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老子道德經注

노자도덕경주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6.1 老子之書 러니 로다 觀其所由하고 尋其所歸하면 言不遠宗하고 事不失主하니라
義雖廣贍이나 衆則同類
解其一言而蔽之 則無幽而不識하니 每事各爲意 則雖辯而愈惑하니라
6.2 嘗試論之曰
夫邪之興也 豈邪者之所爲乎리오 淫之所起也 豈淫者之所造乎리오
이며 息淫 在乎去華 不在滋章이며
絶盜 在乎去欲이요 不在嚴刑이며 이라
故不攻其爲也 使其無心於爲也 不害其欲也 使其無心於欲也
6.3 故竭聖智以治巧僞 未若見質素以靜民欲하고
興仁義以敦薄俗 未若抱樸以全篤實하고
多巧利以興事用 未若寡私欲以息華競이라
故絶司察하고 潛聰明하고 去勸進하고 翦華譽하고 棄巧用하고 賤寶貨
唯在使民으로 愛欲不生이요 不在攻其爲邪也
皆崇本以息末之謂也
6.4 夫素樸之道 不著하고 而好欲之美 不隱하면
雖極聖明以察之하고 竭智慮以攻之라도
巧愈思精하면 僞愈多變하고 攻之彌深하면 避之彌勤하리니
則乃智愚相欺하고 六親相疑하고 樸散眞離하여 事有其姦이라
蓋捨本而攻末하면 雖極聖智라도 愈致斯災어늘 況術之下此者乎
이요 攻之以聖智하면 則民窮而巧殷이라
故素樸可抱 而聖智可棄
夫察司之簡하면 則避之亦簡하고 竭其聰明하면 則逃之亦察하니
簡則害樸寡하고 察則巧僞深矣
夫能爲至察探幽之術者 匪唯聖智哉
其爲害也 豈可記乎
故百倍之利未渠多也
6.5 夫不能辯名이면 則不可與言理하고 不能定名이면 則不可與論實也하니라
凡名生於形하고 未有形生於名者也
故有此名이면 必有此形하고 有此形이면 必有其分하여 不得謂之聖이요 不得謂之仁이니 則各有其實矣
夫察見至微者 明之極也 探射隱伏者 慮之極也
能盡極明 匪唯聖乎 能盡極慮 匪唯智乎
校實定名하여 以觀絶聖하면 可無惑矣니라
夫敦樸之德 不著하고 而名行之美 顯尙하면 則脩其所尙而望其譽하고 脩其所顯而冀其利하니라
望譽冀利하여 以勤其行하면 名彌美而誠愈外하고 利彌重이나 而心愈競하리니
父子兄弟 懷情失直하여 孝不任誠하고 慈不任實하니
蓋顯名行之所招也
患俗薄하여崇仁義하면 愈致斯僞하리니
況術之賤此者乎잇가
故絶仁棄義하여 以復孝慈 未渠弘也
6.6 夫城高 則衝生하고 利興이면 則求深하니
苟存無欲이면하고 私欲苟行이면 則巧利愈昏하니라
故絶巧棄利하여 代以寡欲하면 盜賊無有로되 未足美也
夫聖智 才之傑也 仁義 行之大者也 巧利 用之善也
本苟不存인댄 而興此三美라도 害猶如之어늘 況術之有利斯以忽素樸乎
故古人有歎曰 甚矣 何物之難悟也오하니
旣知不聖爲不聖하고 未知聖之爲不聖也 旣知不仁爲不仁하고 未知仁之爲不仁也
故絶聖而後 聖功全하고 棄仁而後 仁德厚니라
夫惡强 非欲不强也 爲强則失强也 絶仁 非欲不仁也 爲仁則僞成也일새러니
有其治而乃亂하고 保其安而乃危하니라
이니 身先 非先身之所能也
이니 身存 非存身之所爲也
功不可取하고 美不可用하니
故必取其爲功之母而已矣니라
篇云 라하니 尋斯理也 何往而不暢哉리오


노자老子》라는 책은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아! ‘근본을 높여 말단을 그치게 하는 것’일 뿐이라고 〈하면 거의 맞을 것이다.〉 유래하는 것을 살피고 귀결되는 것을 탐색하면 말한 것이 근본에서 멀어지지 않고 일처리가 근본을 잃지 않는다.
