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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洵(1)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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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進諫 千古絶調
荊川謂 此等文字 摹荀卿이라하니 良是
吾以爲諷直一也 顧用之之術何如耳니라
諷固不可盡與 直亦未易少之니라
吾故曰 顧用之之術何如耳라하니라
然則仲尼之說非乎
曰 仲尼之說 純乎經者也 吾之說 參乎權而歸乎經者也
如得其術이면 則人君有少不爲桀紂者 吾百諫而百聽矣 況虛己者乎
不得其術이면 則人君有少不若堯舜者 吾百諫而百不聽矣 況逆忠者乎
然則奚術而可
曰 機智勇辯 如古游說之士而已
夫游說之士 以機智勇辯濟其詐 吾欲諫者 以機智勇辯濟其忠이니라
請備論其效하노라
周衰 游說熾於列國하니 自是 世有其人이라
吾獨怪夫諫而從者百一하고 說而從者十九니라 諫而死者皆是 說而死者 未嘗聞이라
然而抵觸忌諱 說或甚於諫이니라
由是 知不必乎諷諫이요 而必乎術也니라
說之術 可爲諫法者五 理諭之 勢禁之 利誘之 激怒之 隱諷之之謂也니라
理而諭之也
勢而禁之也니라
利而誘之也
激而怒之也니라
隱而諷之也니라
五者 相傾險詖之論이라
雖然이나 施之忠臣이면 足以成功이니
何則 理而諭之 主雖昏이나 必悟 勢而禁之 主雖驕 必懼 利而誘之 主雖怠 必奮이요 激而怒之 主雖懦 必立이요 隱而諷之 主雖暴이나 必容이니라
悟則明하고 懼則恭하며 奮則勤하고 立則勇하며 容則寬이니라
致君之道 盡於此矣로다
吾觀昔之臣한대 言必從하고 理必濟 莫若이라
此所謂得其術者歟인저
이니 無蘇秦之術也 蘇秦張儀 不免爲游說 無龍逢比干之心也
是以 龍逢比干 吾取其心이요 不取其術이며 蘇秦張儀 吾取其術이요 不取其心이라
以爲諫法하노라


05. 간언諫言에 대한 논문 현군賢君은 때맞춰 있을 수 없고 충신忠臣은 때맞춰 얻지 못하므로 〈간론諫論〉을 지었다〉
진간進諫천고千古절조絶調이다.
형천荊川이 말하기를 이런 문자文字순경荀卿을 베낀 것이라 하였는데, 실로 그러하다.
고금古今간언諫言을 논함은 항상 풍간諷諫을 택하였고 직간直諫은 적었는데 그 설은 아마 중니仲尼(공자孔子)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나는 풍간諷諫직간直諫은 마찬가지이며, 그것을 쓰는 기술이 어떠한가를 돌아보아야 할 따름이라고 생각한다.
오거伍擧은어隱語로 진언하자 초왕楚王의 음란함은 더욱 심하여졌고, 모초茅焦가 옷을 벗고 위태危殆롭다는 의론議論을 올리자 진제秦帝는 곧바로 깨닫게 되었다.
풍간諷諫은 실로 다 채택할 수 없고, 직간直諫 또한 쉽사리 적게 하지 못한다.
내가 이 때문에 “그것을 쓰는 기술이 어떠한가를 돌아보아야 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중니仲尼은 틀린 것인가?
내가 말하였다. “중니仲尼은 순수하게 이고 나의 권도權道를 참고하여 에 귀의한 것이다.
그 기술을 얻는다면 인군人君이 거의 가 되지 않을 것이며 내가 백 번 간언諫言하면 백 번 들을 것이니, 하물며 자기를 비우는 것이겠는가?
그 기술을 얻지 못한다면 인군人君이 거의 같지 않게 되어 내가 백 번 간언해도 백 번 다 듣지 않을 것이니, 하물며 충언忠言을 거스름이겠는가?”
그렇다면 어떤 기술이면 되겠는가?
내가 말하였다. “기지機智용변勇辯을 옛날 유세遊說하는 선비와 같이 할 따름이다.
대체로 유세遊說하는 선비들은 기지機智용변勇辯으로 그 속임수를 이루었고, 내가 간언諫言하고자 하는 사람은 기지機智용변勇辯으로 그 충성忠誠을 이루었다.
