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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洵(1)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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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詞氣嚴重하고 極有法度
益州常稱老蘇似司馬子長하니 此記似子長之後 殆不多得이라
至和元年秋 蜀人 傳言하되 有寇至邊이라하다
軍夜呼하고 野無居人하고 妖言流聞하니 京師震驚이라
方命擇帥할새 天子曰
毋養亂하고 毋助變하라 衆言朋興이나 朕志自定이라
外亂不作이나 變且中起 不可以文令이요 又不可以武競이라
惟朕一二大吏 孰能爲處玆文武之間 其命往撫朕師하노라
乃惟曰 其人이니이다 天子曰 然하다
公以親辭 不可하시니다
遂行하여 冬十一月 至蜀하고 至之日 歸屯軍하고 撤守備하며 使謂郡縣하되 寇來在吾 無爾勞苦하라
明年正月朔旦 蜀人相慶如他日하여 遂以無事
又明年正月 相告留公像于淨衆寺하니 公不能禁이라
眉陽 蘇洵 言於衆曰
未亂易治也 旣亂 易治也
有亂之萌이나 無亂之形 是謂將亂이라하니 將亂 難治
不可以有亂急이요 亦不可以無亂弛니라
是惟元年之秋 如器之欹未墜於地한대 惟爾張公 安坐於其旁하여 顔色不變하고 徐起而正之하고 旣正 油然而退하여 無矜容이라
爲天子牧小民不倦 惟爾張公이라
爾繄以生하니 惟爾父母
且公嘗爲我言하되
人皆曰 蜀人多變이라하니 於是 待之以待盜賊之意하고 而繩之以繩盜賊之法하여 重足屛息之民 而以碪斧令이라
於是 民始忍以其父母妻子之所仰賴之身 而棄之於盜賊이라
每每大亂이라
夫約之以禮하고 驅之以法이면 惟蜀人이라도 爲易 至於急之而生變 雖齊魯라도 亦然이라
吾以齊魯 待蜀人이면 而蜀人亦自以齊魯之人으로 待其身이리니 若夫肆意於法律之外하여 以威劫齊民 吾不忍爲也라하니라
嗚呼 愛蜀人之深 待蜀人之厚 自公而前 吾未始見也 皆再拜稽首曰 然이라
蘇洵 又曰
公之恩 在爾心하니 爾死라도 在爾子孫이요 其功業 在史官하니 無以像爲也 且公意不欲하니 如何
皆曰 公則何事於斯리오 雖然이나 於我心 有不釋焉이라
今夫平居 聞一善이면 必問其人之姓名 與其鄕里之所在하며 以至於其長短大小美惡之狀하고 甚者 或詰其平生所嗜好하여 以想見其爲人이라
而史官亦書之於其傳하니 意使天下之人으로 思之於心이면 則存之於目이니 存之於目이라 其思之於心也固니라
由此觀之컨대 像亦不爲無助라하니라
蘇洵 無以詰하여 遂爲之記하노라
南京人이니 爲人 慷慨有大節하고 以度量 雄天下하니 天下有大事 公可屬이니라
系之以詩曰
天子在祚하니 歲在甲午
西人傳言하되 有寇在垣이라
庭有武臣하고 謀夫如雲이라
天子曰嘻하고 命我張公하시니라
公來自東 旗纛舒舒
西人聚觀하니 于巷于塗
謂公曁曁러니 公來于于
公謂西人하되
安爾室家하고 無敢或訛하라
訛言不祥하니 往卽爾常하라
春爾條桑하고 秋爾滌場하라
西人稽首하고 公我父兄이로다
公在西囿하니 草木騈騈하고
公宴其僚하니 伐鼓淵淵이라
西人來觀하고 祝公萬年이라
有女娟娟 閨闥閑閑이요
有童哇哇 亦旣能言이라
昔公未來 期汝棄捐이러라
禾麻芃芃하고 倉庾崇崇이라
嗟我婦子 樂此歲豊하라
公在朝廷이면 天子股肱이라
天子曰歸라하시니 公敢不承
作堂嚴嚴하고 有廡有庭이라
公像在中하니 朝服冠纓이라
西人相告하되 無敢逸荒하라
公歸京師 公像在堂이라
唐荊川曰 此文二段이니 二項敍事하고 二項議論이라


02. 장익주張益州 화상畫像에 대한 기문
문장에 나타난 기품이 엄중하고 지극히 법도가 있다.
익주益州 사람들은 항상 소순蘇洵사마자장司馬子長(사마천司馬遷)과 같다고 칭송하니 이러한 기문記文자장子長 이후에는 아마도 많지 않을 듯하다.
지화至和 원년 가을, 지방 사람들이 말을 전하기를 “도적의 무리가 변방으로 몰려온다.” 하였다.
