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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洵(1)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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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飜案格議論 有一段風致
人之居乎此也 其必有樂乎此也
居斯樂이라가 不樂不居也
居而不樂하고 不樂而不去 爲自欺且爲欺天이라
蓋君子 恥食其食而無其功하고 恥服其服而不知其事
居而不樂이면 吾有吐食脫服하야 以逃天下之譏而已耳
天之畀我以形하여 而使我以心馭也
今日欲適秦이라가 明日欲適越이라도 天下誰我禦리오
居而不樂하고 不樂而不去 其心且不能馭其形이니 而況能以馭他人哉
自唐以來 天下士大夫 爭以排釋老爲言이라
其徒之欲求知於吾士大夫之間者 往往自叛其師하여 以求容於吾하고 而吾士大夫 亦喜其來而接之以禮
之徒 飮酒食肉以自絶於其敎
嗚呼 歸爾父子하고 復爾室家而後 吾許爾以叛爾師 父子之不歸하고 室家之不復하여 而師之叛이면 是不可以一日立于天下
傳曰 라하니라
之忠於楚也 雖不如之先覺이나 而比之貳則爲愈
予在京師 彭州僧保聰 來求識予甚勤이라
及至蜀 聞其自京師歸하여 布衣蔬食以爲其徒先하여 凡若干年而所居圓覺院大治
一日爲予道其先師平潤事 與其院之所以得名者하고 請予爲記
予嘉聰之不以叛其師悅予也
爲之記曰
彭州龍興寺僧平潤有奇일새 因以名院이라
院始弊不葺이러니 潤之來 始得隙地以作堂宇하고 凡更二僧하여 而至於保聰이라
聰又合其隣之僧屋若干於其院以成이라
是爲記하노라


01. 팽주彭州원각선원圓覺禪院에 대한 기문
발상을 전환한 격식의 의논이 일단의 풍치가 있다.
사람이 여기에 거하는 것은 반드시 이곳에 즐거움이 있어서이다.
이 즐거움이 있는 곳에 거하다가 즐겁지 않으면 거하지 않는다.
거하는 것이 즐겁지 않고 즐겁지 않은데도 떠나가지 않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고 하늘도 속이는 것이 된다.
대체로 군자君子는 그 봉록俸祿을 먹으면서 그 공이 없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 옷을 입고 있으면서 그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거하는 것이 즐겁지 않으면 나는 봉록을 먹은 것을 토해내고 옷을 벗어버려 천하의 비난을 피할 뿐이다.
하늘이 나에게 형체를 주어 나로 하여금 마음으로 다스리게 하였다.
오늘 나라에 가고 싶어 하다가, 다음날 나라에 가고자 하더라도 천하에서 누가 나를 막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거하는 것이 즐겁지 않고 즐겁지 않은데도 떠나가지 않는 것은, 이것은 마음이 또한 그 형체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니, 하물며 다른 사람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나라 이래로 천하의 사대부들이 석가釋迦노자老子를 배척할 것을 다투어 말하였다.
그러므로 석가釋迦노자老子를 배우는 무리 중에서 우리 사대부의 사이에서 인정받기를 바라는 자들은 왕왕 스스로 그들의 스승을 배반하여 우리들에게 용납되기를 구하였고, 우리 사대부들도 그들이 오는 것을 기쁘게 여겨 로써 대접하였다.
영사靈師문창文暢은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어 스스로 그들의 가르침을 끊었다.
아! 너희들의 부자간의 인륜을 회복하고 실가室家의 즐거움을 회복한 뒤에야 우리 사대부들은 너희가 너희들의 스승을 배반하였다고 인정할 수 있으니, 부자간의 인륜을 회복하지 않고 실가室家의 즐거움을 회복하지 않으면서 스승을 배반하면 천하에 하루도 서서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옛 책에 이르기를 “제후의 신하된 자는 남의 나라에 가서 사사로이 외교外交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계포季布가 초나라 항우項羽에게 충성한 것은 비록 소하蕭何한신韓信이 선견지명이 있어서 유방劉邦을 따른 것만은 못하나 정공丁公이 두 마음 품은 것에 비교해보면 낫다고 하겠다.
내가 서울에 있을 때 팽주彭州의 승려인 보총保聰이 나에게 찾아와서 사귐을 청하기를 매우 부지런히 하였다.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듣자하니 그가 서울로부터 돌아와서 베옷을 입고 소찬을 먹는 것으로써 그의 무리들의 모범이 된 지 몇 년 만에 거처하던 원각원圓覺院을 크게 수리하였다고 하였다.
하루는 나에게 그의 돌아가신 스승인 평륜平潤의 일과 원각원圓覺院이라는 이름을 짓게 된 까닭을 말해주고 기문記文을 지어주기를 나에게 청하였다.
나는 보총保聰이 그의 스승을 배반하여 나를 기쁘게 하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여겼다.
그 때문에 다음과 같이 기문記文을 쓴다.
