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注]萬物萬形은 其歸一也이니 何由致一이오 由於無也니라
從無之有에 數盡乎斯니 過此以往이면 非道之流니라
故萬物之生에 吾知其主니 雖有萬形이라도 沖氣一焉이라
愈多愈遠이니 損則近之하고 損之至盡이라야 乃得其極이니라
旣謂之一하면 猶乃至三이니 況本不一이로되 而道可近乎아
注
[注]我之
엔 非强使人從之也
하고 而用夫自然
하니라
故人相敎에 違之必自取其凶也라하여늘 亦如我之敎人에 勿違之也하니라
제42장은 제40장과 내용상 관련이 깊다. 전반부는 도道, 일一, 이二, 삼三, 만물萬物에 이르는 우주발생론적 설명이라면 후반부는 강량强梁함을 피하라는 교훈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이는 이 두 가지 모두 제40장의 내용과 이어지는 부분들로 되어 있다. 다만 제40장은 죽간본竹簡本에 있으나 제42장은 죽간본竹簡本에 없다는 것이 주목할 사항이다.
독일학자獨逸學者 한스 게오르그 묄러(Hans-Georg Moeller)는 제40장과 제42장의 우주론을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제40장에서 개념적 용어를 통해 말한 것이 여기서는 수적 상징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제40장은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천하만물은 유有에서 생겨나지만 유有는 무無에서 생겨난다.’ 제42장은 순서를 거꾸로 하여 이렇게 진술한다.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이러한 창생創生(generation) 과정의 중심에 도가 있는데, 무無 또는 허虛로서 숫자 하나 - 주목할 것은 0이 아니라는 점이다. - 와 동일시되는 이 도는 유일성唯一性과 전체성全體性을 동시에 나타낸다. 바퀴의 이미지를 통해 설명되는 도는, 비어 있으면서 하나의 중추가 되는 것(the empty and single hub) - 내적인 중심이자 바퀴의 기능의 ‘기원’ - 이면서 동시에 바퀴 전체 - 일어나는 모든 외적 총체 또는 일원론적 우주 - 이다. 도의 전체 시나리오는 이렇게 음陰과 양陽, 밤과 낮, 어둠과 밝음의 교체로 또는 생물학적인 세계에서 암컷과 수컷으로 이루어져 있다. 생산과 재생산의 진행은 이러한 가장 일반적인 이원성二元性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일원론적인 전체는 둘(twoness)을 포괄하고 있다. 이러한 하나이자 둘이 함께 만물로 이루어진 다多의 세계(the multiplicity)를 나타내는 셋(the threeness)을 구성한다. 하나의 전체로서 볼 때 도는 하나이지만, 그 하나됨이란 다만 변화와 재생산의 중심에 있는 근본적인 둘로 이루어진 틀(the frame)일 뿐이다. 따라서 저기의 모든 것을 일으키는 이러한 이원성은 세계 속에 있다.
여기서 수적數的 상징으로 묘사되는 창생의 전체 과정은 〈기독교적인〉 창조론創造論이나 단선적 진화론進化論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차라리 바퀴의 이미지와 같이 ‘통합된 원圓(the integrate circle)’으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바퀴의 운동은 중심에 비어 있는 바퀴축을 둘러싸고 회전하지만, 그 축 자체는 바퀴의 회전을 앞서지도 않고 먼저 시작하지도 않는다. 도는 최초의 운동자나 창조주가 아니다. 그것은 생산과 재생산 과정의 중심에 있을 뿐이다.”
전통적인 주석에서는 도道와 일一을 어떻게 볼 것이냐를 둘러싸고 논의되는데 대체로 두 가지 흐름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기氣와 음양陰陽에 근거하여 우주발생론으로 해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장자莊子》를 원용하여 도道와 만물萬物의 일체를 강조하는 흐름이다. 왕필은 후자의 입장에 서 있지만 이를 재해석하여, 일一을 민심民心으로 연결하여 정치철학으로 나아간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뒤에 이어지는 강량强梁에 대한 경계는 제40장에서 ‘도道의 용用은 약弱에 있다.’고 한 것과 상통하는 교훈을 말하고 있다.
도道가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陰을 등에 지고 양陽을 끌어안아 충기沖氣로써 조화롭게 된다.
사람이 싫어하는 것은 오직 홀로 되고[고孤], 버려지고[과寡], 가진 게 없는 것[불곡不穀]이지만 왕공王公은 이것들을 칭호로 삼는다.
그러므로 사물이란 혹 덜어내면 보태지고 혹 보태면 덜어진다.
注
만물萬物과 만형萬形은 아마도 ‘하나[일一]’로 돌아갈 것이다. 무엇을 말미암아 ‘하나’에 이르는가? 무無를 말미암아서이다.
무無를 말미암아 하나가 되니 〈그렇다면〉 이 하나를 무無라 일컬을 수 있는가?
이미 그것을 하나라 일컬었으니 어찌 ‘말[언言]’이 없다 할 수 있는가?
말이 있고 하나가 있으니 둘이 아니면 무엇이라 하겠는가?
하나가 있고 둘이 있으니 셋을 낳기에 이른다.
무無로부터 유有로 나아감에 숫자는 여기에서 다하였으니 이 셋을 지나 더 나아가면 도道의 부류가 아니다.
그러므로 만물萬物이 생성할 때에 나는 그 주인을 알고 있으니, 비록 만형萬形이 있더라도 충기沖氣는 하나가 된다.
백성百姓에게는 이 마음이 있으니 나라와 풍속이 달라도 왕후王侯 가운데 이 ‘하나(충기沖氣, 심心)’를 얻은 자가 그들의 주인이 된다.
이 하나로 주인이 되는데 그 하나를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많아질수록 더욱 멀어지니 덜어내면 그것에 가까워지고 그 덜어냄이 다함에 이르러야 이에 그 궁극을 얻는다.
이미 그것을 일컬어 하나라고 하면 오히려 이내 셋에 이르게 되니, 하물며 근본이 하나가 아닌데 도가 가까워질 수 있겠는가?
덜어내면 보태지고 보태면 덜어진다는 것이 어찌 헛된 말이겠는가.
다른 사람이 가르치는 것을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니,
注
내가 다른 사람을 가르칠 때에는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가르침을 따르게 하지 않고, 저 자연스러움을 쓸 뿐이다.
〈나는〉 그 지극한 도리를 들어서 〈가르칠 뿐이니〉 그에 따르면 반드시 길하고, 그를 어기면 반드시 흉하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가르칠 때에 그것을 어기면 반드시 그 흉함을 자초할 것이라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나 또한 다른 사람을 가르칠 때에는 그것을 어기지 말라고 한다.
강하고 굳세기만 한 사람은 제명에 죽지 못하니, 나는 장차 이것을 가르침의 아버지로 삼는다.
注
강하고 굳세기만 하면 반드시 제명에 죽지 못한다.
사람들이 서로 강하고 굳세라고 가르치는 것은 내가 반드시 강하고 굳세게 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
“강하고 굳세기만 하면 제명에 죽지 못한다.”는 〈말을〉 들어 가르치는 것은 “내 가르침을 따르면 반드시 길하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가르침을 어기는 무리를 얻어 가르침의 아버지로 삼을 수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