若使民常畏死라도 而爲奇者면 吾得執而殺之니 孰敢이리오
注
[注]爲逆은 順者之所惡忿也요 不仁者는 人之所疾也라
통행본 텍스트와 달리 마왕퇴馬王堆 백서본帛書本은 첫째 부분에 ‘사형死刑(the death penalty)’에 해당하는 용어가 있어서 - 왕필본은 물론 다른 고대 판본들에도 단지 ‘죽음’을 뜻하는 ‘사死’로만 되어 있다. - 말하고자 하는 주제(issue)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사형 제도가 있다는 것은, 전형적으로 역설적인 변화에 따라 결국 어떤 상황에서는 그것이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제74장은 도가적道家的 억제抑制 모델(a Daoist model of deterrence)을 묘사하고 있다. 만일 백성들이 자신들의 삶을 즐기며 산다면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다. 만약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들은 사형을 무서워 할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누구도 ‘감히’(이는 앞장의 ‘감히 ~함’에 관한 도가적 견해와 비교해보라.) 법을 어기거나 사회의 자연적 질서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둘째 부분에 나오는 ‘나’는 성인 군주를 가리킨다는 점은 아주 분명하다. 오로지 성인 군주만이 사형제도를 관리할 수 있다. 그만이 홀로 사사로움이 없기에(because of his empty self)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또는 어떤 적을 제거하기 위해 사형제도를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도에 따라 행하는 완전히 치우침이 없는 군주에게만이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the power over life and death)을 맡길 수 있다.
만약 누군가가 그를 대신하여 이러한 기능을 맡는다면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모델에서 사형은 오로지 예방 차원으로만 작동할 것이다. 사형제도는 그것이 사용되지 않는 동안만큼만 작동할 것이다. 그것은 결국 스스로 폐기될 것이다.
만약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지도자가 사형제도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자 한다면 그는 반목反目과 대립對立을 낳고야 말 것이다. 백성들은 그의 통치를 독재獨裁로 보고 그에 대항할 음모를 꾸미게 될 것이다.
결국에는 적극적으로 사형제도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그 제도의 희생물이 될 것이다. 만약 누군가 폭력과 복수가 난무하는 사회적 풍토를 만든다면 그 자신 또한 그러한 풍토에서 벗어날 수 없다. 권력이 이동할 때 그가 다른 사람을 다루었던 것과 유사하게 그 또한 다루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백성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어떻게 죽음으로 두렵게 하겠는가!
만약 백성으로 하여금 항상 죽음을 두려워하게 하여도 기이한 행동을 하는 자가 있다면 내가 잡아서 죽일 수 있으니, 누가 감히 그렇게 하겠는가?
注
속임수와 신기한 것으로 무리를 어지럽히는 것을 일컬어 ‘기이하다[기奇]’고 한다.
대저 죽이는 일을 담당한 자를 대신해서 죽인다면 이것은 뛰어난 목수를 대신해서 나무를 다듬는 격이니, 무릇 뛰어난 목수를 대신해 나무를 다듬는 자는 손을 다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注
반역은 순종하는 자들이 미워하고 분노하는 것이요, 어질지 못한 것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늘 죽이는 일을 담당하는 자를 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