노자老子의〉 글이 비록 5천 글자이나 그것을 꿰고 있는 것은 하나이다.
그 뜻은 비록 넓고 넉넉하지만 그 수많은 말의 〈취지가〉 같은 부류에 속한다.
한마디로 요약한 것을 풀이하면, 어둡지만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일마다 각각 뜻을 삼고자 한다면 비록 아무리 논변할지라도 더욱 미혹되게 된다.
〈나 왕필이〉 이에 대해 논의해본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사악함이 생겨나는 것이 어찌 사악한 자가 하는 것이겠으며, 음란함이 일어나는 것이 어찌 음란한 자가 만드는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사악함을 막는 것은 진실함을 보존하는 데 있지 감찰을 잘하는 데 있지 않으며, 음란함을 그치게 하는 것은 화려함을 없애는 데 있지 법령法令을 세밀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으며,
도둑질을 없애버리는 것은 욕심을 버리는 데 있지 형벌刑罰을 엄격히 하는 데 있지 않으며, 송사訟事를 그치게 하는 것은 〈얻기 어려운 재화를〉 숭상하지 않는 데 있지 재판을 잘 처리하는 데 있지 않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하는 바를 공격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행위에 무심無心해지도록 만들려는 것이며, 백성들이 욕심내는 것을 해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욕심에 무심해지도록 하려는 것이다.
조짐조차 없을 때 일을 계획하고 아직 시작하지 않았을 때에 한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스러움과 지혜를 다 부려서 기교와 속임수를 다스리는 것은 소박한 상태를 드러내어서 백성들의 욕심을 고요하게 하는 것만 못하고,
인의仁義를 일으켜 야박한 풍속을 도탑게 하는 것은 소박한 상태를 견지하고서 독실한 상태를 온전히 하는 것만 못하고,
교묘함과 이로움을 많게 해서 일의 쓸모를 일으키는 것은 사욕私慾을 적게 해서 ‘겉만 화려하고 실없는 경쟁’을 종식시키는 것만 못하다.
그러므로 사찰司察을 끊고 총명聰明을 드러내지 않고 부지런히 나아가는 것을 없애고 실속 없는 명예를 제거하고, 교묘한 쓰임을 버리고 보화寶貨를 하찮게 여긴다.
오로지 백성들에게 애욕愛慾이 생겨나지 않게 하는 데 달려 있고, 사악한 짓을 다스리는 데 달려 있지 않다.
그러므로 소박함을 드러내어서 성스러움과 지혜를 끊어버리고, 사욕을 적게 해서 교묘함과 이로움을 버리게 하는 것은 모두 ‘근본을 받듦으로써 말단을 그치게 하는 것’을 이르는 것이다.
소박한 가 드러나지 않고 호욕好欲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사라지지 않으면,
설령 성스러움과 명철함을 지극히 하여 백성을 감시하고 지혜와 생각을 다하여 백성을 다스린다 하더라도,
〈다스리는〉 기교가 정밀해질수록 속임수는 더욱 변화무쌍해지고 다스림이 가혹해질수록 〈백성들이〉 피하기를 더욱 힘쓴다.
그러면 지혜로운 이와 어리석은 이가 서로 속이고 육친六親이 서로 의심하며 소박함이 흩어지고 진실함이 이탈되어 일에 간사함이 있게 된다.
근본을 제쳐두고 말엽을 다스리면 비록 성스러움과 지혜를 지극하게 할지라도, 위와 같은 재앙을 더욱 초래할 것인데, 더군다나 이보다 못한 술수에 대해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가공되지 않은 통나무 같은〉 소박함으로 진정시키면 작위함이 없어도 저절로 바르게 되고 성스러움과 지혜로 다스리면 백성은 궁색하게 되고 교묘함은 커진다.
그러므로 소박한 상태를 〈가슴에〉 품고 성스러움과 지혜는 버려야 한다.