그 효과를 갖추어 논할 것을 청한다.
나라가 쇠하자 열국列國에서는 유세遊說가 성행했으며 이로부터 세상에는 그 사람이 있게 되었다.
내 홀로 이상하게 생각하노니, 간언諫言하면 따르는 자가 백에 하나이고 유세遊說하면 따르는 자가 열에 아홉이며, 간언하다 죽은 자는 모두 그렇게 많으나 유세하다 죽은 자는 아직 들어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기휘忌諱저촉抵觸함은 유세가 어쩌면 간언보다 심하다.
이로 말미암아 꼭 풍간諷諫이어야 할 것은 아니며 반드시 기술이어야 함을 알겠다.”
유세遊說하는 기술로 간언諫言하는 법이 될 만한 것은 다섯 가지가 있으니, 이치로 깨우치고, 형세形勢하며, 이익利益으로 꾀고, 격동激動시켜 노하게 하며, 은유隱喩로 풍간함을 이르는 것이다.
촉룡觸龍조후趙后가 딸을 사랑하는 것이 아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현명하다고 하자 얼마 되지 않아 장안군長安君이 인질로 나갔으며, 감라甘羅가 〈백기白起가〉 두우杜郵에서 죽은 것으로 장당張唐을 힐문하자 〈장당張唐이〉 곧바로 나라의 재상으로 떠났고, 나라의 사졸士卒이 두 현명한 왕이라는 뜻으로 연나라에 말하니 무신武臣을 즉시 돌려보냈다.
이는 이치로 깨우친 것이다.
자공子貢이 국내의 근심으로 전상田常을 훈계하니 나라가 나라를 치지 못하였으며, 무공武公미록麋鹿으로 경양왕頃襄王을 으르니 나라가 감히 나라를 도모하지 못하였으며, 노중련魯仲連이 삶아 죽이고 젓을 담근다는 말로 신원연新垣衍을 겁주니 나라는 과연 나라를 임금으로 섬기지 않았다.
이는 형세로 금하게 한 것이다.
전생田生만호후萬戶侯장경張卿을 깨우치자 유택劉澤이 〈낭아왕琅玡王으로〉 봉하여졌으며, 주건朱建부귀富貴굉유閎孺에게 미끼로 던지자 벽양후辟陽侯가 사면되었으며, 추양鄒陽총애寵愛를 가지고 왕장군王長君을 기쁘게 하자 양왕梁王이 풀려났다.
이는 이익利益으로 꾄 것이다.
소진蘇秦이 ‘소의 꼬리’라는 말로 나라를 부끄럽게 하자 혜왕惠王을 어루만지며 크게 탄식하였고, 범수范睢가 ‘왕이 없다.’는 말로 나라를 수치스럽게 하자 소왕昭王이 길게 무릎을 꿇고 가르침을 청하였으며, 역생酈生이 ‘나라를 돕겠느냐.’는 말로 나라를 능멸하자 패공沛公이 〈두 여인에게 발을〉 씻기게 하던 것을 그만두고 계책을 들었다.
이는 격분시킨 것이다.
소대蘇代는 흙인형[토우土偶]을 가지고 전문田文을 비웃었으며, 나라 사람은 활과 주살로 양왕襄王을 감동시켰으며, 괴통蒯通은 아내를 맞는 것으로 나라 재상宰相을 깨우쳤다.
이것이 은유隱喩풍간諷諫한 것이다.
다섯 가지는 서로 경쟁하는 음험陰險하고 사벽邪辟한 의논이다.
비록 그러하지만 충신忠臣에게 펴면 충분히 성공成功한다.
어째서인가? 이치理致로 깨우치면 임금이 비록 혼매하다 해도 반드시 깨달으며, 형세形勢로 금하면 임금이 비록 교만하다 해도 반드시 두려워하고, 이익利益으로 꾀면 임금이 비록 게으르다 해도 반드시 분발하고, 격동激動하여 노하게 하면 임금이 비록 나약하다 해도 반드시 서며, 은유隱喩풍간諷諫하면 임금이 비록 사납다 해도 반드시 포용하게 된다.
깨달으면 밝아지고, 두려워하면 공손해지고, 분발하면 부지런해지고, 서면 용감해지며, 포용하게 되면 너그러워진다.
임금을 성군聖君으로 만드는 가 모두 여기에 있다.
