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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洵(1)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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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老泉厭當時兵政之過弱 勸韓魏公以誅戮이라
而其行文似西漢하며 疎宕雄辨可觀이라
太尉執事 洵著書無他長이나 及言兵事 論古今形勢 至自比賈誼이니이다
所獻權書 雖古人已往成敗之迹이나 苟深曉其義 施之於今이라도 無所不可이니이다
昨因請見하여 求進末議러니 太尉許諾하사 謹撰其說하노이다
言語朴直하여 非有驚世絶俗之談 甚高難行之論이니이다
太尉取其大綱하고 而無責其纖悉하소서
蓋古者非用兵決勝之爲難하고 而養兵不用之可畏
今夫水激之山하고 放之海하며 決之爲溝塍하고 壅之爲沼沚 是天下之人能之니이다
夫惟天下之未安하고 盜賊之未殄 然後라야 有以施其不義之心하고 用其不仁之器而試其殺人之事니이다
當是之時 勇者無餘力하고 智者無餘謀하며 巧者無餘技하니 其不義之心變而爲忠하고 不仁之器加之於不仁하여 而殺人之事施之於當殺이니이다
及夫天下旣平하고 盜賊旣殄이로되 不義之徒聚而不散이면 勇者有餘力則思以爲亂하고 智者有餘謀則思以爲奸하며 巧者有餘技則思以爲詐하니
於是 天下之患雜然出矣
蓋虎豹終日而不殺하면 則跳踉大叫以發其怒하고 蝮蝎終日而不螫하면 則噬囓草木以致其毒이니이다
其理固然하여 無足怪者니이다
轉鬪五六年 天下厭兵하고 項籍死하며 而高祖亦已老矣
方是時 分王諸將하고 改定律令하여 與天下休息이라
是何起之易 而收之難也리오
劉項之勢 初若決河하여 順流而下하여 誠有可喜
及其崩潰四出하여 放乎數百里之間하니 拱手而莫能救也
嗚呼 不有聖人이면 何以善其後리오
太祖太宗躬擐甲冑하고 跋涉險阻하여 以斬刈四方之蓬蒿러시니
用兵數十年 謀臣猛將滿天下
一旦卷甲而休之하여而天下無變하니 此何術也
荊楚九江之地 不分於諸將하여 而韓信黥布之徒無以啓其心也
雖然이나 天下無變하여 而兵久不用이면 則其不義之心蓄而無所發하여 飽食優游하고 求逞於良民이니이다
觀其平居無事하고 出怨言以邀其上하여 一日有急이면 是非人得千金이면 不可使也
往年 詔天下繕完城池한대 西川之事 洵實親見이니이다
凡郡縣之富民 擧而籍其名하고 得錢數百萬하여 以爲酒食饋餉之費
杵聲未絶 城輒隨壞 如此者數年而後定이라
卒事 官吏相賀하고 卒徒相矜하여 若戰勝凱旋而待賞者
比來京師하여 遊阡陌間한대 其曹往往偶語 無所諱忌
聞之土人하니 方春時 尤不忍聞이러이다
蓋時五六月矣 會京師憂大水하여 鋤耰畚築列於兩河之壖하여 縣官日費千萬하며 傳呼勞問之聲 不絶者數十里로되 猶且睊睊狼顧하며 莫肯效用이라하노이다
且夫內之如京師之所聞하고 外之如西川之所親見하니 天下之勢 今何如也
天子者 養尊而處優하여 樹恩而收名하며 與天下爲喜樂者也
其道不可以御兵이니이다
人臣 執法而不求情하며 盡心而不求名하고 出死力以捍社稷하여 使天下之心繫於一人이나 而己不與焉이라
御兵者 人臣之事 不可以累天子也니라
今之所患 大臣好名而懼謗이니
好名則多樹私恩하고 懼謗則執法不堅이니이다
是以 天下之兵 豪縱至此 而莫之或制也
頃者 號爲寬厚愛人하며 狎昵士卒하여 得其歡心이러니
이니이다
彼狄公者 知御外之術이나 而不知治內之道하니 此邊將材也
古者 兵在外 愛將軍而忘天子 在內 愛天子而忘將軍이니이다
愛將軍 所以戰이며 愛天子 所以守
狄公 以其御外之心으로 而施諸其內로되 太尉不反其道하니 而何以爲治리오
或者以爲兵久驕不治라가 一旦繩以法이면 恐因以生亂이라하니이다
