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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洵(1)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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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老泉欲富公和處其下하여 以就其功名이라
似疑富公於竝相寮貳間有不相能者니라
方是之時 天下咸喜相慶이나 以爲閤下惟不爲宰相也 故黙黙在此
方今困而復起하고 起而復爲宰相하니 而又適值乎此時也하여 不爲而何爲잇가
且吾君之意 待之如此其厚也 不爲而何以副吾望이니잇가
咸曰 後有下令而異於他日者 必吾富公也라하여 朝夕而待之하고 跂首而望之니이다
望望然而不獲見也 戚戚然而疑니이다
嗚呼 其弗獲聞也 必其遠也라하고 進而及於京師 亦無聞焉이니이다
不敢以疑하고 猶曰 天下之人 如此其衆也 數十年之間 如此其不變也 皆曰賢人焉이라하고 或曰 彼其中則有說也 而天下之人則未始見也라하니이다
然而不能無憂하니 蓋古之君子 愛其人也 則憂其無成이니이다
且嘗聞之하니 古之君子 相是君也 與是人也 皆立於朝 則使吾皆知其爲人皆善者也而後 無憂
且一人之身而欲擅天下之事 雖見信於當世라도 而同列之人一言而疑之 則事不可以成이니이다
今夫政出於他人而不懼 事不出於己而不忌 是二者 惟善人爲能이나이나 猶欲得其心焉이니이다
若夫衆人이면 政出於他人而懼其害己하며 事不出於己而忌其成功이니 是以 有不平之心生이니이다
夫或居於吾前하고 或立於吾後하여 而皆有不平之心焉이면 則身危니이다
君子之處於其間也 不使之不平於我也니이다
天下固惑乎大者也 召公猶未能信乎吾之此心也
하여 告召公以其志하여 以安其身하고 以及於成王이니이다
凡安其身者 以安乎周也니라
召公之於周公 管蔡之於周公 是二者亦皆有不平之心焉이니 以爲周之天下 周公將遂取之也니라
周公 誅其不平而不可告語者 告其可以告語者而和其不平之心이니이다
然則 非其必不可以告語者 則君子未始不欲和其心이니이다
天下之人從士而至於卿大夫 宰相相集處其上이니 將有所爲 何慮而不成이리오
不能忍其區區之小忿하여 以成其不平之釁이면 則害其大事
是以 君子 忍其小忿以容其小過하고 而杜其不平之心然後 當大事而聽命焉하노이다
且吾之小忿 不足以易吾之大事也 寧小容焉하여 使無蔕芥於其間이니이다
古之君子 與賢者 竝居而同樂이니 其責之也詳이나 不幸而與不肖者偶 不圖其大而治其細 則闊遠於事情而無益於當世
天下無事而後 可與爭此 不然則否니이다
陸賈入見說之하여 使交歡周勃하니
平用其策하여 卒得絳侯北軍之助以滅諸呂
夫絳侯 木彊之人也 非陳平致之而誰也리오
賢者致其不賢者 非夫不賢者之能致賢者也니라
一去遂不復用하고 以歿其身이라
伏惟閤下 以不世出之才 立於天子之下 百官之上하여 此其深謀遠慮必有所處 而天下之人猶未獲見이니이다
西蜀人也 竊有志於今世하여 願一見於堂上하노이다
伏惟閤下 深思之하여 無忽하소서


02. 부승상富丞相에게 올린 글
노천老泉부공富公(부필富弼)이 그 아래 사람들과 함께 잘 지내면서 공명功名을 이루게 하고자 하였다.
아마 부공富公이 여러 상료相寮들 사이에서 틈이 생겨 잘 지내지 못한 점이 있다고 여긴 것 같다.
왕년往年천자天子께서 진노震怒하시어 재상宰相을 축출하시고 천하를 맡길 만한 구신舊臣선용選用하여 상부相府에 있게 하여 천하와 더불어 다시 시작하시니, 합하閤下의 지위는 실로 세 번째였습니다.
바야흐로 이때가 되자 천하天下에서는 모두 기뻐하며 서로 경하慶賀하였는데, 합하閤下께서는 재상이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으므로 묵묵히 그 자리에 계셨습니다.
이제 막 곤액困厄을 당하였다가 다시 일어나셨고, 일어나서 다시 재상이 되셨으니, 또한 마침 이러한 때를 만나서 일을 하지 않으시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또한 우리 임금(인종仁宗)의 뜻이 이렇게 두텁게 대우하시니 일을 하지 않으시면 어떻게 저희들의 바람에 맞겠습니까?
그러므로 모두 말하기를 “나중에 명령을 내려 전날과 다른 것이 있다면 반드시 우리 부공富公의 생각일 것이다.”라 하며, 아침저녁으로 기다리고 발꿈치를 들고 목을 빼어 바라고 있습니다.
간절히 바라도 볼 수가 없어서 슬피 의심을 하였습니다.
