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而以
爲明
하고 以易爲幽
며 謂聖人所以用其機權以持天下之心
이니 過矣
라
生民之初에 無貴賤하고 無尊卑하고 無長幼하며 不耕而不饑하고 不蠶而不寒하니 故로 其民逸이라
而其所以能奪其樂而易之以其所苦하고 而天下之民亦遂肯棄逸而卽勞하여 欣然戴之以爲君師하여 而遵蹈其法制者하니 禮則使然也라
有貴賤과 有尊卑와 有長幼면 則人不相殺하며 食吾之所耕하고 而衣吾之所蠶이면 則鳥獸與人不相食이라하니라
人之好生也는 甚於逸하고 而惡死也는 甚於勞한대 聖人奪其逸死하고 而與之勞生이라
故로 其道之所以信於天下而不可廢者는 禮爲之明也라
觀天地之象以爲爻하고 通陰陽之變以爲卦하며 考鬼神之情以爲辭라
探之茫茫하고 索之冥冥하며 童而習之이어늘 白首而不得其源이라
故로 天下視聖人을 如神之幽하고 如天之高하며 尊其人하니 而其敎亦隨而尊이니라
故로 其道之所以尊於天下而不敢廢者는 易爲之幽也라
凡人之所以見信者는 以其中에 無所不可測者也요 人之所以獲尊者는 以其中에 有所不可窺者也라
是以로 禮無所不可測이며 而易有所不可窺니 故天下之人이 信聖人之道而尊之라
不然
이면 則易者
는 豈聖人
이 務爲新奇秘怪以夸後世耶
인저 라
龜는 漫而無理者也니 灼荊而鑽之하여 方功義弓이니 惟其所爲에 而人何預焉이리오
夫筮之所以或爲陽 或爲陰者는 必自分而爲二로 始니
於是因而作易하여 以神天下之耳目이니 而其道는 遂尊而不廢라
此는 聖人用其機權以持天下之心하여 而濟其道於無窮也라
注
그리고 예禮를 밝다고 생각하고 《역易》을 은밀하다고 생각하였으며, 성인聖人이 그 기지機智와 권변權變을 써서 천하天下 사람들의 마음을 붙드는 것이라 하였는데 지나치다.
성인聖人의 도道는 예禮를 얻으면서 믿게 되었고, 《역易》을 얻으면서 높아졌다.
믿는지라 폐할 수 없게 되었고, 높은지라 감히 폐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의 도道가 폐하여지지 않는 까닭은 예禮가 그것을 밝게 나타나게 하였고, 《역易》이 그것을 은밀하게 감추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사람이 생겨난 처음에는 귀천貴賤도 없었고 존비尊卑도 없었고 장유長幼도 없었으며, 밭을 갈지 않아도 주리지 않았고 누에를 치지 않아도 춥지 않았기 때문에 그 백성들은 편안하였다.
백성들이 수고하는 것을 괴로이 여기고 편안함을 즐기는 것은 물이 아래쪽으로 흘러가는 것과 같다.
그런데 성인聖人이 홀로 그 군신君臣이 되어 천하天下로 하여금 귀貴한 이가 천한 자를 부리게 하고, 부자父子가 되어 천하로 하여금 높은 이가 낮은 이를 부리게 하며, 형제兄弟가 되어 천하로 하여금 연장자年長者가 연소자年少者를 부리게 하였다.
누에를 치고 난 다음에 입고 밭을 갈고 난 다음에 먹게 하니 온 천하가 수고롭게 되었다.
한 성인聖人의 힘은 실로 천하 백성의 무리를 이기기에는 부족하다.
그런데도 그 즐거움을 빼앗아 그 괴로움으로 바꿀 수 있었고, 천하의 백성들 또한 마침내 기꺼이 편안함을 버리고 수고로움으로 나아가 흔연히 추대하여 임금과 스승으로 삼고 그 법제法制를 준수하여 따르니, 이는 예禮가 그렇게 한 것이다.
성인聖人이 처음 예禮를 만들 때 말하기를 “천하天下에 귀천貴賤이 없고 존비尊卑가 없으며 장유長幼가 없으니 이 때문에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 일이 그치지 않았고, 밭을 갈지 않고 조수鳥獸의 고기를 먹으며 누에를 치지 않고 조수鳥獸의 가죽을 입으니 이 때문에 조수鳥獸와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일이 그치지 않았다.