將至之日 張用濟斬於轅門하니 三軍股慄이라
夫以臨淮之悍으로 而代汾陽之長者하니 三軍之士 竦然如赤子之脫慈母之懷하여 而立乎嚴師之側하니 何亂之敢生이리오
且夫天子者 天下之父母也 將相者 天下之師也니라
師雖嚴이나 赤子不敢以怨其父母하며 將相雖厲 天下不敢以咎其君하니 其勢然也
天子者 可以生人하고 可以殺人이니 天下望其生하며 及其殺之也 天下曰 是天子殺之라하니 天子不可以多殺이라
人臣奉天子之法이면 雖多殺이나 天下無所歸怨이니이다
此先王所以威懷天下之術也
伏惟太尉思天下所以長久之道하고 而無幸一時之名하며 盡至公之心하고 而無恤三軍之多言하소서
夫天子 推深仁以結其心하시고 太尉 厲威武以振其惰하소서
彼其思天子之深仁이면 則畏而不至於怨하고 思太尉之威武 則愛而不至於驕하리이다
君臣之體順하고 而畏愛之道立 非太尉 吾誰望耶리오
荊川曰 前一段 論兵驕之弊하고 後一段 處驕兵之策으로 當是有用文字


03. 한추밀韓樞密에게 올린 글
노천老泉당시當時병정兵政이 지나치게 약한 것을 싫어하였으므로 한위공韓魏公에게 주륙誅戮할 것을 권하였다.
문장文章의 구사가 서한西漢과 흡사하며 탁 트인 웅변雄辯이 볼 만하다.
태위太尉 집사執事께. 저는 글을 짓는 데 다른 장점은 없으나 병사兵事를 말하고 고금古今형세形勢를 논하는 데 있어서 스스로 가의賈誼에 비할 정도입니다.
바친 〈권서權書〉는 비록 옛사람의 이미 지나간 성패成敗의 자취이기는 하나 실로 그 뜻을 깊이 깨닫는다면 지금 그것을 시행하여도 안 될 것은 없습니다.
어제 뵙기를 청하여 하찮은 의론議論을 바치기를 구하였는데 태위太尉께서 허락許諾하셨으므로 삼가 그 을 짓게 되었습니다.
언어言語박직朴直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고 세속世俗보다 뛰어난 말이 있거나, 아주 높아서 행하기 어려운 의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태위太尉께서는 그 대강大綱만 취하시고 아주 미세한 것은 책하지 말아주소서.
대체로 옛날에는 군사軍士를 써서 이기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고, 군사를 양성養成하여 쓰지 않는 것을 두렵게 여겼습니다.
지금 대체로 물을 산에 부딪치게 하고 바다로 풀어놓으며, 터서 도랑을 만들고 막아서 못을 만드는 것은 천하天下의 사람들이 할 수 있습니다.
장강長江황하黃河를 흐르게 하고 회수淮水사수泗水에 물을 대며, 모아서 큰 물결을 만들고 고이게 하여 큰 호수를 만들어 만세토록 넘치지 않게 하는 것은 임금 이후로는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
대체로 병사兵事라는 것은 천하의 의롭지 못한 무리들을 모아 그들에게 어질지 못한 무기武器를 주고 그들에게 사람 죽이는 일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오로지 천하가 안정되지 않고 도적이 섬멸되지 않은 다음이라야, 그 의롭지 못한 마음을 베풀고 그 어질지 못한 무기를 써서 사람 죽이는 일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이때가 되면 용감勇敢한 자는 남은 힘이 없고, 지혜智慧로운 자는 남은 계책計策이 없으며, 꾀가 많은 자도 남은 재주가 없으므로, 의롭지 못한 마음이 변하여 충성忠誠이 되고, 어질지 못한 무기에 어질지 못함을 더하여, 사람을 죽이는 일을 죽여야 할 자에게 베풀게 되는 것입니다.
