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夫奔電之疾
이라도 猶不足以一時周
하고 이라도 猶不足以一息期
하니
故
은 未足以官天地
하고 有形之極
은 未足以府萬物
이라
是故歎之者는 不能盡乎斯美하고 詠之者는 不能暢乎斯弘하니 名之不能當이요 稱之不能旣라
名必有所分하고 稱必有所由하여 有分則有不兼이요 有由則有不盡이니
不兼則大殊其眞하고 不盡則不可以名하니 此可演而明也라
然則道玄深大微遠之言은 各有其義나 未盡其極者也라
然이나 彌綸無極을 不可名細하고 微妙無形을 不可名大라
然則言之者는 失其常하고 名之者는 離其眞하며 爲之者는 則敗其性하고 執之者는 則失其原矣라
是以로 聖人不以言爲主라 則不違其常하고 不以名爲常이라 則不離其眞하고
不以爲爲事라 則不敗其性하고 不以執爲制라 則不失其原矣라
2.3 然則老子之文을 欲辯而詰者는 則失其旨也하고 欲名而責者는 則違其義也라
故其大歸也
는 하여 以明自然之性
하고 演幽冥之極
하여 以定惑罔之迷
하니
因而不爲
하고 順而不施
하며 하며 賤夫巧術
하고 爲在未有
하며 無責於人
하고 必求諸己
하니
2.5 然致同而塗異하고 至合而趣乖하니 而學者惑其所致하고 迷其所趣러라
觀其齊同하면 則謂之法이요 覩其定眞하면 則謂之名이요
察其純愛하면 則謂之儒요 鑒其儉嗇하면 則謂之墨이요 見其不係하면 則謂之雜이라하니
번개의 빠름일지라도 오히려 일시에 두루 하기에는 부족하고, 바람을 타고 가는 것일지라도 한순간에 도착하기에는 부족하다.
〈《주역周易》에서 ‘신神’에 대해 말한 것처럼〉 정말 빠른 것은 내달리지 않는 데 있고, 잘 도달하는 것은 가지 않음에 있다.
그러므로 말할 수 있으면 아무리 성대해도 천지天地를 주관하기에는 부족하고, 형체가 있으면 아무리 커도 만물을 저장하기에는 부족하다.
이런 까닭에 감탄하는 자는 그 아름다움을 다 표현할 수 없고, 영탄하는 자는 그 광활함을 다 펼쳐낼 수 없으니, 무엇이라고 이름 지어도 적당하지 않고, 무엇이라고 일컬어도 다할 수 없다.
이름 지으면 반드시 분별하는 것이 있고, 일컬으면 반드시 말미암는 것이 있다. 별하는 것이 있으면 겸하지 못하고, 말미암는 것이 있으면 다하지 못한다.
겸하지 못하면 원래의 참된 상태와 매우 달라지고, 다하지 못하면 이름 지을 수 없으니, 이에 대한 것은 미루어 밝힐 수 있다.
도道란 만물이 유래함에서 취한 것이고, 아득함[현玄]이란 어두움이 드러남에서 취한 것이며, 깊음[심深]이란 탐색해도 궁구할 수 없음에서 취한 것이고,
큼[대大]이란 두루 미치려 해도 다할 수 없음에서 취한 것이며, 멂[원遠]이란 매우 멀어서 미칠 수 없음에서 취한 것이고, 세미함[미微]이란 어둡고 작아서 볼 수 없음에서 취한 것이다.
그렇다면 도, 아득함, 깊음, 큼, 세미함, 멂이라는 말은 제각기 나름대로 뜻이 있지만, 궁극을 다하지는 못한 것이다.
그러나 두루 미쳐서 끝이 없음을 작다[세細]고 이름 붙일 수 없고, 미묘해서 형체가 없음을 크다[대大]고 이름 붙일 수는 없다.
이 때문에 《노자》 본문에서 “자字를 붙여 도道라고 한다.” 하고 “신비하다[현玄]고 한다.” 하면서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말로 표현하는 것은 그 항상됨을 상실한 것이고,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 참된 상태를 벗어나는 것이며, 작위作爲하는 것은 본성을 잘못되게 하는 것이고, 〈무엇인가〉 고수하는 것은 그 근원을 상실한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인은 말을 근본으로 삼지 않기에 그 항상됨을 벗어나지 않고, 이름으로 항상된 상태를 삼지 않기에 그 참된 상태를 이탈하지 않으며,
작위함으로 일을 삼지 않기에 그 본성을 잘못되게 하지 않고, 〈무엇을〉 고수하는 것으로 제도를 삼지 않기에 그 근원을 잃지 않는다.
그렇다면 《노자》의 글을 변론하고 캐내고자 할 경우에는 그 대지大旨를 잃게 되고, 이름 붙이고 따지고자 할 경우에는 그 본의本義를 벗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그 대지는 시원始原을 논함으로써 자연의 본성을 밝히고, 어두움의 극치를 추론함으로써 미혹되고 속이는 것을 바로잡는 것이다.
따르고 작위하지 않으며, 순응하고 시행하지 않으며, 근본을 숭상함으로써 말단을 끊어버리며, 어미를 지킴으로써 자식을 보존하며, 교묘한 술책을 천하게 여기고, 조짐도 없는 상태에서 행하고, 남을 책하지 않고 반드시 자신에게서 구한다.
그러나 법가法家는 ‘법 앞에서의 평등[제동齊同]’을 숭상하여 형벌로써 단속하려 한다.
명가名家는 ‘참됨의 판정[정진定眞]’을 숭상하여 말로 바로잡고자 한다.
유가儒家는 ‘완전한 사랑[전애全愛]’을 숭상하여 명예로써 진작시키려 한다.
묵가墨家는 절약의 정신을 숭상하여 억지로 그런 기풍을 세우고자 한다.
잡가雜家는 여러 학파의 장점들을 숭상하여 다 같이 실천에 옮기려 한다.
저 형벌로써 ‘사람[물物]’을 단속하면 꾸밈과 거짓이 반드시 생겨난다.
이름으로 ‘사람[물物]’을 규정하면 ‘이서理恕’가 반드시 상실된다.
명예로써 ‘사람[물物]’을 진작시키면 ‘경쟁 심리[쟁상爭尙]’가 일어나게 된다.
바로잡아 ‘사람[물物]’을 세우면 배반하고 어그러짐이 반드시 일어나게 된다.
여러 가지를 섞어서 ‘사람[물物]’에게 행하게 되면 혼란이 반드시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방법은 모두가 그 자식을 쓰되 그 어미는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물物]’이 정작 보존해야 할 것을 잃게 되니 지키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목표는 같으나 길이 다르고 도달하려는 곳은 같으나 행하는 것이 어그러지니, 배우는 자들이 목표에 대해 갈팡질팡하고 행할 바에 대해서도 혼란스러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주장이〉 ‘법 앞에서의 평등[제동齊同]’인 것을 보면 법가法家라 하고, 〈그 주장이〉 ‘참됨의 판정[정진定眞]’임을 보게 되면 명가名家라 하고,
〈그 주장이〉 ‘순수한 사랑[순애純愛]’인 것을 살피면 유가儒家라 하고, 〈그 주장이〉 ‘절약[검색儉嗇]’인 것을 보면 묵가墨家라 하고, 〈그 주장이〉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것[불계不系]을 보면 잡가雜家라고 한다.
따라서 비추어진 모습에 따라 이름을 바로잡으려 하고, 자신의 기호에 따라 자신의 뜻을 정한다.
따라서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논의와, 다르게 행하고 분변하는 다툼이 모두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