내가 옛 신하들을 보건대, 말을 했다 하면 반드시 따르고 이치를 펴면 반드시 이룸은 나라의 위정공魏鄭公 같은 사람이 없었으니, 그 처음에는 사실 종횡縱橫을 배웠다.
이것이 이른바 그 기술을 얻은 것이리라.
아! 용봉龍逢비간比干은 훌륭한 신하로 일컬어지지 않았으니 소진蘇秦장의張儀의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며, 소진蘇秦장의張儀유세가遊說家를 면치 못하였으니 용봉龍逢비간比干의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용봉龍逢비간比干에 대해서는 내 그 마음을 취하였고 그 기술은 취하지 않았으며, 소진蘇秦장의張儀에 대해서는 내 그 기술을 취하였고 그 마음은 취하지 않았다.
이로써 간언諫言하는 으로 삼는다.


역주
역주1 諫 上 : 《嘉祐集》에는 〈諫論〉으로 되어 있으며, 지어진 시기는 未詳이다. “신하가 諫하는 데 능하면서도 임금으로 하여금 반드시 諫言을 받아들이게 할 수 없다면 정말로 간언에 능한 신하가 아니다.[臣能諫 不能使君必納諫 非眞能諫之臣]”라는 것을 논하였다. 賢君은 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하는 항상 機智와 勇辯으로 그 忠誠을 이루어 임금으로 하여금 반드시 그 간언을 받아들이게 하여야 한다고 하고 있다.
역주2 古今論諫……其說蓋出於仲尼 : 《孔子家語》 〈辯政〉에 孔子를 칭하여 “忠臣이 임금에게 간하는 것은 다섯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譎(휼)諫, 둘째는 戇(당)諫, 셋째는 降諫, 넷째는 直諫, 다섯째는 諷諫이니 오직 임금을 헤아려가며 행해야 한다. 나는 諷諫을 따를까 보다.”라 하였다. 王肅은 “諷諫은 어긋난 데 의거하여 죄를 멀리하고 해를 피하는 것이다.”라고 주를 달았다.
역주3 伍擧進隱語 楚王淫益甚 : 楚 莊王은 즉위한 지 3년이 되도록 號令도 내리지 않고 밤낮으로 향락을 즐기면서 온 나라에 명령하기를 “감히 간하는 자가 있으면 죽여서 용서치 않으리라.”라 하였다. 伍擧가 들어가 간하였다. 莊王은 왼쪽에는 鄭姬를 껴안고 오른쪽으로는 越나라 여인을 끼고 악기〈를 연주하는 舞姬들〉 사이에 앉아 있었다. 伍擧가 말하기를 “제가 수수께끼를 내고자 합니다.”라 하고는 계속하여 말하였다. “어떤 새가 언덕에 앉아 있는데 3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으니 어떤 새입니까?” 莊王이 말하였다. “3년 동안 날지 않았으니 날았다 하면 하늘을 뚫고 오를 것이고, 3년 동안 울지 않았으니 울었다 하면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다. 伍擧는 물러나라. 내 알겠노라.”라 하였다. 몇 달 동안 荒淫에 더욱 빠져들었다. 《史記 楚世家》
역주4 茅焦解衣危論 秦帝立悟 : 秦始皇의 모친은 嫪毐를 총애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일이 밝혀지자 秦始皇은 嫪毐를 車裂刑에 처하고 두 동생을 때려죽였으며 太后를 萯陽宮으로 옮겼다. 명령을 내려 말하기를 “감히 太后의 일로 간하는 자가 있으면 죽이고 말겠다.”라 하였다. 齊나라의 客인 茅焦가 간하기를 청하자 秦始皇은 대로하여 칼을 어루만지며 그를 불렀다. 茅焦가 말하기를 “폐하께서 假父를 車裂刑에 처한 것은 嫉妬하는 마음이 있어서이며, 두 아우를 자루에 넣어 때려죽인 것은 仁慈하지 않은 마음이 있어서이고, 어머니를 萯陽宮으로 옮긴 것은 不孝를 행한 것이며, 諫言하는 선비들에게 蒺藜를 따르게 하는 것은 桀‧紂의 다스림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천하는 듣건대 모두 와해되어 秦나라에 맞설 나라가 없다고 합니다. 신이 생각건대 秦나라는 망하고 폐하는 위태롭게 될까 걱정이옵니다. 할 말을 다 마쳤으니 도끼(質, 곧 形具로 鑕을 말함) 앞으로 나아갈 것을 원합니다.”라 하고는 옷을 벗고 도끼 앞에 엎드렸다. 秦始皇은 즉시 그를 용서해주고 茅焦를 仲父로 세웠으며 太后를 맞아들여 咸陽으로 돌려보냈다. 《說苑 正諫》