저 천하가 이미 평정되고 도적盜賊이 이미 섬멸되었는데도 의롭지 못한 무리가 모여서 흩어지지 않으면, 용감한 자는 남은 힘이 있어서 난을 일으킬 생각을 하고, 지혜로운 자는 남은 계책이 있어서 간사奸邪한 일을 꾸미게 되며, 꾀가 많은 자는 남은 재주가 있어서 속일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천하의 근심이 한데 섞여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대체로 호랑이와 표범은 종일終日토록 죽이지 않으면 날뛰고 크게 울부짖으며 그 노함을 발하게 되고, 독사와 전갈은 종일토록 물지 않으면 초목草木을 물어 그 독이 퍼지게 합니다.
그 이치가 실로 그러하여 괴상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옛날에 유방劉邦항우項羽초개草芥 사이에서 떨치어 일어나니, 나라와 나라의 무뢰한 젊은이들이 수천 수백 명씩 무리를 지어 다투어 일어나 호응한 자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리저리 전전하며 싸운 지 5, 6년이 되니 천하에서는 전쟁戰爭을 싫어하게 되었고, 항적項籍(항우項羽)은 죽었으며 고조高祖(유방劉邦)도 이미 늙었습니다.
바야흐로 이때 여러 장수들을 으로 분봉分封하고 율령律令을 고쳐 정하여 천하天下와 함께 휴식休息하였습니다.
한신韓信경포黥布 같은 무리가 서로 이어 일어난 것이 일곱 나라였으며, 고조高祖는 전쟁판에서 죽어 저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연이어 여씨呂氏의 화까지 미쳐 효문제孝文帝에 이른 후에야 안정이 되었습니다.
이 어찌 일어나기는 쉬워도 거두기는 어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유방과 항우의 기세는 처음에는 마치 황하黃河를 터뜨린 듯 흐름을 타고 내려가 실로 기뻐할 만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붕궤되어 사방으로 나가 수백 리 사이로 퍼져나가자 손을 맞잡고 구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아! 성인聖人이 있지 않았다면 무엇으로 그 뒤를 잘 이었겠습니까?
태조太祖태종太宗께서는 몸소 갑주甲冑를 두르고 험한 땅을 밟고 건너 사방의 쑥대를 베어 넘기셨습니다.
용병用兵한 지 수십 년 만에 모신謀臣맹장猛將들이 천하天下에 가득 찼습니다.
하루아침에 갑옷을 거두고 쉬게 하여 4세가 전하도록 천하天下에 변고가 없었으니 이것이 무슨 술책입니까?
형초荊楚구강九江의 땅을 여러 장수들에게 나누어주지 않아, 한신韓信경포黥布 같은 반역의 무리가 그 마음을 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천하天下에 변고가 없어 병사를 오래도록 쓰지 않는다면, 그 의롭지 못한 마음이 쌓여 발산시킬 곳이 없게 되어 포식飽食하고 우유優游하며 양민良民들에게 기분을 풀려고 하게 됩니다.
평상시에 아무 일이 없음을 살피고 원망하는 말을 쏟아내어 그 윗사람에게 요구하여, 어느 날 위급함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천금千金을 주지 않고서는 부릴 수가 없습니다.
왕년往年천하天下조칙詔勅으로 성지城池를 수선‧보완하게 하였는데, 서천西川의 일은 제가 친히 보았습니다.
무릇 군현郡縣부민富民은 천거되어 그 이름을 올리고 수백만 전의 돈을 얻어 주식酒食궤향饋餉 비용으로 썼습니다.
〈성을 다지는〉 절굿공이 소리가 아직 채 끊어지지도 않았는데 성이 문득 잇달아 무너졌으나, 이와 같이 수년을 한 뒤에야 안정이 되었습니다.
