曰 仲尼之說은 純乎經者也요 吾之說은 參乎權而歸乎經者也라
如得其術이면 則人君有少不爲桀紂者요 吾百諫而百聽矣니 況虛己者乎아
不得其術이면 則人君有少不若堯舜者요 吾百諫而百不聽矣니 況逆忠者乎아
夫游說之士는 以機智勇辯濟其詐요 吾欲諫者는 以機智勇辯濟其忠이니라
吾獨怪夫諫而從者百一하고 說而從者十九니라 諫而死者皆是나 說而死者는 未嘗聞이라
說之術 可爲諫法者五니 理諭之요 勢禁之요 利誘之요 激怒之요 隱諷之之謂也니라
何則고 理而諭之면 主雖昏이나 必悟요 勢而禁之면 主雖驕나 必懼요 利而誘之면 主雖怠나 必奮이요 激而怒之면 主雖懦나 必立이요 隱而諷之면 主雖暴이나 必容이니라
悟則明하고 懼則恭하며 奮則勤하고 立則勇하며 容則寬이니라
噫
라 이니 無蘇秦
之術也
며 蘇秦張儀
는 不免爲游說
니 無龍逢比干之心也
라
是以로 龍逢比干은 吾取其心이요 不取其術이며 蘇秦張儀는 吾取其術이요 不取其心이라
05. 간언諫言에 대한 논문 상上 〈현군賢君은 때맞춰 있을 수 없고 충신忠臣은 때맞춰 얻지 못하므로 〈간론諫論〉을 지었다〉
注
형천荊川이 말하기를 이런 문자文字는 순경荀卿을 베낀 것이라 하였는데, 실로 그러하다.
고금古今에 간언諫言을 논함은 항상 풍간諷諫을 택하였고 직간直諫은 적었는데 그 설은 아마 중니仲尼(공자孔子)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나는 풍간諷諫과 직간直諫은 마찬가지이며, 그것을 쓰는 기술이 어떠한가를 돌아보아야 할 따름이라고 생각한다.
오거伍擧가 은어隱語로 진언하자 초왕楚王의 음란함은 더욱 심하여졌고, 모초茅焦가 옷을 벗고 위태危殆롭다는 의론議論을 올리자 진제秦帝는 곧바로 깨닫게 되었다.
풍간諷諫은 실로 다 채택할 수 없고, 직간直諫 또한 쉽사리 적게 하지 못한다.
내가 이 때문에 “그것을 쓰는 기술이 어떠한가를 돌아보아야 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였다. “중니仲尼의 설說은 순수하게 경經이고 나의 설說은 권도權道를 참고하여 경經에 귀의한 것이다.
그 기술을 얻는다면 인군人君이 거의 걸桀과 주紂가 되지 않을 것이며 내가 백 번 간언諫言하면 백 번 들을 것이니, 하물며 자기를 비우는 것이겠는가?
그 기술을 얻지 못한다면 인군人君이 거의 요堯와 순舜 같지 않게 되어 내가 백 번 간언해도 백 번 다 듣지 않을 것이니, 하물며 충언忠言을 거스름이겠는가?”
내가 말하였다. “기지機智와 용변勇辯을 옛날 유세遊說하는 선비와 같이 할 따름이다.
대체로 유세遊說하는 선비들은 기지機智와 용변勇辯으로 그 속임수를 이루었고, 내가 간언諫言하고자 하는 사람은 기지機智와 용변勇辯으로 그 충성忠誠을 이루었다.
주周나라가 쇠하자 열국列國에서는 유세遊說가 성행했으며 이로부터 세상에는 그 사람이 있게 되었다.
내 홀로 이상하게 생각하노니, 간언諫言하면 따르는 자가 백에 하나이고 유세遊說하면 따르는 자가 열에 아홉이며, 간언하다 죽은 자는 모두 그렇게 많으나 유세하다 죽은 자는 아직 들어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기휘忌諱를 저촉抵觸함은 유세가 어쩌면 간언보다 심하다.
이로 말미암아 꼭 풍간諷諫이어야 할 것은 아니며 반드시 기술이어야 함을 알겠다.”