그리하여 지키는 병사들이 밤에 고함치니 들에는 거주하는 자가 없게 되었고, 요망한 소문이 떠도니 서울에서는 크게 놀랐다.
바야흐로 장수를 선발할 것을 명하실 때에, 천자께서 말씀하셨다.
“난을 키우지도 말고 변고를 조장하지도 말라. 여러 의견이 분분하지만 짐의 뜻은 결정되었다.
외란外亂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변고가 안에서 일어날 수도 있으니, 문덕文德으로 교화할 수도 없고 또 무력武力으로 억누를 수도 없는 형편이다.
짐의 몇 안 되는 대관大官 중에 누가 이 문무文武 사이의 일을 처리할 수 있겠는가? 그에게 명하여, 가서 짐의 군사들을 위무慰撫하도록 하겠노라.”
이에 “장방평張方平 공이 적당한 인물입니다.” 하니 천자께서 “그렇다.”하셨다.
장공張公이 부모를 이유로 사양하였으나, 천자께서 허락하지 않았다.
장공張公이 마침내 출발하여, 그해 겨울 11월에 에 도착하였고, 도착한 날로 주둔군을 돌려보내고 수비병을 철수시키며, 사자를 보내어 군수郡守현령縣令에게 이르기를 “도적 떼가 온다고 하여도 내가 있으니 그대들은 애쓰지 말라.” 하였다.
다음해 정월 초하루 아침에 지방 사람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서로 새해를 경축하여 끝내 아무 일도 없었다.
또 그 다음 해 정월에, 서로 알려 장공張公화상畫像정중사淨衆寺에 모시기로 하니, 장공張公이 이를 막을 수가 없었다.
미양眉陽소순蘇洵이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은 일어나기 전에도 다스리기 쉽고, 난이 일어난 뒤에도 다스리기 쉽다.
그러나 난의 싹은 있으나 난의 형체가 없는 것을 난이 일어나려 하는 것이라 말하니, 난이 일어나려 하는 것은 다스리기 어렵다.
난이 일어난 것처럼 급하게 다스려서도 안 되고, 난이 없는 것처럼 느슨히 다스려서도 안 된다.
지화至和 원년 가을은 마치 그릇이 기울어지기만 하고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은 것과 같은 형세였는데, 오직 너희들의 장공張公께서는 곁에 편안히 앉아 안색조차 변하지 않고 천천히 일어나서 이를 바로잡았고, 바로잡고 난 뒤에는 유연油然히 물러가 자랑하는 모양이 없었다.
천자를 위하여 백성을 돌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이가 바로 너희들의 장공張公이시다.
너희들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잘살게 되었으니 너희들의 부모와 같은 분이시다.
또한 장공張公께서 일찍이 나에게 말씀하기를 ‘백성들은 일정한 성품이 없어 오직 윗사람이 대하는 대로 따른다.
사람들이 모두 「 지방 사람들은 변고가 많다.」고 하니, 이에 윗사람이 도적을 대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고 도적을 단속하는 법으로 그들을 단속하여, 발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백성들을 도끼 받침과 도끼로써 명령하여 다스렸다.
이에 백성들이 비로소 어찌할 수 없어 그의 부모‧처자들이 우러르며 의지하는 몸을 도적들에게 버리는 것이다.
이 때문에 번번이 어지러웠던 것이다.
로써 단속하고 으로써 그들을 몰면, 지방 사람들이라도 다스리기가 쉬울 것이고, 급하게 다그쳐 변고가 생기게 되는 것은 비록 나라‧나라 사람들이라도 그러할 것이다.
내가 나라‧나라 사람들을 대하듯이 지방 사람들을 대하면, 지방 사람들도 저절로 나라‧나라 사람들처럼 그 자신을 대하게 될 것이니, 법률 밖의 방법을 멋대로 써서 위겁威劫으로써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과 같은 일은 나는 차마 할 수 없다.’고 하셨다.
아아! 지방 사람들을 사랑함이 깊은 것과, 지방 사람들을 대함이 후한 것을 장공張公 이전에는 내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그렇습니다.”라고 하였다.
소순蘇洵이 또 말하였다.
장공張公의 은혜는 너희들 마음속에 있으니, 너희들이 죽는다 하더라도 자손들에게 전해질 것이고, 그 공로와 업적은 사관史官들에 의하여 기록될 것이니, 화상畫像을 만들 필요가 없다. 또한 장공張公의 뜻도 그것을 바라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이에 모두가 말하였다.