귀천貴賤이 있고 존비尊卑가 있으며 장유長幼가 있으면 사람들은 서로 죽이지 않으며, 내가 간 것을 먹고 내가 누에 친 것을 입으면 조수鳥獸와 사람이 서로 잡아먹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사람이 사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편안함보다 심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수고하는 것보다 심한데, 성인聖人이 그 편안함과 죽음을 빼앗고 수고로움과 삶을 주었다.
이는 비록 삼척동자三尺童子라도 이익利益이 되니 쫓고, 손해損害가 되니 회피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그 도道가 천하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아서 폐할 수 없게 된 것은 예禮가 그것을 밝게 했기 때문이다.
비록 그러하나 밝으면 쉽게 이르고 쉽게 이르면 친압親狎해지며 친압해지면 쉽게 폐하여지니, 성인聖人은 그 도道가 폐하여져서 천하가 다시 어지럽게 될까 두려워하였고, 그런 다음에 《역易》을 만들었다.
천지天地의 상象을 살펴서 효爻를 만들고, 음양陰陽의 변화變化에 통달하여 괘卦를 만들었으며, 귀신鬼神의 정情을 상고하여 사辭를 만들었다.
아득히 더듬고 정성껏 찾았으며, 어려서 그것을 익혔는데 흰머리가 되도록 그 기원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천하天下에서 성인聖人을 보기를 귀신鬼神이 그윽한 것처럼 하고 하늘이 높은 것처럼 하며, 그 사람을 높이니 그 가르침 또한 따라서 높아졌다.
그러므로 그 도가 천하 사람에게 존숭尊崇을 받아서 감히 폐할 수 없게 된 것은 《역易》이 그윽하게 했기 때문이다.
무릇 사람이 남에게 신뢰받는 것은 그 속에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없기 때문이며, 사람들에게 높임을 얻는 것은 그 속에 엿볼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예禮에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없으며, 《역易》에는 엿볼 수 없는 것이 있으므로 천하天下의 사람들이 성인聖人의 도道를 믿고 높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역易》은 성인聖人이 힘써 신기新奇하고 괴이怪異한 것을 만들어 후세에 자랑하기 위한 것이리라. 성인聖人은 천하天下의 지극히 신령神靈스런 것에 연유하지 않는다면 그 가르침을 베풀 길이 없다.
복서卜筮라는 것은 천하天下에서 지극히 신령한 것이다.
그래서 복卜이라는 것은 하늘에서 들려주는 것으로 사람이 관여하는 것은 아니다.
서筮라는 것은 하늘이 결정하지만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귀갑龜甲의 표면은 질펀하면서도 무늬가 없는 것이니 가시나무를 태우고 구멍을 뚫어 방조方兆, 공조功兆, 의조義兆, 궁조弓兆가 나타나니, 오직 그것이 그렇게 되는 일에 사람이 어찌 관여하겠는가?
성인聖人이 말하기를 “이는 순수하게 하늘의 기술일 따름이다.”라고 하셨다.
그런데 기술이 어떻게 우리에게 가르침을 베푸는가? 이에 서筮를 취하였다.
대저 서筮가 혹은 양陽이 되고 혹은 음陰이 되는 것은 반드시 자연스럽게 나누어져서 둘이 되는 데서 시작된다.
하나를 걸 때 나는 그것이 하나라는 것을 알면서 걸고, 넷으로 셀 때 나는 그것이 넷이라는 것을 알면서 세고, 남은 수를 륵扐에 돌릴 때 나는 그것이 하나이고, 둘이고, 셋이고, 넷이라는 것을 알면서 돌리니, 〈이것은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다.
나누어 둘이 될 때 나는 그것이 얼마인지 모르면서 나누니, 〈이것은 모두〉 하늘의 뜻이다.
성인聖人이 말하기를 “여기에 하늘과 사람이 참여하니 도道이며, 도道에는 우리에게 가르침을 베푸는 바가 있다.”고 하였다.
이에 이를 계기로 《역易》을 지어 천하天下의 이목耳目을 신령스럽게 하였으니, 그 도가 마침내 높아져 폐하여지지 않는다.
이는 성인聖人이 그 기지機智와 권변權變을 써서 천하天下 사람들의 마음을 붙들어 무궁無窮함에서 그 도道를 이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