역주5 觸龍以趙后愛女賢於愛子 未旋踵而長安君出質 : 趙나라 孝成王 3년에 秦나라가 趙나라를 쳐서 성 3개를 함락시켰다. 趙나라가 齊나라에 구원을 청하니 齊나라에서 말하기를 “반드시 長安君을 인질로 삼으면 군사를 내겠다.”고 하였다. 太后는 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들이 억지로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左師 觸龍이 그의 작은 아들 舒祺를 그 경호원으로 바치고 태후를 뵙고 태후가 아들인 長安君보다 딸인 燕后를 더 사랑하는 것을 가지고 말하였다. 아울러 말하기를 “지금 太后께서 長安君의 지위를 높이려 하시면서 나라에 공을 세우지는 못하게 하십니다. 하루아침에 변고라도 생기면 長安君이 어찌 趙나라에 있다고 한들 스스로 편안하시겠습니까?”라 하였다. 趙后는 이에 깨닫고 長安君을 齊나라의 인질로 보냈다. 《戰國策 趙策》 觸龍의 ‘龍’이 《戰國策》에는 ‘讋’으로 되어 있다.
역주6 甘羅以杜郵之死詰張唐 而相燕之行有日 : 甘羅는 〈12세로〉 秦나라의 丞相 文信侯 呂不韋를 섬겼다. 秦始皇이 剛成君 蔡澤을 燕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니 燕王 喜는 太子 丹을 秦나라에 人質로 들어가게 하였다. 秦나라는 張唐으로 하여금 燕나라의 재상이 되게 하였다. 張唐이 가려 하지 않자 文信侯는 불쾌해했다. 甘羅는 張唐을 뵙기를 청하여 말하였다. “卿의 공은 武安君(장군 白起)에 비해 어떻습니까?” 말하기를 “武安君보다 못하네.”라 하였다. 甘羅가 말하기를 “應侯(승상 范睢)가 秦나라에 등용된다 한들 文信侯처럼 〈국정을〉 오로지 하겠습니까?”라 하니, 張唐이 말하였다. “應侯가 文信侯처럼 오로지 못하겠지.” 甘羅가 말하기를 “應侯가 趙나라를 치려 할 때 武安君이 난처하게 여기자 咸陽에서 7리를 떠났을 즈음 〈杜郵에서〉 목을 매어 죽였습니다. 지금 文信侯께서 卿을 燕나라의 재상이 되기를 청하였는데 경은 떠나려 하지 않으시니, 저는 경이 〈언제 어디서〉 피살될지 모르겠습니다.”라 하였다. 張唐이 말하기를 “청컨대 童子님의 말씀을 따라 가겠네.”라 하고는 마침내 짐을 꾸려 곧바로 떠났다. 《戰國策 秦策》
역주7 趙卒以兩賢王之意語燕 而立歸武臣 : 陳涉이 왕이 되자 武臣을 장군으로 삼고 張耳와 陳餘를 左右校尉로 삼아 북으로 옛 趙나라 땅을 침략하여 趙나라의 십수 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武臣은 張耳와 陳餘의 말을 듣고 趙王에 즉위하고 陳餘를 대장군으로 삼았으며 張耳는 右丞相으로 삼아 북쪽으로 燕나라의 경계를 침략하였다. 趙王은 한가로운 때 외출하였다가 燕나라 군에게 사로잡혔다. 燕나라는 趙나라의 땅 반을 나누어주면 왕을 돌려주려고 하였다. 趙나라에 잡일을 하는 병사가 있었는데 燕나라 성벽 아래로 달려가 말하기를 “저 武臣, 張耳, 陳餘는 말채찍을 흔드는 것만으로 趙나라의 수십 개 성을 함락시켰으며, 이들 또한 각기 南面하여 왕이 되고자 하니 어찌 卿相으로 그치고자 하겠습니까? 무릇 신하와 왕의 지위를 어찌 동등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처음 趙나라의 세력이 정해질 무렵에는 감히 나라를 三分하여 각기 왕이 될 수가 없었기에 나이의 高下를 따져 먼저 武臣을 앞세워 왕위에 즉위시킴으로써 趙나라의 人心을 잡은 것이었습니다. 