아아!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은 반드시 멀리 살아서일 것이라 생각하고, 나와서 서울에 미쳤는데도 또한 아무것도 듣지를 못했습니다.
감히 의심을 하지 않고 오히려 말하기를 “천하天下의 사람이 이와 같이 많고 수십 년간 이렇게 변하지 않았는데도, 모두 말하기를 ‘현인賢人이다.’라고 한다.”고 하며, 혹자는 말하기를 “저분이 조정에 계시면 무슨 말씀이 있을 것이나, 천하天下의 사람들은 미처 보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근심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옛 군자君子들은 남을 사랑하면 그를 이루어주지 못함을 근심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찍이 듣건대, 옛 군자君子들은 이러한 임금을 돕고 이러한 사람들과 함께할 때, 모두 조정朝廷에 서게 되면 우리들로 하여금 그 사람됨이 모두 훌륭한 것을 알게 한 뒤에야 근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한 사람의 몸으로 천하의 일을 멋대로 하고자 하면, 비록 당세에 신임信任을 받는다 하더라도 같은 반열班列의 사람이 한마디라도 의심을 하면 일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지금 만약 정치政治가 타인에게서 나와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일이 자기에게서 나오지 않아도 꺼리지 않으면, 이 두 가지는 오직 선인善人만이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오히려 그 마음을 얻고자 합니다.
만약 그러한 사람이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정치가 타인에게서 나오면 남이 자기를 해칠까 두려워하며, 일이 자기들에게서 나오지 않으면 남이 공을 이룰까 봐 꺼리게 되는데, 이 때문에 불평不平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혹 내 앞에 거처하고 혹 내 뒤에 서서 모두 불평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내 몸이 위태롭게 됩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사이에 처함에 있어 그러한 사람들이 나에게 불평하지 않게 합니다.
주공周公명당明堂에 서서 천하의 일을 들음에 소공召公의혹疑惑을 가졌습니다. 어째서이겠습니까?
천하에서 실로 큰 것에 의혹을 가진 것은 소공召公이 여전히 주공周公의 이 마음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공周公이 천하를 안정시킬 때 관숙管叔채숙蔡叔을 죽인 뒤에 소공召公에게 그 뜻을 알려 그 몸을 편안하게 하고 성왕成王에게까지 안정이 미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무릇 그 몸을 편안하게 한 것은 나라를 편안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소공召公주공周公을 대하는 것과 관숙管叔채숙蔡叔주공周公을 대하는 이 두 가지에는 또한 모두 불평하는 마음이 있었으니, 나라의 천하를 주공周公이 장차 드디어 차지하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주공周公은 그 불평하는 자를 죽이되 말로 알려줄 수 없는 자였고, 말로 알려줄 수 있는 자에게는 알려주어 그 불평하는 마음을 화평和平하게 하였습니다.
그런즉 반드시 말로 알려줄 수 있는 자가 아니면 군자는 처음부터 그 마음에 화평하게 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천하天下의 사람 가운데 로부터 경대부卿大夫에 이르기까지 재상宰相이 서로 모아 그 위에 처하는 것이니, 장차 무슨 일을 할 때에 어찌 이루지 못한다고 근심하시겠습니까?
그 구구한 하찮은 忿을 참을 수 없어 그 불평의 틈을 이룬다면 그 큰 일을 해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하찮은 忿을 참아 작은 과실過失을 용납하고 그 불평한 마음을 막은 연후에 큰 일을 담당하여 명을 듣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나의 하찮은 忿은 나의 큰 일과 바꾸기에 충분치 않으므로, 작은 것을 용납할지언정 그 사이에 사소한 일로 막히게 하지는 않습니다.
군자君子현자賢者들과 함께 살고 함께 즐거워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책망함이 상세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불초不肖한 사람들과 함께하였을 때는 큰 것은 도모圖謀하지 못하고 미세한 것만 잘 처리였으니 실정과는 멀기만 하였고 당세에 도움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천하天下에 아무 일이 없은 다음이라야 〈옛 군자들과〉 더불어 이러한 점을 다툴 만하지,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옛날에 여씨呂氏들이 권세를 잡자 진평陳平은 근심하고 두려워하였지만 계책計策이 나올 데가 없었습니다.
육가陸賈가 들어가 뵙고 말하여 주발周勃과 사귀어 환심을 얻게 하였습니다.
진평陳平이 그 책략을 써서 마침내 강후絳侯(주발周勃)가 북군北軍으로 들어가는 도움을 얻어 여씨呂氏들을 멸하였습니다.
대체로 강후絳侯는 순박하고 강직한 사람이니 진평陳平이 아니라면 그를 초치招致할 사람이 누구였겠습니까?
그러므로 현명賢明한 자는 현명하지 못한 자를 초치하나, 현명하지 못한 자는 현명한 사람을 초치할 수 없습니다.