장공張公께서야 어찌 이 일에 관심을 두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들 마음에 풀리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평소에 한 가지 선행善行을 들으면 반드시 그 사람의 성명姓名과 그의 사는 마을이 있는 곳이며, 그의 키가 크고 작고, 몸집이 크고 작고, 잘 생기고 못 생긴 모습에 이르기까지 묻고, 심한 자는 혹 그가 평소에 좋아하던 것에 대하여도 캐물어서 그의 사람됨을 생각해보려 합니다.
그리고 사관史官들도 그러한 것들을 그의 전기傳記에 기록하니, 이는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에 그를 생각하면 눈에 선하게 떠오르게 하려는 것이니, 눈에 선하게 떠오르기 때문에 마음에 그를 생각함이 확실해지는 것입니다.
이로써 보건대 화상畫像도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소순蘇洵은 더 따져 물을 수가 없어서, 마침내 이렇게 화상기畫像記를 짓게 되었다.
장공張公남경南京 사람이니, 사람됨이 강개慷慨하여 큰 절조節操가 있고 도량이 천하에 뛰어나니, 천하에 큰 일이 생김에 장공張公에게 맡길 만하다.
다음과 같은 를 붙인다.
천자께서 즉위하시니, 갑오년甲午年이었다.
서쪽 사람들이 말 전하기를, “도적들이 담장 가까이에 와 있다.” 하였네.
조정에는 무신武臣도 있고, 모사謀士도 구름같이 많았네.
천자께선 “그렇지!” 하시고, 우리 장공張公에게 하명하셨네.
장공張公이 동쪽에서 오시는데, 깃발과 새 깃 장식 너풀거렸네.
서쪽 사람들 모여 구경하니, 골목이고 길거리고 가득 찼었네.
장공張公은 엄하고 무서울 줄 알았는데, 장공張公 오시는 것 보니 여유 있고 부드러우셨네.
장공張公께서 서쪽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그대들 집안 안정시키고, 감히 혹시라도 유언비어流言蜚語 퍼트리지 말라!
유언비어는 상서롭지 않은 것이니, 가서 그대들 일상적인 일을 하라.
봄에는 뽕나무의 뽕잎 따고, 가을에는 타작마당 손질하라!” 하셨네.
서쪽 사람들은 머리 조아리며, “장공張公은 우리의 부형父兄이다.” 하였네.
장공張公이 서쪽 정원에 계시니, 초목이 무성해졌고,
장공張公이 막료들과 잔치 벌이니, 북치는 소리 둥둥 울렸네.
서쪽 사람들 와서 구경하고, 장공張公이 오래오래 사시기를 빌었네.
어여쁘던 우리 딸, 규방閨房 안에서 한가롭고,
옹알거리던 우리 아들, 또한 이미 말할 줄 아네.
옛날 장공張公이 오시기 전에는, 너희들을 내다 버릴 뻔했었지!
밭에는 벼와 삼대 무성하고, 창고엔 물건 높이 쌓였네.
아아! 우리 처자식들이여. 올해는 풍년을 즐길지어다.
장공張公이 조정에 계시면, 천자께서 팔다리처럼 믿고 소중히 여긴다네.
천자께서 “돌아오라!” 하시니, 장공張公이 감히 명 받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당祠堂은 장엄하고, 행랑채도 있고 정원도 있네.
장공張公화상畫像 그 안에 있으니, 조복朝服을 쓰고 계시네.
서쪽 사람들 서로 이르기를, “감히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
장공張公경사京師로 돌아가시지만, 장공張公의 화상 이 사당에 계시다!” 하였네.
당형천唐荊川(당순지唐順之)이 말하기를 “이 글은 두 단락이니, 두 조목은 장공張公사적事蹟을 서술했고, 두 조목은 장공張公에 대해 의논했다.”라 하였다.


역주
역주1 張益州畫像記 : 이 글은 張方平이 至和 元年(1054) 11月 蘇洵의 고향인 蜀 지방에 知州로 부임하여 당시 도적들로 말미암아 흉흉하던 民心을 안정시킨 공적을 기린 글이다. 張方平은 특히 武力보다는 法과 禮로써 民生을 안정시켜 더욱 큰 칭송을 받았다. 嘉祐 원년(1056) 正月 張方平이 조정으로 돌아가게 되자, 蜀 지방 사람들이 그의 畫像을 사당에 모셔 그의 큰 공적을 기리고자 하였다. 그때 蘇洵이 쓴 글이다.
역주2 張公方平 : 張方平(1007~1091)은 자가 安道, 호가 樂全居士이다. 益州(지금의 四川省)知州를 지냈기 때문에 ‘張益州’라 한 것이다.
역주3 民無常性 惟上所待 : 《書經》 〈周書 蔡仲之命〉에 “民心은 일정하지 않으니 은혜를 베푸는 자를 사모할 뿐이다.[民心無常 惟惠之懷]”라는 기록이 보인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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