이제 趙나라 땅도 모두 복종하였으니 이 두 사람도 趙나라를 나누어 왕이 되고 싶지만 다만 기회가 나지 않았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공께서 趙王을 감금하고 계시니 이 두 사람은 명목상으로는 趙王을 구한다고 하고 있습니다만 실은 燕나라가 그를 죽이기를 바라고 있으니, 그렇게 되면 이 두 사람은 趙나라를 半分하여 각기 왕이 될 것입니다. 대체로 하나의 趙나라로도 燕나라를 가벼이 여기는데 하물며 두 현명한 왕이 서로 지지하며 왕을 죽인 죄를 질책한다면 燕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은 쉬운 일일 것입니다.”라 하였다. 燕나라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에 趙나라 왕을 돌려보냈다. 《史記 張耳陳餘列傳》
역주8 子貢以內憂敎田常 而齊不得伐魯 : 田常이 齊나라에서 난을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齊나라의 거족인〉 高氏, 國氏, 鮑氏, 晏氏를 두려워하였으므로 그 군대를 옮겨 魯나라를 치려고 하였다. 孔子가 子貢에게 명하여 齊나라에 유세하여 齊나라가 군사를 일으키는 것을 그치게 하였다. 子貢이 가서 田常을 설득하여 군사를 옮겨 吳나라를 치게 하였다. 田常이 군사를 옮기는 것은 명분이 없다고 의심하자 子貢은 남쪽으로 吳王 夫差를 만나 吳나라가 齊나라를 치도록 하였다. 또 越나라로 갔다가 晉나라로 가서 吳나라를 약하게 할 계책을 바쳤다. 魯 哀公 11년(B.C. 484)에 夫差가 과연 군사를 일으켜 艾陵에서 齊나라 군사를 격파하였으며, 2년 뒤에는 晉나라와 강성함을 다투어 크게 물리쳤다. 越王 句踐은 승세를 타고 吳나라를 쳐서 멸망시켰으며 동쪽을 향하여 패권을 잡았다. 太史公이 논평하여 말하기를 “그러므로 子貢이 한번 나서 魯나라를 존속시키고 齊나라를 혼란에 빠뜨렸으며 吳나라를 깨뜨리고 晉나라를 강하게 하고 越나라가 패권을 쥐게 하였다.”라 하였다. 《史記 仲尼弟子列傳》
역주9 武公以麋鹿脇頃襄 而楚不敢圖周 : 楚나라 頃襄王이 齊나라 및 韓나라와 연합하여 秦나라를 치고 周나라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周 赧王은 武公으로 하여금 楚나라 재상 昭子에게 西周의 땅은 이것저것 다 합쳐도 백 리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하게 하였다. 武公이 말하기를 “일 벌이기를 좋아하는 임금과 전쟁을 좋아하는 권신들이 호령을 발하고 군대를 지휘하면서도 시종 창칼을 周 王室에 겨누지 않은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祭器가 그곳에 있는 것을 알고 단지 그것을 옮겨서 자신을 과시하려고 하였을 뿐 군주를 시해하는 화를 자초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韓나라가 祭器를 楚나라로 옮기려 한다면 나는 세상 사람들이 祭器 때문에 楚나라와 적이 될까 걱정됩니다. 신이 청컨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원래 호랑이는 고기가 비려서 食用으로 적당하지 않고 자신을 방어하는 예리한 발톱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호랑이를 사냥하려 합니다. 만약 호숫가에 사는 麋鹿에게 호랑이 가죽을 씌운다면 麋鹿을 사냥하는 사람은 호랑이를 잡는 것보다 수만 배의 이익을 취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이에 楚나라는 계획을 철회하고 가지 않았다. 《史記 楚世家》
