것이 없다.
그런데 그 창칼로 찌를 곳이 없고 호랑이나 외뿔들소가 뿔이나 발톱으로 치받거나 할퀼 곳이 없게 하니, 이는 진실로 욕심 때문에 자신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한 사람이다.
그러니 어찌 사지가 있겠는가! 〈저 독을 가진〉 파충류爬蟲類들은 연못을 얕다고 하며 그 속에 구멍을 파 들어가 살고, 매와 수리는 산을 낮다고 여겨서 나무 꼭대기 위에 둥지를 틀고 산다.
그래서 주살이 닿지 않고 그물이 미치지 못하니, 사지가 없는 곳에 산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결국 달콤한 미끼 때문에 생명이 없는 땅으로 들어가니, 이것이 어찌 살고 또 살려는 마음이 강해서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만물 중에 자신이 구하는 것으로 인해 근본을 떠나지 않고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타고난 본성[]을 더럽히지 않으면,
비록 군대에 들어가도 〈창칼에〉 해코지당하지 않고 육지를 다니더라도 〈맹수에게〉 당하지 않을 수 있으니,
〈이렇게 볼 때〉 갓난아기야말로 본받을 만하고 귀하다는 말은 믿을 만하다!


역주
역주1 (人之生動之死地)[而民之生生 而動皆之死地] : 저본에는 ‘人之生動之死地’로 되어 있으나, 이는 “사람이 살아 움직이다가 사지로 들어간다.”는 애매모호한 문장이 된다. 하지만 傅奕本, 帛書本 등은 ‘而民之生生 而動皆之死地’로 되어 있는데 이는 注文의 “而民生生之厚 更之無生之地焉”과 호응한다. 따라서 傅奕本과 帛書本에 의거하여 수정한 바그너를 따라 바로잡는다.
역주2 [可] : 저본에는 없으나, 바그너는 뒤의 ‘不可犯’과 대구를 맞춰 ‘可’를 보충하였는데 이를 따른다.

노자도덕경주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