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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洵(1)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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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5.
此篇識見好하고 而行文法度亦勝이라
聖人 因風俗之變而用其權하고 聖人之權 用於當世하여 而風俗之變益甚하여 以至於不可復反이라
幸而又有聖人焉하여 承其後而維之하니 則天下可以復治니라
不幸其後無聖人하여 其變窮而無所復入이니 則已矣러라
昔者 吾嘗欲觀古之變이나 而不可得也 이나 而不詳이러라
至於周하여 而天下之變窮矣
忠之變而入於質하고 質之變而入於文하니 其勢便也러라
及夫文之變하여는 而又欲反之於忠也어늘 是猶欲移江河而行之山也
人之喜文하고 而惡質與忠也 猶水之不肯避下而就高也
彼其始未嘗文焉이니 忠質而不辭
今吾日食之以太牢하고 而欲使之復茹其菽哉
嗚呼 其後無聖人하여 其變窮而無所復入이니 則已矣
周之後而無王焉 固也 其始之制其風俗也 固不容爲其後者計也 而又適不値乎聖人이라
固也 後之無王者也
當堯之時에는 擧天下而授之舜하고 舜得堯之天下하여는 而又授之禹
方堯之未授天下於舜也 天下未嘗聞有如此之事也 度其當時之民 莫不以爲大怪也
然而舜與禹也 受而居之하여 安然若天下固其所有하고 而其祖宗旣已爲之 累數十世者하며 未嘗與其民으로 道其所以當得天下之故也 又未嘗悅之以利 而開之以
其意以爲天下之民 以我爲當在此位也 則亦不俟乎援天以神之 譽己以固之也
如曰 我如是而爲爾之君이니 爾可以許我焉耳니라
亦旣薄矣로다
又甚矣로다
如曰 吾家之當爲天子久矣 如此乎民之欲我速入商也니라
伊尹攝位三年 而無一言以自解 周公爲之紛紛乎急於自疏 其非簒也
夫固由風俗之變而後 用其權하고 權用而風俗成이면 吾安坐而鎭之리니 夫孰知風俗之變而不復反也리오


05. 《》에 대한 논문
이 글의 식견識見은 좋고 문장文章의 구사 또한 뛰어나다.
풍속風俗변화變化성인聖人이 그렇게 하였다.
성인聖人풍속風俗의 변화에 따라 그 권도權道를 썼으며, 성인聖人의 권도가 당세에 쓰여져서 풍속風俗의 변화가 더욱 심하여져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 또 성인聖人이 있어 그 뒤를 계승하였으니 천하天下는 다시 다스릴 수 있었다.
불행不幸히 그 뒤로 성인聖人이 없어 그 변화가 다하여 다시 더 넣을 것이 없었으니 그치게 되었다!
지난 날 내 일찍이 옛날의 변화를 보고 싶었으나 볼 수 없었으며, 《시경詩經》에서 나라와 나라를 보았으나 상세하지 않았다.
지금 《상서尙書》를 보고 난 다음에 요순시대堯舜時代삼대三代가 변한 것을 보게 되었는데 이렇게나 빨랐단 말인가!
임금에서 나라에 이르기까지 그 변화는 모두 성인聖人을 얻어 이었으므로 근심이 없었다.
나라에 이르러 천하天下의 변화가 다하였다.
충직忠直함이 변하여 질박質朴함으로 흘러들어갔고, 질박함이 변하여 문채文彩로 흘러들어갔는데 그 형세가 편했기 때문이다.
저 문채가 변함에 미쳐서는 또한 충직함으로 되돌리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강하江河를 옮겨 산으로 가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문채를 좋아하고 질박함과 충직함을 싫어하는 것은 물이 기꺼이 아래를 피하지 않고 높아지려고 하는 것과 같다.
저 처음에는 일찍이 문채가 없었으므로 충직하고 질박하였는데도 사양치 않았다.
지금 내가 날마다 태뢰太牢를 먹이고는 그로 하여금 다시 콩깍지를 먹이려고 하는 것인가?
아아! 그 뒤로 성인聖人이 없어서 그 변화가 끝이 나 더 넣을 것이 없으니 그치게 되었다.
나라 후에 다운 왕이 없었음은 당연하도다! 그 처음의 풍속을 통제함에 실로 나중 사람을 위한 계책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또한 마침 성인聖人을 만나지 못하였다.
실로 당연하도다, 나중에 왕자王者가 없었음이여!
임금 때는 온 천하天下에게 주었고 천하天下를 얻어 또 에게 주었다.