살피고 엿보는 것이 간략해지면 피하는 방법도 간략해지고, 총명聰明을 다하면 도피하는 방법도 세밀해진다.
간략해지면 소박한 상태를 해치는 정도가 적어지고, 세밀해지면 속임수를 교묘하게 하는 정도가 심해진다.
지극하게 감시하고 보이지 않는 곳까지 탐색하는 술수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성인과 지혜로운 이가 아닌가?
그 해로움을 어떻게 〈이루 다〉 기록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성스러움과 지혜로움을 끊어버리면 백성들의〉 이익이 백 배가 된다.’라는 것이 그렇게 과장된 말은 아니다.
이름을 분별할 수 없다면 함께 이치를 말할 수 없고, 이름을 정할 수 없으면 함께 내용을 논할 수 없다.
모든 이름은 형상화된 것에서 생겨나고, 형상화된 것이 이름에서 생겨난 적은 없다.
그러므로 어떤 이름이 있으면 반드시 형상화된 어떤 것이 있고, 형상화된 어떤 것이 있으면 반드시 구분된 것이 있어서 어짊[]은 성스러움[]이라고 이를 수 없고, 지혜로움[]은 어짊[]이라고 이를 수 없으니, 그렇다면 제각기 자신의 내용이 있는 것이다.
지극히 은미한 것을 살피고 보는 것은 명철함의 극치이고,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는 것을 탐구하고 알아맞히는 것은 사려思慮의 극치이다.
지극한 명철함을 다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인이 아니겠으며, 지극한 사려를 다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지혜로운 자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내용을 따지고 이름을 규정하여 ‘성스러움을 끊는다’는 말을 관찰하면 미혹됨이 없을 수 있을 것이다.
도탑고 소박한 덕이 드러나지 않고, 이름과 행동의 아름다운 것이 드러나고 숭상된다면, 사람들은 숭상하는 것을 닦아서 명예를 바라고 드러난 것을 닦아서 이익을 기대한다.
명예를 바라고 이익을 기대해서 행동에 힘쓰면, 이름이 아름다울수록 진실성은 더욱 도외시되고, 이익이 많을수록 마음속으로 더욱 경쟁한다.
부자지간과 형제지간이 을 가슴에 품고 있는데도 정직을 상실하여, 는 정성에 의지하지 않고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진실함에 의지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이름과 행실을 높인 것이 초래한 결과이다.
풍속이 야박한 것을 근심해서 이름과 행실을 일으키고 인의仁義를 숭상하면 더욱 이러한 속임수를 초래하게 된다.
그런데 더군다나 이보다 하찮은 술수에 대해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을 끊고 를 버려서 효도孝道자애慈愛를 회복한다는 것’이 그리 과장된 것은 아니다.
이 높으면 성을 부수는 전차[]가 생겨나고, 이익이 흥성하면 하고자 하는 것이 간절해진다.
진실로 〈조금도〉 욕심내지 않는 마음을 보존하면 비록 상을 줄지라도 도둑질을 하지 않고, 개인적인 욕심을 구차하게 부리면 교묘함과 이로움으로 더욱 혼미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교묘함을 끊고 이익을 버려서 욕심을 적게 하는 것으로 대신한다면 도적이 없게 되어도 그다지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다.
성스러움과 지혜는 재주 중에 뛰어난 것이고, 는 행동 중에 훌륭한 것이고, 교묘함과 이로움은 용도 중에 최선의 것이다.
근본이 진실로 보존되지 않으면 이러한 세 가지 훌륭한 것을 흥기해도 해로움이 오히려 위와 같은데, 더군다나 술수를 이롭게 여겨서 소박함을 소홀히 함에랴?
그러므로 옛사람들은 “심하구나! 얼마나 사물에 대해 깨닫기 어려운가.”라고 탄식하였다.
이미 성스럽지 않음이 성스럽지 않은 줄만 알고 성스러움이 성스럽지 않은 줄은 모르며, 이미 어질지 않음이 어질지 않은 줄만 알고 어짊이 어질지 않은 줄은 모른다.
그러므로 성스러움을 끊어버린 이후에 성스러운 공업功業이 완전해지고, 을 버린 이후에 인의 덕이 두터워진다.
