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道有大常이요 理有大致하니 執古之道하여 可以御今이라
雖處於今이나 可以知古始니 故不出戶窺牖라도 而可知也라
注
道는 視之不可見하고 聽之不可聞하며 搏之不可得하니 如其知之면 不須出戶요
47.3 是以로 聖人은 不行而知하고 不見而名하니
注
識物之宗이라 故雖不見이라도 而是非之理可得而名也니라
제47장은 “하는 게 없으되 하지 못하는 게 없다.[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는 격률에 관하여 가장 유명한 해설을 담은 장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은 공자孔子의 《논어論語》에 나오는 두 문장과 유사하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함이 없이 다스리신 이는 아마도 순舜임금일 것이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하였는가? 그는 단지 몸을 공손히 하고 앉아서 남쪽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덕으로써 다스리는 것은 비유컨대 북극성과 같다. 북극성은 제자리에 있는데 뭇별이 그를 중심으로 도는 것과 같다.’”
우주적 정치적 시나리오의 중심에 가만히 있음으로써 성인 통치자는 자연과 국가를 다스리는데 마치 바퀴축이 바퀴를 돌리는 것과 같다. 동시에 그는 나면서부터 천도天道를 아는 자이다. 제33장과 관련하여 이미 앞에서 주석하였듯이, ‘안다는 것(to know)’은 또한 ‘체득했다(to master)’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자리를 지킴으로써 통치자는 세상을 다스리는 법(how)을 안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가 움직이지 않은 채 중심에 남아 있기에 성인 통치자는 자신이 우주와 사회에 대한 ‘노하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만약 그가 자신의 자리를 떠난다면 더 많은 지식을 얻지 못하는 게 아니라 통치술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하지 못한 것이 된다. 통치자는 안으로부터 사회를 안정시킬 수 있으며 또한 올바르게 ‘이름을 지을 수’ 있는데, 즉 자신의 자리를 떠남이 없이 국가에서 고유한 기능들을 할당할 수 있다.
문밖을 나서지 않아도 천하의 〈모든 일을〉 알고, 창밖을 내다보지 않아도 천도天道를 아니,
注
일에는 으뜸이 있고 사물에는 주인이 있으니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서 공자孔子가 말씀하신 바와 같이〉 길은 비록 달라도 돌아가는 곳은 같고 생각은 비록 백 가지로 다양해도 이르는 곳은 하나이다.
도에는 커다란 원칙이 있고 이치에는 커다란 일치점이 있다. 〈제14장에서〉 “옛날 〈성왕이 다스리던 때의〉 도를 잡아 오늘을 다스릴 수 있다.”고 했다.
비록 처한 현실은 오늘이지만 옛 시작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문밖을 나서지 않고 창밖을 내다보지 않아도 천도天道를 아는 것이다.
注
무無는 하나에 있는데 많은 것에서 그것을 찾기 때문이다.
도道는 〈제14장에서 말하였듯이〉 보아도 볼 수 없고 들어도 들을 수 없고 만져도 만져지지 않으니 만약 이것을 알면 구태여 문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고,
만약 이것을 모르면 〈문밖으로〉 나아가 멀어질수록 더욱 미혹될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이리저리〉 다니지 않아도 알고, 보지 않아도 이름 지으니,
注
〈성인은〉 사물이 도달할 곳을 깨달았기에 비록 〈이리저리〉 길을 나서지 않아도 〈천하 모든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사물의 으뜸을 알기에 비록 보지 않아도 옳고 그름의 이치를 〈정확히 파악하여〉 이름을 정할 수 있다.
注
〈성인은〉 사물의 본성을 밝게 알아 그에 따를 뿐이다.
그러므로 비록 하지 않아도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이루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