팽주彭州 용흥사龍興寺의 승려인 평륜平潤이 《원각경圓覺經》 강론에 뛰어났기 때문에 원각원圓覺院이라는 이름을 짓게 되었다.
원각원圓覺院이 처음에는 허물어져 지붕도 잇지 못하였는데 평륜平潤이 와서 비로소 빈터를 얻어 당우堂宇를 지었고, 두 승려를 거쳐 보총保聰에 이르렀다.
보총保聰이 또 그 이웃의 절 일부분을 원각원圓覺院에 합하여 완성하였다.
이것으로 기문을 삼는다.


역주
역주1 彭州圓覺禪院記 : 彭州는 지금의 四川省 彭縣이고, 圓覺禪院은 地理志에 기록이 없어 상세한 위치를 알 수 없다. 이 記文은 글의 내용으로 보아 蘇洵이 서울에서 蜀 땅으로 돌아와 몇 년 뒤에 지은 듯하다. 이 글은 승려인 保聰이 《圓覺經》 강론에 뛰어난 그의 스승의 뜻을 받들어 원각선원을 수리하고 蘇洵에게 기문을 지어주기를 청하므로 蘇洵이 그가 스승의 뜻을 이은 것을 아름답게 여겨 쓴 것이다.
역주2 靈師文暢 : 靈師는 법명이 靈徹이고 성은 皇甫이다. 두 사람 모두 唐나라 때의 이름난 중으로 韓愈와 동시대의 인물이다. 韓愈의 〈送靈師〉 시와 〈送文暢師北游〉 시에, 佛門의 계율을 지키지 않고 술을 마시면 百盞을 다 마시고 술집에서 기생들과 어울려 춤추기도 하며 바둑을 둘 때에 흑백 돌을 가지고 다투기도 하는 등 엽기적인 행동을 한 내용이 나와 있다.
역주3 人臣無外交 : 《禮記》 〈郊特牲〉에 “大夫가 임금을 따라서 남의 나라에 가서 그 나라의 임금을 사사로이 뵙는 것은 禮가 아니다. 제후의 신하 된 자가 外交가 없는 것은 감히 타국의 임금에게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爲人臣者 無外交 不敢貳君也]”라는 기록이 보인다.
역주4 季布 : 楚나라 사람이며, 任俠한 기질로 項羽의 장수가 되어 여러 번 漢王인 劉邦을 곤경에 빠뜨렸다. 劉邦이 項羽를 멸한 뒤에 千金의 현상금을 걸어 숨기는 자가 있으면 三族까지 죄를 준다고 하였다. 季布가 濮陽 周氏 집에 숨었다가 여의치 않아 머리를 깎고 목에 쇠고리를 차서 죄수 행세를 하며 魯 지방의 朱氏 집에 스스로 팔려갔다. 朱氏가 마음속으로 季布임을 알고는 밭에다 두어 아들과 함께 지내게 해놓고는 몸소 낙양의 汝陰侯 滕公에게 가서 말하기를 “季布가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천자께서 급하게 잡으려 합니까? 각기 주인을 위하여 신하의 직분을 다했을 뿐입니다. 천자께서 사사로운 원한으로 찾는다면 마음이 넓지 못함을 천하에 보이는 것입니다. 季布와 같은 어진 사람을 오랑캐 나라로 달아날 수밖에 없도록 하거늘 공께서는 어찌하여 천자에게 말하지 않습니까?” 하니, 滕公이 천자에게 아뢰어 이에 季布를 사면하고 불러 郎中 벼슬에 임명하였다. 《史記 季布欒布列傳》
역주5 蕭韓 : 蕭何와 韓信을 가리킨다. 두 사람은 劉邦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劉邦을 도와 漢나라를 창업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역주6 丁公 : 季布의 母弟(아버지가 다르고 어머니는 같은 同腹 동생)로 楚王 項羽의 장수가 되어 漢王인 劉邦을 팽성 서쪽에서 쫓아 곤경에 빠뜨렸다. 丁公이 짧은 병기로 劉邦과 싸웠는데 劉邦이 급하여 丁公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두 賢者가 어찌 서로 괴롭게 하는가?” 하자, 丁公이 그 말에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고 漢王도 드디어 돌아갔다. 項羽가 멸망한 뒤에 丁公이 劉邦을 알현하니 劉邦이 丁公을 軍中에 조리 돌리며 말하기를 “丁公이 項羽의 신하가 되어 충성을 하지 않아 項羽로 하여금 천하를 잃게 하였다.” 하고는 드디어 목을 베고 말하기를 “뒷날에 남의 신하 된 자로 하여금 丁公을 본받음이 없도록 하노라.” 한 기록이 보인다. 《史記 季布欒布列傳第四十》
역주7 圓覺經 : 佛經 이름으로 원명은 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으로 1권 12장으로 되어 있다. 文殊‧普賢‧彌勒 등 12보살이 釋迦와 一問一答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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