강함을 싫어하는 것은 강해지지 않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강해지면 강함을 상실하기 때문이고, 어짊을 끊어버리는 것은 어질지 않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어질어지면 작위作爲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스림이 있으면 이에 어지럽게 되고, 편안함을 보전하면 이에 위태롭게 된다.
자신을 뒤로 했는데도 자신이 앞서게 되니, 자신이 앞서게 됨은 자신을 앞세워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도외시했는데도 자신이 보존되니, 자신이 보존됨은 자신을 보존하여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은 취해서는 안 되고 아름다움은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 되는 어미(근본)를 취해야 할 뿐이다.
《노자》에서 “이미 자식을 알아 〈이를 통해〉 반드시 다시 그 어미를 지킨다.”고 하였으니, 이 이치를 잘 탐구하면 어디를 간들 통하지 않겠는가!


역주
역주1 其幾乎可一言而蔽之 : 《論語》 〈爲政〉에 나온다. “공자가 말했다. ‘《詩經》에 있는 삼백 편의 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다고 할 수 있다.’[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
역주2 崇本息末而已矣 : 이에 관한 논의는 注38.1, 57.5, 58.10 등에 보인다. 여기서 진술하고 있듯이, 왕필이 《老子》에서 파악하는 주된 내용인 ‘崇本息末’은 ‘崇本擧末’로도 표현되는데, 崇本息末이란 말 그대로 ‘근본을 받듦으로써 말단을 자라게 하는’ 것이다. 왕필이 말하는 ‘息末’은 글자 그대로 ‘말단을 그치게 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왕필은 ‘擧末’이라 할 때처럼 ‘말단을 자라게 한다’는 의미를 함축할 때도 있다. 이는 ‘息’이 ‘그치게 하다’와 ‘자라게 하다’는 두 가지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의 번역에서는 ‘말단을 그치게 하다’로 옮겼으나, 왕필의 ‘息’은 ‘근본[本]’이나 ‘어미[母]’를 받듦으로써 ‘말단[末]’이나 ‘자식[子]’을 자라게 한다는 긍정적 의미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왕필이 ‘恕’를 통해 ‘仁義’를 긍정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는 앞서 왕필이 당시의 사상계에 대해 비판하였던 것을 살펴보았다. 왕필은 다섯 가지 학파를 나열하면서 이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저지르는 오류는 모두 근본에서 벗어났다는 점을 지적한다. 왕필은 ‘儒家’ 또한 여기서 예외로 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왕필에게 ‘儒家’란 공자의 제자와 후학으로부터 漢儒까지가 포함되는 대단히 넓은 개념이지만, 이들은 모두 성인 공자의 근본정신[本]에서 벗어난 것으로 본 것이다. 《老子》의 仁義 비판은 바로 이들을 향한 것이지 ‘六經’과 공자의 뜻[意]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왕필은 본 것이다. 공자의 가장 생생한 말을 담고 있는 《論語》의 경우 ‘仁’은 109회, ‘義’는 24회가 나오지만, ‘仁義’가 연용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다. 물론 왕필에게서 ‘인의’가 꼭 부정적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왕필이 ‘인의’를 언급한 곳은 注文에서 5번, 그리고 이 글에서 3번이다. 이 가운데 다소 부정적인 언급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긍정적인 언급 또한 있다. 왕필에 따르면 仁義는 사람의 뛰어난 덕성이고 위대한 행동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인 것, 어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본이나 어미가 낳는 자식(注38.1)에 해당한다. 따라서 비록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인의도 있지만 이 또한 억지로 하는 경우가 되기 쉬우며, 당시와 같이 가식적인 인의가 판치는 세상에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注38.1)고 비판한다. 이는 특히 ‘인의’가 관리의 선발과 인사의 평가 방법으로 사용되는 ‘形名’과 결합함으로써 더욱 그러한 행동을 가장하는 데[顯彰] 골몰하는 사회 풍조가 만연한 것과 관련된다. 왕필이 《老子》에서 발견하는 ‘崇本息末’의 논리는 새로운 천하의 질서가 도래하도록 하기 위한 정치의 방법이라는 점이다. 그럴수록 왕필은 근본으로 돌아갈 것을 제창하는 것이다. 앞서 우리는 왕필에게서 모든 것을 근본으로 되돌리는 ‘무를 통한 근본으로의 환원’을 논의해보았다. 왕필이 有에 대해 無를 근본으로 삼는다고 하였던 것은 근본으로서의 ‘하나[一]’에로 돌아가기 위한 우회의 방법이었다. 그것은 달리 말하자면 공자의 말 속에서, 경전의 언어 속에서 성인이 진정으로 전하고자 했던 것을 회복하려는 의리적 방법을 경유한 것이다.
