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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子道德經注

노자도덕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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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1 其政 悶悶이면 其民 淳淳하고
[注]言善治政者 無形無名無事하고可擧하여 悶悶然한대 卒至於大治
故曰 其政悶悶也라하니라 其民 無所爭競하고 寬大淳淳이라 故曰 其民淳淳也라하니라
[注]立刑名하고 明賞罰하여 以檢姦僞 故曰 察察也라하고
殊類分析하니 民懷爭競이라 故曰 其民缺缺이라하니라
58.3 禍兮 福之所倚로다 福兮 禍之所伏이로다
孰知其極이리오 其無正이리라
[注]言誰知善治之極乎리오 唯無하고 無(可形)[形可]名하여 悶悶然하면 而天下大化하니 是其極也
58.4 正復爲奇하고
[注]以正治國이면 則便復以奇用兵矣 故曰 正復爲奇하니라
58.5 善復爲妖하니
[注]立善以萬物하면 則便復有妖之患也
58.6 之迷 其日固久
[注]言人之迷惑失道固久矣 不可便正善治以責이라
58.7 是以 聖人
[注]以方導物하여 令去其邪하되 不以方割物이니 所謂大方無隅라하니라
58.8 廉而不劌하고
[注]廉 淸廉也 傷也
以淸廉淸民하여 令去其汙하되 不以淸廉劌傷於物也
58.9 直而不肆하고
[注]以直導物하여 令去其僻하되 而不以直激於物也 所謂直若屈也
58.10 光而不燿하니라
[注]以光鑑其所以迷하되 不以光照求其隱慝也 所謂明道若昧也
皆崇本以息末이요 不攻而使復之也하니라