일이 끝나자 관리官吏들은 서로 축하하였고 졸도卒徒들은 서로 자랑하여, 마치 싸움에서 이기고 개선하여 상을 기다리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러나 근자에 경사京師로 와서 거리에서 노닐었는데 그 무리들이 왕왕往往 서로 모여 이야기를 하면서 꺼리는 것이 없었습니다.
현지인들에게서 듣자 하니 바야흐로 봄철인데 더욱 차마 듣지를 못할 것 같았습니다.
대체로 오뉴월이 되면 마침 경사京師에서 홍수洪水가 날 것을 근심하여 호미와 곰방메, 삼태기를 양쪽 강기슭에 쌓아서 벌여놓고 관리官吏들이 날마다 천만千萬 전을 써가며, 명령命令을 전달하는 외침과 위로慰勞하여 묻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이 수십 리나 되는데도 오히려 또한 곁눈질이나 하고 뒤돌아보며 기꺼이 노력을 다 바치지 않으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안의 것은 경사京師에서 들은 것과 같고, 밖의 것은 서천西川에서 직접 목격한 것과 같으니, 천하天下형세形勢가 지금 어떻게 되겠습니까?
장수將帥를 다스리는 것은 천자天子의 일이며, 병사兵士를 다스리는 것은 장수將帥의 직분입니다.
천자天子라는 분은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여유롭게 생활하며, 은혜恩惠를 세우고 명예名譽를 거두며, 천하와 더불어 기쁘고 즐거운 일을 하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는 직접 병사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인신人臣을 집행하되 온정溫情을 추구하지 않으며 마음을 다하되 명예名譽를 추구하지 않고, 죽을 힘을 다하여 사직社稷을 지키면서 천하의 마음이 천자 한 사람에게 매이게 하면서도 자신은 거기에 끼어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병사를 다스리는 것은 인신人臣의 일이므로 천자天子에게 누를 끼칠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근심거리는 대신大臣들이 명예名譽를 좋아하고 비방誹謗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명예를 좋아하면 사사로운 은혜를 많이 세우고, 비방을 두려워하면 법을 집행함이 굳세지 못합니다.
그런 까닭에 천하天下병사兵士가 횡포를 부림이 이 지경에 이르러도 제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번에 적공狄公추부樞府에 계실 때에는 관후寬厚하고 사람을 사랑한다고 소문났으며 사졸士卒들과 친밀하여 그들의 환심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태위太尉께서 마침 그 뒤를 이었습니다.
적공狄公이라는 분은 바깥을 다스리는 방법은 알았지만 안을 다스리는 는 알지 못하셨으니, 이는 변방邊方장수將帥 재목입니다.
옛날에는 군사軍士가 바깥에 있으면 장군將軍을 사랑하고 천자天子를 잊으며, 안에 있으면 천자天子를 사랑하고 장군將軍을 잊었습니다.
장군將軍을 사랑하는 것은 싸우기 위해서이며, 천자天子를 사랑하는 것은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적공狄公이 그 바깥을 다스리는 마음을 가지고 그 안에 베풀었는데도 태위太尉께서 그 도를 되돌리지 못하시니 어떻게 다스리시겠습니까?
혹자或者병사兵士가 오래도록 교만驕慢해지도록 다스리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법으로 바로잡으려 하면 아마도 그 때문에 난이 발생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날 곽자의郭子儀하남河南을 떠나자 이광필李光弼이 실로 그를 대신하였습니다.
도착하려는 날 장용제張用濟원문轅門에서 참수를 당하니 삼군三軍이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이림회李臨淮(이광필李光弼)의 사나움으로 곽분양郭汾陽(곽자의郭子儀)의 장자풍長者風을 대신하니, 삼군三軍의 군사들이 적자赤子자모慈母의 품을 벗어난 듯 벌벌 떨며 엄정한 군사軍師의 곁에 서게 되었으니 무슨 난이 감히 발생하겠습니까?
또한 저 천자天子라는 분은 천하天下부모父母이며, 장수將帥재상宰相천하天下의 스승입니다.