바야흐로 임금이 아직 천하를 에게 주지 않았을 때 천하天下에서는 일찍이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으며, 그 당시의 백성들을 헤아려보건대 매우 괴이하게 생각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는 그것을 받아서 차지하고는 편안하기가 천하를 원래 소유하고 있었고 그 조상들이 이미 다스린 지 수십 세는 되는 것 같이 하며, 일찍이 그 백성들에게 마땅히 천하를 얻어야 하는 까닭을 설명한 적이 없었고, 또한 일찍이 이로움으로 기쁘게 해준 적도 없었으며, 단주丹朱상균商均의 불초함을 설명한 일도 없었다.
그 뜻이 천하의 백성이 내가 마땅히 이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또한 하늘을 끌어다 신격화神格化하거나 원래 그랬다고 자신을 기리는 것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을 칠 때는 떠들썩하게 그 죄를 짚어가며 사람들에게 알려 “저 사람에게 죄가 있어 내가 그를 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였다.
조금 있다가 또 천하의 백성이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여 또 떠들썩하게 말로 그들을 회유하기를 “만방萬方에 죄가 있으면 나 한 사람에게 책임이 있고, 나 한 사람에게 죄가 있으면 그대들 만방의 사람들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오.”라 하였는데,
마치 “내가 이렇게 그대들의 임금이 되었으니 그대들은 나를 인정해야 할 따름이다.”라 하는 것 같았다.
아! 또한 이미 얼마나 박해졌는가!
무왕武王에 이르러 또한 스스로 말하기를 “그 선조부先祖父가 모두 현저한 공을 세웠으며, 이미 〈그 아버지가〉 천명天命을 받고 죽었는데 그 대업大業을 끝내지 못해서 지금 내가 그 뜻을 받들어 군사를 일으켜 동쪽을 치니 동쪽 나라의 남녀가 비단을 묶어 우리를 맞이하고 의 병사가 창을 거꾸로 하여 우리를 받아들였다.”고 하였다.
아! 또한 심하도다.
마치 “우리 집안이 마땅히 천자天子가 된 것이 오래되었으니 이렇게 백성들이 내가 속히 나라로 들어갔으면 하는구나.”라 하는 것 같았다.
이윤伊尹나라에 있었던 것은 주공周公나라에 있었던 것과 같다.
이윤伊尹은 3년간 섭정攝政을 하면서도 한마디도 스스로 해명하는 말을 하지 않았으나, 주공周公은 그렇게 하면서 분분紛紛히 그것이 찬탈簒奪이 아님을 스스로 알리는 데 급급하였다.
실로 풍속風俗의 변화에 말미암은 후에 그 권도權道를 쓰고, 권도를 써서 풍속이 이루어지면 내 편안히 앉아서 그것을 누를 것이니, 대개 누가 풍속이 변하는데도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알겠는가?


역주
역주1 書論 : 書는 곧 《尙書》로 곧 上古時代의 “人君이 신하들에게 내린 글”(孔穎達의 〈尙書正義序〉)이다. 본문은 《尙書》에 실려 있는 史實을 취하여 議論을 내었는데, 堯‧舜‧禹 때의 風俗이 순박함을 盛贊하고, 湯‧武의 풍속이 이미 점차 경박해져 가지만 형세가 바뀌어 되돌릴 수 없음을 개탄하였다.
역주2 風俗之變 聖人爲之也 : 《漢書》 〈地理志 下〉에서는 “무릇 백성은 五常의 性에 잠겨 그 剛柔와 緩急, 音聲이 같지 않고 水土의 風氣에 매여 있으므로 그것을 일러 風이라고 한다. 好惡와 取舍는 動靜이 무상하여 君上의 情欲을 따르므로 俗이라 이른다. 孔子가 말하기를 ‘易風易俗은 음악[樂]만 한 것이 없다.’라 하였다. 이는 聖王이 위에서 人倫을 다스림에 반드시 그 本을 옮기고 末을 바꾸어 이로써 천하를 섞어 함께하여 中和로 일치시키고 난 다음이라야 王敎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한다.”라 하였다.
역주3 於詩 見商與周焉 : 古人들은 《詩經》 300편이 殷나라 말 周 文王에게서 비롯되어 魯 僖公에게서 끝났다고 믿었다. 〈毛詩正義序〉에서는 “先君 宣父(孔子)가 遺文을 정리하여 그 精華를 취하고 번중함을 없애어 위로는 周나라에서 시작하여 아래로는 魯 僖公에게서 끝이 나니 400년 사이에 여섯 詩가 갖추어졌다.”라 하였다.