제58장의 첫째 부분은 제57장의 둘째 부분과 연결된다. 훌륭한 통치자는 앞에 나서지 않고서도 다스린다. 그는 가만히 숨어 있듯 하면서 어떠한 명령도 제한도 가하지 않는다. 만약 그의 통치가 소박함을 지키면 백성들 또한 자연스럽게 소박하고 만족스러운 삶에 이르게 될 것이다. 만약 통치자가 어떤 행동을 취하게 되면 백성들 또한 음모를 꾸미고 다투게 될 것이다.
《노자》는 확실히 모든 사람들의 정치 참여를 권장하는 시민사회市民社會(a civil society)를 주창하지 않는다. 최선의 통치는 백성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고 또한 정권에 참여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제도를 만드는 그런 것과는 무관하다. 《노자》에서 훌륭한 통치란 은밀하고 ‘자동적으로’ 작동한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다스림을 받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고, 또한 스스로 통치에 참여해야겠다는 욕구를 느끼지 못한다.
둘째 부분은 하나의 금언禁言에서 시작한다. 행운과 불운은 상호의존적이다. 《노자》는 천지天地운행運行과 사회적 삶을 길흉吉凶이 수반되는 사건(a rhythm of fortunate and unfortunate events)의 리듬으로 묘사한다. 사물의 진행은 하나의 상황에서 그 다음 상황으로 변화하면서 나아가며, 오늘 행운이라 여겨지는 것, 예를 들어 로또 당첨과 같은 것이 다음날에는 불운으로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즉 당신이 돈을 주고 산 차로 사고가 났을 때가 그렇다. 행운과 불운이란 단지 순간적인 인간의 평가일 뿐이며 하나의 특수한 관점에서 의존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전혀 고정된 범주가 아니다.
〈군주의〉 정사가 어리숙하면 백성의 〈삶이〉 순박하고,
정사를 잘 다스리는 사람은 형체도 없고 이름도 없고 일삼음도 없고 열거할 만한 정책도 없어 어리숙한데 어느새 큰 다스림에 이르렀다.
그래서 “〈군주의〉 정사가 어리숙하다.”고 했다. 〈또 그가 다스리는〉 백성이 싸우고 다투는 일이 없이 너그럽고 순박하다. 그래서 “백성의 〈삶이〉 순박하다.”고 했다.
〈군주의〉 정사가 깐깐하게 살피면 백성의 〈삶이〉 퍽퍽하다.
법률[형명刑名]을 세우고 상벌賞罰의 〈조목을〉 밝혀 간사하고 거짓된 행동을 단속하기 때문에 “〈군주의〉 정사가 깐깐하게 살핀다.”고 했다.
부류에 따라 나누고 쪼개니 백성이 싸우고 다투려는 마음을 품기 때문에 “백성의 〈삶이〉 퍽퍽하다.”고 했다.
재앙이여! 복이 거기에 기대어 있도다. 복이여! 재앙이 거기에 숨어 있도다.
누가 그 〈선정善政의〉 극치를 알겠는가? 〈선정善政의 극치를 아는 자는〉 아마도 바름을 세우는 일이 없을 것이다.
‘누가 훌륭한 다스림의 극치를 알겠는가? 오직 열거할 만한 바름도 없고 이름 지을 만한 형체도 없이 어리숙하면 천하가 크게 교화되니, 이것이 〈다스림의〉 극치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바름은 다시 기이함이 되고,
바름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결국 다시 기이한 계책으로 군대를 운용하게 된다. 그래서 “바름은 다시 기이함이 된다.”고 했다.
선함은 다시 요사妖邪함이 되니
이라는 〈기준을〉 세워 만물을 이롭게 하면 결국 다시 요사스럽게 아첨하는 우환이 있게 된다.
사람이 미혹된 날이 진실로 오래되었다.
사람이 미혹되어 도를 잃은 지 진실로 오래되었으니, 곧 선치善治로 바르게 되기를 책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모남으로 〈만물을〉 해치지 않고,
모남으로 만물을 인도하여 사악한 것을 제거하게 하되 그 모남으로 만물을 해치지 않으니, 이른바 〈41.11에서 말하였듯〉 ‘크게 모난 것은 모서리가 없다.’라는 것이다.
청렴함으로 〈만물을〉 상하게 하지 않고,
은 ‘청렴하다’는 뜻이고, 는 ‘상하게 하다’는 뜻이다.
청렴함으로 백성을 깨끗하게 하여 그 더러움을 없애게 하되 그 청렴함으로 만물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곧게 하되 〈다른 사람에게〉 뻗대지 아니하며,
곧음으로 만물을 인도하여 편벽됨을 없애게 하되 곧음으로 만물을 쳐서 다치게 하지 않으니, 이른바 〈45.3에서 말하였듯이〉 ‘크게 곧은 것은 구부러진 듯하다.’는 것이다.
밝게 비추되 속을 들추지 않는다.
빛으로 그 미혹된 까닭을 비추되 그 빛으로 깊이 숨겨져 있는 것까지 비추지 않으니, 이른바 〈31.3에서 말하였듯이〉 ‘밝은 도는 어두운 듯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근본을 받들어 말단을 그치게 하자는 것이고, 다스리지 않고도 돌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역주
역주1 (政)[正] : 저본에는 ‘政’으로 되어 있으나, 張之象本과 注58.3에 의거하여 ‘正’으로 바로잡는다.
역주2 其政察察 其民缺缺 : 《淮南子》 〈道應訓〉에서는 맑은 灃水와, 中行氏와 知氏의 정치를 토론하는 趙文子가 叔尙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灃水는 너무 맑기만 할 뿐 가려주고 덮어주지 못해 물고기도 모이지 않고 사슴이 뛰놀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趙文子가 叔尙에게 晉나라의 여섯 장군들 중에 누가 가장 먼저 망하겠느냐고 묻자, 숙향은 中行氏와 知氏가 정치하는 것이 가혹함을 잘 살핀다 여기고, 철저함을 지혜롭다 여기고, 아랫사람 쥐어짜는 것을 충성스럽다 여기고, 계교가 많은 것을 공로로 삼으니[以苛爲察 以切爲明 以刻下爲忠 以計多爲功], 이것은 가죽을 잡아 늘이는 것과 같아 결국 찢어지게 될 것이라 답한다. 이 두 이야기를 소개한 후 《회남자》는 《노자》의 이 문장을 인용한다.
역주3 [其政] : 저본에는 없으나, 經文에 ‘其政察察’이라 하였으니 宇惠, 東條弘의 설에 따라 ‘其政’을 보충하였다.
역주4 (可正)[正可] : 저본에는 ‘可正’으로 되어 있으나, 道藏集注本, 張之象本에 의거하여 ‘正可’로 교감한 바그너의 견해에 따라 ‘正可’로 바로잡는다. 뒤의 ‘形可’도 이와 같다.
역주5 (和)[利] : 저본에는 ‘和’로 되어 있으나, 波多野太郞이 ‘利’로 바꾸어야 맞다고 주장한 것에 따라 ‘利’로 바로잡는다.
역주6 [佞] : 저본에는 없으나, 道藏集注本에 따라 ‘佞’을 보충하였다.
역주7 : 傅奕本에 ‘民’으로 되어 있어 바그너는 民으로 볼 것을 제안하고 있어 소개해둔다.
역주8 方而不割 廉而不劌(귀) : 《淮南子》 〈道應訓〉에서는 이 부분을 晏子의 이야기로 설명한다. 齊 景公이 太卜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묻자 태복은 땅을 움직일 수 있다고 답한다. 경공이 안자에게 태복의 답변을 들려주니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물러나와 안자는 태복을 만나 은근하게 깨우쳐준다. 눈치를 챈 태복은 경공에게 찾아가 자신이 땅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다고 말을 고친다. 이 이야기를 들은 田子陽은 “안자가 경공에게 묵묵부답한 것은, 태복의 죽음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고, 안자가 가서 태복을 만난 것은 경공이 속을까 걱정하였기 때문이다. 안자는 진실로 윗사람에게 충성스럽고 아랫사람에게 은혜롭다고 할 수 있다.[晏子默然不對者 不欲太卜之死 往見太卜者 恐公之欺也 晏子可謂忠於上 而惠於下矣]” 《회남자》는 이 이야기를 소개한 후 《노자》의 이 문장을 인용한다.
역주9 (令去其邪) : 저본에는 있으나, 道藏集注本에는 없다. 그래서 陶鴻慶은 이것이 앞의 注58.7의 文章이 끼어들어갔다고 보았는데, 이를 따라 衍文으로 처리하였다.
역주10 (沸)[拂] : 저본에는 ‘沸’로 되어 있으나, 陸德明의 《經典釋文》과 道藏取善集本에 의거하여 ‘拂’로 바로잡는다. 樓宇烈은 ‘激拂’의 뜻을 ‘거스르다[違逆]’라고 보았는데 바그너는 ‘세차게 쳐서 억누르다(shock and supress)’라고 풀이하였다. 이 두 해석을 참조하여 보면 좋다. 여기서는 앞의 흐름을 따라 ‘쳐서 다치게 하다’로 번역하였다.
역주11 [大] : 저본에는 없으나, 經54.3에 의거하여 ‘大’를 보충하였다.

노자도덕경주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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