유세遊說하는 기술로 간언諫言하는 법이 될 만한 것은 다섯 가지가 있으니, 이치로 깨우치고, 형세形勢로 금禁하며, 이익利益으로 꾀고, 격동激動시켜 노하게 하며, 은유隱喩로 풍간함을 이르는 것이다.
촉룡觸龍이 조후趙后가 딸을 사랑하는 것이 아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현명하다고 하자 얼마 되지 않아 장안군長安君이 인질로 나갔으며, 감라甘羅가 〈백기白起가〉 두우杜郵에서 죽은 것으로 장당張唐을 힐문하자 〈장당張唐이〉 곧바로 연燕나라의 재상으로 떠났고, 조趙나라의 사졸士卒이 두 현명한 왕이라는 뜻으로 연나라에 말하니 무신武臣을 즉시 돌려보냈다.
자공子貢이 국내의 근심으로 전상田常을 훈계하니 제齊나라가 노魯나라를 치지 못하였으며, 무공武公이 미록麋鹿으로 경양왕頃襄王을 으르니 초楚나라가 감히 주周나라를 도모하지 못하였으며, 노중련魯仲連이 삶아 죽이고 젓을 담근다는 말로 신원연新垣衍을 겁주니 위魏나라는 과연 진秦나라를 임금으로 섬기지 않았다.
전생田生이 만호후萬戶侯로 장경張卿을 깨우치자 유택劉澤이 〈낭아왕琅玡王으로〉 봉하여졌으며, 주건朱建이 부귀富貴를 굉유閎孺에게 미끼로 던지자 벽양후辟陽侯가 사면되었으며, 추양鄒陽이 총애寵愛를 가지고 왕장군王長君을 기쁘게 하자 양왕梁王이 풀려났다.
소진蘇秦이 ‘소의 꼬리’라는 말로 한韓나라를 부끄럽게 하자 혜왕惠王은 검劍을 어루만지며 크게 탄식하였고, 범수范睢가 ‘왕이 없다.’는 말로 진秦나라를 수치스럽게 하자 소왕昭王이 길게 무릎을 꿇고 가르침을 청하였으며, 역생酈生이 ‘진秦나라를 돕겠느냐.’는 말로 한漢나라를 능멸하자 패공沛公이 〈두 여인에게 발을〉 씻기게 하던 것을 그만두고 계책을 들었다.
소대蘇代는 흙인형[토우土偶]을 가지고 전문田文을 비웃었으며, 초楚나라 사람은 활과 주살로 양왕襄王을 감동시켰으며, 괴통蒯通은 아내를 맞는 것으로 제齊나라 재상宰相을 깨우쳤다.
다섯 가지는 서로 경쟁하는 음험陰險하고 사벽邪辟한 의논이다.
비록 그러하지만 충신忠臣에게 펴면 충분히 성공成功한다.
어째서인가? 이치理致로 깨우치면 임금이 비록 혼매하다 해도 반드시 깨달으며, 형세形勢로 금하면 임금이 비록 교만하다 해도 반드시 두려워하고, 이익利益으로 꾀면 임금이 비록 게으르다 해도 반드시 분발하고, 격동激動하여 노하게 하면 임금이 비록 나약하다 해도 반드시 서며, 은유隱喩로 풍간諷諫하면 임금이 비록 사납다 해도 반드시 포용하게 된다.
깨달으면 밝아지고, 두려워하면 공손해지고, 분발하면 부지런해지고, 서면 용감해지며, 포용하게 되면 너그러워진다.
임금을 성군聖君으로 만드는 도道가 모두 여기에 있다.
내가 옛 신하들을 보건대, 말을 했다 하면 반드시 따르고 이치를 펴면 반드시 이룸은 당唐나라의 위정공魏鄭公 같은 사람이 없었으니, 그 처음에는 사실 종횡縱橫의 설說을 배웠다.
아! 용봉龍逢과 비간比干은 훌륭한 신하로 일컬어지지 않았으니 소진蘇秦과 장의張儀의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며,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는 유세가遊說家를 면치 못하였으니 용봉龍逢과 비간比干의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용봉龍逢과 비간比干에 대해서는 내 그 마음을 취하였고 그 기술은 취하지 않았으며, 소진蘇秦과 장의張儀에 대해서는 내 그 기술을 취하였고 그 마음은 취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