역주10 魯連以烹醢懼垣衍 而魏不果帝秦 : 秦나라 군사가 동쪽으로 邯鄲을 포위하자 魏나라 安釐王이 객인 新垣衍을 보내 平原君에게 趙나라가 秦 昭王을 天子로 높여 군사를 물리게끔 하였다. 平原君은 머뭇거리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魯仲連은 이에 平原君을 통하여 新垣衍에게 유세하여 말하기를 “梁(곧 魏)나라는 아직 秦나라를 임금으로 높임으로 해서 입을 해를 보지 못하였을 따름입니다.……지난날 鬼侯와 鄂侯, 文王은 紂의 三公이었습니다. 그러나 紂는 마침내 鬼侯를 젓갈 담았고 鄂侯를 포를 떴으며 文王을 가두었습니다. 그러한 폭군을 어찌하여 사람들은 그래도 帝王이라 칭하며 마침내 스스로 포를 뜨거나 젓을 담는 곳으로 나아간 것입니까?……또한 秦나라는 끊임없이 稱帝할 것이며 또한 제후의 대신을 바꿀 것이니……장군은 또한 어떻게 옛 총애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감히 다시는 秦나라를 天子라 하려 하지 않았다. 《戰國策 趙策 3》
역주11 田生以萬戶侯啓張卿 而劉澤封 : 劉澤은 漢 高祖의 4촌 兄弟이다. 처음에는 營陵侯에 봉하여졌으며 일찍이 金으로 田生과 관계를 맺었다. 田生이 그를 위하여 呂后가 총애하는 謁者 張卿에게 말하기를 “太后께서는 呂産을 왕으로 세우려 하시나 대신들이 따르지 않을까 걱정하시는데 지금 경께서는 어찌 대신들에게 은근히 권하여 呂氏를 왕으로 봉하게 하고 그 일이 太后에게 알려지도록 하지 않습니까? 太后께서는 반드시 기뻐하실 것입니다. 呂氏들이 왕이 되면 萬戶侯 또한 반드시 경의 것이 될 것입니다.”라 하였다. 張卿은 매우 그럴듯하게 여기고 이에 대신들에게 呂産을 왕으로 세우게끔 부추겼다. 太后는 張卿에게 천금을 내렸다. 田生이 또 말하기를 “呂産이 왕은 되었으나 대신들은 심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營陵侯 澤은 劉氏들의 우두머리입니다. 지금 경께서 태후께 말씀드려 10여 현을 쪼개어 그를 봉하십시오. 그는 왕이 되면 기뻐할 것이고 여러 呂氏 왕들도 공고해질 것입니다.”라 하였다. 張卿이 들어가 그렇게 말하자 마침내 劉澤을 琅玡王으로 세웠다. 《漢書 荊燕吳傳》
역주12 朱建以富貴餌閎孺 而辟陽赦 : 朱建은 楚 땅 사람으로 平原君이란 호가 내려졌으며 長安으로 이사하였다. 辟陽侯 審食(이)其는 행실이 바르지 않았으나 太后의 총애를 얻고 있었는데 朱建과 알고 지내고자 하였으나 朱建은 만나려 하지 않았다. 朱建의 어머니가 죽자 가난하여 發喪을 할 수 없었는데 辟陽侯가 100금으로 문상하였다. 한참 있다가 惠帝가 辟陽侯를 하옥시키니 辟陽侯는 朱建에게 위급함을 알렸으며, 朱建은 이에 惠帝가 총애하는 신하 閎籍孺를 만나 말하였다. “그대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은 천하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소. 지금 辟陽侯는 太后의 총애를 받고 있지만 형리에게 넘겨졌는데 거리에서는 모두 그대가 참소하여 그를 죽이려 한다고 하고 있소. 지금 辟陽侯가 주살을 당한다면 당장은 太后가 분노를 숨기고 있겠지만 또한 그대를 죽일 것이오. 그대는 어찌하여 옷을 벗어 어깨를 드러내고 辟陽侯를 위하여 황제께 용서해달라고 청하지 않습니까? 황제께서 그대의 말을 듣고 辟陽侯를 내보내준다면 太后께서는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황제와 태후〉 두 분께서는 모두 그대를 총애할 것이고 그대의 富貴는 더욱 늘어날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閎籍孺는 크게 두려워하여 그의 계책을 따라 황제에게 말하니 황제는 과연 辟陽侯를 풀어주었다. 《漢書 酈陸朱劉叔孫傳》 顔師古의 주에 의하면 閎籍孺의 籍자는 후인이 함부로 추가한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蘇洵은 여기에서 閎孺라고 하였다.