스승이 아무리 엄하다 하여도 적자赤子는 감히 그 부모를 원망하지 않으며, 장수와 재상이 아무리 엄중하다 하여도 천하天下에서는 감히 그 임금을 책망하지 않으니, 이는 형세形勢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천자天子는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기 때문에 천하天下에서는 살려주기를 바라며, 죽였을 때는 천하天下에서 말하기를 “이는 천자天子가 죽인 것이다.”라고 하기 때문에 천자天子는 많이 죽일 수 없습니다.
인신人臣천자天子의 법을 받들면 비록 많이 죽인다 하더라도 천하天下에서는 원망을 돌릴 곳이 없습니다.
이것이 선왕先王이 천하를 위엄威嚴으로 굴복시키고 은덕恩德으로 품어주었던 방법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태위太尉께서는 천하天下장구長久하게 할 도를 생각하시고 일시적인 명예名譽를 바라지 마실 것이며, 지극히 공정公正한 마음을 다하고 삼군三軍을 가엽게 여기는 말을 많이 하지 마십시오.
대체로 천자天子께서는 깊은 어짊을 미루어나감으로써 병졸兵卒들과 마음을 맺으시고, 태위太尉께서는 위무威武를 엄정히 하시어 병졸들의 게으름을 떨치게 하십시오.
저들이 천자의 깊은 어짊을 생각하면 두려워하면서도 원망怨望에 이르지 않을 것이고, 태위의 위무를 생각하면 경애敬愛하면서도 교만驕慢에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군신君臣의 체통이 순조롭게 되고, 두려워하면서도 경애敬愛하는 도가 서는 것을 태위太尉가 아니면 제가 누구에게 바라겠습니까?
형천荊川(당순지唐順之)이 말하였다. “앞의 일단一段병사兵士교만驕慢한 폐해를 논하였고, 뒤의 일단一段은 교만한 병사를 처리하는 방책으로 당시의 유용한 문자였다.”


역주
역주1 上韓樞密書 : 韓樞密은 韓琦(1008~1075)로 자는 稚圭이다. 相州 安陽(지금의 河南) 사람으로, 벼슬은 宰相에 이르렀고 《安陽集》이 있으며, 《宋史》에 本傳이 있다. 蘇洵이 이 글을 올렸을 때 韓琦는 軍政을 책임지는 樞密使였으므로 韓樞密이라 하였으며, 본문에서는 太尉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 글은 嘉祐 원년(1056) 9, 10월경에 지었다.
역주2 委江河……自禹之後未之見也 : 《史記》 〈夏本紀〉에 禹의 治水를 기록한 말이 있는데 “〈공물은〉 淮水와 泗水에 배를 띄워 黃河로 운송하였다. 淮水와 大海의 사이는 揚州이다. 彭蠡는 호수가 되고 기러기가 그곳에서 살았다. 세 강이 바다로 흘러들고, 震澤(太湖)은 안정을 찾았다.”라 하였다.
역주3 夫兵者……而敎之以殺人之事 : 《老子》 31장에 “武器는 상서롭지 못한 器物로 君子의 기물이 아니며, 어쩔 수 없어서 쓰는 것일 따름이다.[兵者 不祥之器 非君子之器 不得已而用之]”라는 말이 있다. 《六韜》 〈兵道〉에 “그러므로 聖王은 무기를 凶器라 하며 어쩔 수 없을 때에만 그것을 사용한다.[故聖王號兵爲凶器 不得已而用之]”라는 말이 있다.
역주4 昔者……應者不可勝數 : 劉는 劉邦을 가리키고, 項은 項羽를 가리킨다. 《資治通鑑》 〈秦紀 2〉의 기록에 의하면, 秦 二世皇帝 원년 7월에 陳勝과 吳廣이 蘄에서 起兵하였고, 9월에는 沛 사람 劉邦이 沛에서 起兵하였으며, 下相 사람 項梁(項羽의 숙부)은 吳에서 기병하여 2년 사이에 뭇 도둑들이 한꺼번에 기병하였다고 하였다.