역주3 文雖五千 貫之者一 : ‘貫之者一’이란 표현 또한 《論語》 〈里人〉에 나온다. “공자가 말했다. ‘曾參아, 나의 道는 하나로 꿰어져 있다.[吾道一以貫之]” 증자가 말했다. “예,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공자가 나가자 문인들이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증자가 말했다. ‘선생님의 道는 忠恕일 뿐입니다.’”
역주4 閑邪……不在善察 : 이 문장은 《周易》 乾卦 〈文言傳〉의 ‘閑邪 存其誠’을 참조할 수 있다.
역주5 止訟……不在善聽 : 《周易》 訟卦 〈象傳〉에 “군자는 이를 본받아서 일을 할 때에 맨 처음을 도모한다.[君子以 作事謀始]”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王弼은 《論語》 〈顔淵〉을 인용하여 “〈공자께서는〉 ‘송사를 처리할 때에는 나 또한 다른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다만 내가 반드시 하려는 것은 송사를 없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송사를 없게 하는 것은 처음을 잘 도모함에 있고, 처음을 잘 도모함은 제도를 만드는 데에 있다.[子曰 聽訟 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 無訟在於謀始 謀始在於作制]”라고 주석하였다. 왕필은 공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송사가 없는 것이 좋은 상태라는 취지를 밝히는데, 이를 뒤의 “조짐조차 없을 때 일을 계획하고 아직 시작하지 않았을 때에 한다.”는 말과 함께 연관지어 생각하면 王弼은 어떤 제도를 만드느냐가 송사를 예방하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한 듯하다. 이는 또한 經32.3의 ‘始制’, 즉 ‘처음 〈관장의〉 제도를 만들 때’에 대한 주석과도 함께 검토해볼 일이다.
역주6 謀之於未兆……如斯而已矣 : 經64.1과 經64.3을 참조할 수 있다.
역주7 見素樸以絶聖智 寡私欲以棄巧利 : 이 부분은 經19章의 내용을 패러디한 문장이다.
역주8 夫鎭之以素樸 則無爲而自正 : 經37.3과 經57.5에 보이는 문장을 따온 것이다. 原文은 다음과 같다. 經37.3은 “侯王 若能守之 萬物將自化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이고, 經57.5는 “故聖人之言云 我無爲而民自化 我好靜而民自正 我無事而民自富 我欲無欲而民自樸”으로 되어 있다.
역주9 (名興行)[興名行] : 저본에는 ‘名興行’으로 되어 있으나, 樓宇烈은 앞에서 ‘名行之美’, ‘顯名行’이라 했고 문맥상으로도 ‘興名行’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보았는데 이를 따른다.
역주10 雖賞而不竊 : 《論語》 〈顔淵〉에 나오는 말이다. “季康子가 도적을 근심하여 孔子에게 물었다. 공자가 답하여 말했다. ‘만일 당신이 〈재물을〉 탐하지 않으면 상을 준다 해도 도둑질하지 않을 것입니다.’[季康子患盜 問於孔子 孔子對曰 苟子之不欲 雖賞之不竊]”
역주11 後其身而身先 : 經7.2에 보인다.
역주12 外其身而身存 : 經7.2에 나온다.
역주13 旣知其子 而必復守其母 : 經52.2에 보인다. 原文은 “旣知其子 復守其母”라고 되어 있는데 王弼은 여기에 ‘而必’을 추가하여 매우 강조하였다.

노자도덕경주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