역주4 及今觀書……如此之亟也 : 書는 《尙書》를 가리키며, 孔穎達의 〈尙書正義序〉에서 “위로는 唐虞에서 끊고 아래로는 秦魯에서 끝이 난다.”라 하였다. 亟은 《說文》에서 “민첩하고 빠른 것이다.”라 하였다. 이는 《尙書》에서 堯舜으로부터 三代까지의 풍속의 급격한 변화를 알 수 있다는 것으로, 곧 아래에서 논한 忠直하고 質朴함에서 文彩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역주5 自堯而至於商……而天下之變窮矣 : 堯에서 商까지는 풍속의 변화가 충직한 데서 질박하게 되었으며, 周나라에 이르러서는 다시 변화하여 문채가 있게 되었으니, 이미 궁함이 다하여 더 이상 충직하고 질박함을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역주6 丹朱商均之不肖 : 《史記》 〈五帝本紀〉에서는 “堯는 아들 丹朱가 不肖해서 천하를 이어받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에 權力을 舜에게 넘겨주기로 하였다. 舜에게 帝位를 넘겨주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이익을 얻고 丹朱만 손해를 보지만, 丹朱에게 제위를 넘겨주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손해를 보고 丹朱만 이익을 얻는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따라서 堯는 ‘결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손해를 보게 하고 한 사람만 이익을 얻게 할 수는 없다.’고 하며 결국 천하를 舜에게 넘겨주었다.”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舜의 아들 商均 또한 不肖하여 舜은 미리 하늘에 禹를 천거하고 그 후 17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삼년상을 마치자 禹 또한 舜이 堯의 아들에게 양보했던 것처럼 舜의 아들에게 제위를 양보했다. 제후들이 모두 禹에게 복종한 뒤에야 禹는 비로소 天子의 자리에 올랐다.”라 하였다.
역주7 湯之伐桀也……我伐之宜也 : 《尙書》 〈湯誓〉에 “夏나라 임금은 죄가 있소. 나는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있으니 감히 바로잡지 않을 수가 없소. 지금 여러분은 ‘夏나라의 죄는 어떤 것이오?’라고 말할 것이오. 夏나라 임금은 백성들의 힘을 다 빠지게 하고, 夏나라 고을들을 해치기만 하였소. 백성들은 모두 게으름 피고 협력하지 않으면서 ‘이 해는 언제나 없어질 것인가? 우리는 너와 함께 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하게 되었소.”라는 말이 있다.
역주8 旣又懼天下之民……無以爾萬方 : 《尙書》 〈湯誥〉에 “나는 하늘과 땅에 죄를 짓고 있는지 몰라 두려워 떨기를 깊은 못에 떨어지는 듯이 하고 있소.……그대들 온 세상에 죄가 있다면 나 한 사람이 책임질 것이나, 나 한 사람에게 죄가 있다면 온 세상 사람들과는 상관도 없는 것이오.”라는 말이 있다.
역주9 至於武王……倒戈以納我 : 《尙書》 〈武成〉에 “옛 임금(周王의 선조 后稷을 가리킴)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땅을 여시었고, 公劉께서는 앞의 많은 공을 두터이 하실 수 있으셨으며, 太王에 이르러 비로소 임금의 공적의 터전을 마련하셨고, 왕께서도 임금 집안일을 부지런히 하셨으며, 나의 文德 많은 아버지 文王은 그분들의 공훈을 이루실 수 있으셨고, 크게 하늘의 명을 받아 온 中和 땅을 어루만지시니, 큰 나라는 그 힘을 두려워하였고 작은 나라는 그 덕을 그리게 되었었소. 이처럼 9년 동안 하셨으나 큰일을 이루지 못하시어 이 小人(武王의 自稱)이 그분의 뜻을 계승한 것이오.……牧 땅의 들에서 만나 싸웠다. 그러나 그쪽 군사들은 전혀 대적하지 않았으니 앞에 있던 무리들이 창을 거꾸로 돌려 戰意가 없음을 보이자, 뒤를 공격하여 패배시켰는데 피가 흘러 절굿공이가 떠다니었다.”라는 말이 있다.
역주10 伊尹之在商也……其非簒也 : 伊尹의 일은 《尙書》 〈太甲 上〉에 보이는데 “太甲(湯의 嫡長孫)이 이미 즉위하였으나 명민치 못하여 伊尹은 그를 桐으로 추방하였다. 3년 만에 다시 亳으로 복귀하였다.”라 하였다. 周公의 일은 《尙書》 〈金縢〉에 보이는데 “武王이 돌아가신 뒤에 管叔과 그의 여러 아우들이 나라에 뜬소문을 퍼뜨리기를 ‘周公은 장차 어린 조카에게 이롭지 않은 짓을 할 것이다.’라 하였는데, 周公은 이에 두 公(太公과 召公)에게 아뢰기를 ‘내가 피하지 않는다면 나는 우리 옛 임금님들께 아뢸 말이 없게 될 것입니다.’라 하였다.”라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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