역주5 韓信黥布之徒……高祖死於介冑之間而莫能止也 : 《漢書》 〈高帝紀〉에 의하면, 5년(B.C. 202) 가을 7월에 燕王 臧荼가 반란을 일으키자 劉邦이 친히 쳤다. 6년 겨울 10월에는 사람들이 楚王 韓信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자 劉邦이 韓信을 감금하여 洛陽에 이르러 淮陰侯로 강등시켰다. 7년 겨울 10월에는 韓王 信이 匈奴에 항복하자 劉邦이 직접 쳤다. 10년 9월에는 代의 相國 陳豨가 반란을 일으켰다. 11년 봄 정월에는 淮陰侯 韓信이 長安에서 모반을 일으켰다. 3월에는 梁王 彭越이 모반을 일으켰다. 가을 7월 淮南王 英布가 반란을 일으켰다. 劉邦은 英布를 치다가 流矢에 맞아 12월(B.C. 195)에 세상을 떴다.
역주6 連延及於呂氏之禍 訖孝文而後定 : 孝文은 곧 漢 文帝 劉恒으로, 劉邦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薄姬라 하였고 代王에 봉하여졌다. 呂后가 죽고 呂氏들이 劉氏들을 위태롭게 하고자 하자, 丞相 陳平과 太尉 周勃이 呂氏들을 죽이고 代王을 맞아들여 세우니 곧 文帝이다.
역주7 四世 : 宋 太祖 趙匡胤과 太宗 趙炅, 眞宗 趙恒, 仁宗 趙禎을 가리킨다.
역주8 御將者……故其道不可以御兵 : 《韓非子》 〈主道〉편에 나오는 내용을 약간 바꾸어서 쓴 것이다.
역주9 狄公在樞府 : 狄公은 곧 狄靑(1008~1057)으로, 자는 漢臣이며 汾州 河西(지금의 山西 汾州) 사람이다. 北宋의 명장으로 西夏와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 皇祐 4년(1052) 樞密副使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에 樞密使로 발탁되었다. 《宋史》 〈狄靑傳〉에 “狄靑은 樞密府에 4년간 있었는데 나갈 때마다 士卒들이 문득 가리키고 눈짓을 하면서 자랑스러워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역주10 太尉適承其後 : 《宋史》 〈仁宗紀〉 嘉祐 원년(1056) 8월의 기록에 “狄靑을 파하고 韓琦를 樞密使로 삼았다.”고 하였다.
역주11 昔者……三軍股慄 : 郭子儀(697~781)는 華州 鄭縣(지금의 陝西 華縣) 사람으로 처음에 武擧(곧 武科)에 高等으로 급제하여 左衛長史에 補任되었으며, 天寶 14년(755)에 朔方節度使로 충원되어 安祿山을 토벌하여 나라 대부분을 수복하였으며 唐나라 왕실의 再造之臣으로 기려졌다. 汾陽郡王에 봉해졌으며 尙書令에 임명되었다. 德宗이 즉위하자 尙父로 높여졌다. 李光弼(708~764)은 營州 柳城(지금의 遼寧 朝陽 남쪽) 사람으로 契丹族이다. 唐나라 때 대장으로 臨淮王에 봉해졌다. 安史의 난 때 실지를 수복한 적이 있으나 환관의 견제로 북망산에서 패하였다. 《舊唐書》 〈李光弼傳〉에 의하면 乾元 원년(758) 8월에 李光弼이 郭子儀를 대신하여 朔方節度使가 되었는데 “左廂兵馬使 張用濟는 郭子儀의 너그러움을 잇고 싶었는데 李光弼의 명령이 여러 장수들과 자못 이견이 있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 무리들을 머물러두고자 하였다. 李光弼이 수천 기를 거느리고 汜水縣에 나와 주둔하자 張用濟가 單騎로 맞아 만나보다가 轅門에서 참수를 당하니 여러 장수들은 두려워 엎드렸다.”고 한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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