전에 금상今上 폐하께서 즉위卽位하셨을 초기에 구래공寇萊公(구준寇準)이 재상이 되었는데 오직 그의 곁에 소인小人들만 있어 죽일 수도 없었으며, 또한 그들에게서 불만이 사그러지게 할 수도 없었으므로, 끝내 그들에게 물리침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범문정공范文正公(범중엄范仲淹)이 상부相府에 있을 때 또한 세월을 헤아려가며 천하의 일을 모두 다스리고자 하여, 급하게 서두르다 실패하고 작은 분을 참지 못하였으므로, 뭇 소인들이 또한 그를 급히 쫓아내었습니다.
한번 떠나고 나서는 마침내 다시 임용되지 못하고 그 몸은 죽었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합하閤下께서는 불세출不世出의 재주로 천자天子의 아래 백관百官의 위에 서시어, 이에 깊은 계책과 원대한 생각으로 반드시 대처할 바가 있을 것이나, 천하天下의 사람들은 아직도 그러한 처사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서촉西蜀 사람으로 가만히 지금 세상 일에 뜻을 두었사오니 당상堂上으로 한번 찾아뵙기를 원합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합하閤下께서는 깊이 생각해주시어 홀대하지 마소서.


역주
역주1 上富丞相書 : 富丞相은 곧 富弼(1004~1083)로 자는 彦國이고 河南 洛陽 사람이다. 慶曆 연간의 新政에 임용되기는 하였으나, 특별한 의견을 발표하지는 않았다. 그 뒤 至和 2년(1055)에는 宰相에 임명되었는데도 별다른 改革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므로 蘇洵은 嘉祐 원년(1056)에 이 글을 써서 장황하고 완곡하게 비평하였으며 아울러 충고를 하였다.
역주2 往年天子震怒……實在第三 : 慶曆 2년(1043)에 范仲淹이 樞密副使에서 參知政事로 진급하여 재상이 되자, 韓琦와 富弼이 樞密副使가 되어 慶曆新政이 시작되었다.
역주3 周公立於明堂以聽天下 而召公惑 : 明堂은 고대의 帝王이 政敎를 펼치던 곳이다. 《史記》 〈燕召公世家〉에 “周나라 武王이 紂를 멸한 후에 召公을 北燕에 봉하였다. 成王 때 召公은 三公이 되었다. 陝 서쪽 지역은 召公이 다스렸고, 陝 동쪽 지역은 周公이 다스렸다. 成王이 나이가 어린데다가 周公이 攝政을 하자, 召公은 周公이 천자의 지위를 탐하지나 않을까 의심하였다. 周公이 〈君奭〉을 지었다.……이에 소공은 주공이 國事를 관장하는 것에 대하여 기쁘게 생각하였다.”라는 말이 있다.
역주4 周公定天下 誅管蔡 : 앞의 〈上文丞相書〉에 보인다.
역주5 : 저본에 ‘入’자가 없으나, 《嘉祐集》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6 昔者……卒得絳侯入北軍之助以滅諸呂 : 《史記》 〈陸賈列傳〉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呂太后 때 呂氏 일족은 정권을 전횡하고 어린 황제를 협박하여 劉氏의 漢나라를 위태롭게 하였다. 右丞相 陳平은 이 일을 근심하였으나 대항할 힘이 없고 화가 미칠까 두려워 깊은 시름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한번은 陸生이 문안을 드리러 갔는데도 깊은 시름에 잠겨 있어 陸生을 알아보지 못하였다.……이에 陸賈가 陳平을 위하여 呂氏 일족에게 대처할 계책 몇 가지를 일러주었다. 陳平은 陸賈의 계책에 따라 5백 금으로 太尉인 絳侯 周勃의 長壽를 祝願하고 歌舞와 술과 음식을 융숭하게 베풀었다. 太尉 역시 마찬가지로 후하게 답하였다. 이 두 사람이 서로 밀접하게 결속되자 呂氏들의 陰謀는 점차 수그러들었다.”
역주7 寇萊公爲相……故終以斥去 : 寇萊公은 곧 寇準(961~1023)으로, 자는 平仲이며 萊國公에 봉하여졌고 華州 下邽(지금의 陝西 渭南 동북쪽) 사람이다. 景德 원년(1004) 契丹이 남침하였을 때 寇準은 재상이었으며 宋 眞宗에게 굴욕적인 澶淵의 盟을 맺게 하였다. 여기서 小人은 처음에는 구준의 주장에 동조하였다가 나중에는 구준을 모함한 王欽若 등을 가리킨다.
역주8 及范文正公在相府……以歿其身 : 范文正公은 곧 范仲淹(989~1052)으로, 자는 希文이며 蘇州 吳縣(지금의 江蘇) 사람으로 慶曆 연간에 혁신정치를 폈으나 너무 서두르고 또 그 범위도 넓었으므로 기득권자들이 일어나서 실각하게 되었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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