역주13 鄒陽以愛幸悅長君 而梁王釋 : 鄒陽은 齊나라 사람이다. 梁孝王이 사람을 시켜 〈자기가 후계자가 되는 것을 반대한〉 爰盎을 죽인 일이 발각되자 梁孝王은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鄒陽으로 하여금 方略을 써서 죄가 풀리도록 하였다. 鄒陽은 이에 長安에 이르러 王美人의 오빠인 長君에게 말하였다. “가만히 듣자 하니 長君의 동생이 後宮으로서 총애를 얻음이 천하에 그만 한 사람이 없다는데 長君의 행적은 도리를 따르지 않음이 많다는군요. 지금 爰盎의 일이 막바지에 달하여 梁孝王은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고 있소. 이렇게 되면 太后께서는 울분에 피눈물을 흘리시며 화를 발할 곳이 없어 이를 갈며 귀한 신하들에게 눈을 돌릴 것이오. 저는 長君이 累卵의 위기에 빠진 것을 두려워하며, 가만히 족하가 근심되오.” 長君이 두려워하자 鄒陽은 곧 長君에게 친척을 가까이하는 道를 가지고 天子에게 말하게 하였으며 그 사건은 과연 다스려지지 않았다. 《漢書 賈鄒枚路傳》
역주14 蘇秦以牛後羞韓 而惠王按劍太息 : 蘇秦이 合從策으로 六國을 유세하니 趙 肅侯는 제후를 찾아가 맹약하게 하였다. 이에 蘇秦은 韓 宣王에게 유세하여 말하기를 “……저는 속담에 ‘닭의 부리가 될지언정 소의 꼬리는 되지 말라.[寧爲鷄口 無爲牛後]’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만일 서쪽으로 투항하여 두 손을 모으고 굴복하여 秦나라를 섬긴다면 소의 꼬리가 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대왕께서 현명함과 강대한 군대를 가지고서도 오히려 소의 꼬리라는 오명을 받게 된다면 대왕을 위하는 저로서는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라 하였다. 《史記 蘇秦列傳》 《史記》 〈韓世家〉와 〈六國年表〉에 모두 韓王은 宣惠王이라 실려 있으므로 宣王이라 하든 惠王이라 하든 모두 같은 사람이다.
역주15 范睢以無王恥秦 而昭王長跪請敎 : 范睢는 魏나라 사람으로 자는 叔이다. 먼저 魏나라 中大夫 須賈를 섬겼는데 齊나라에 사신으로 따라갔다가 齊나라와 내통하였다는 혐의를 쓰고 거의 죽을 뻔했다. 그 후 이름을 張祿으로 바꾸고 秦나라의 謁者 王稽를 통하여 離宮에서 昭王을 뵈었다. 당시 宣太后가 정권을 천단하여 그 동생인 穰侯와 華陽君을 총애하여 기용하였는데 范睢는 昭王이 이를 깨닫고 노하게 하려고 환관에게 큰소리로 “秦나라에 왕이 어디 있느냐? 秦나라에는 太后와 穰侯만이 있을 뿐이다.”라 하였다. 昭王이 이 말을 듣고 좌우를 물리치고 무릎을 꿇고 청하여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무엇으로 과인을 가르치려 하십니까?”라 하였다. 范睢가 말하기를 “예, 예.”하였으며, 이렇게 하기를 세 차례나 한 뒤에 진언하였다. 昭王이 范睢를 客卿에 임명하고 수년 뒤에는 穰侯를 대신하여 재상으로 삼고 應侯에 봉하였다. 《史記 范睢蔡澤列傳》
역주16 酈生以助秦凌漢 而沛公輟洗聽計 : 沛公이 군대를 이끌고 陳留의 교외를 지나갈 때 高陽의 傳舍에 이르렀다. 酈生이 들어가 뵈었는데 沛公은 바야흐로 침상에 앉아 두 여인에게 발을 씻기게 하면서 酈生을 만났다. 酈生은 들어가 길게 揖만 하고 절을 하지 않고 말하기를 “足下께서는 秦나라를 도와 제후를 공격하려 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제후를 거느리고 秦나라를 깨뜨리려 하시는 것입니까?”라 하였다. 沛公은 욕설을 퍼부으며 말하였다. “이 미친 선비 놈아! 천하가 秦나라에 고초를 당한 지가 오래되었다. 그래서 제후들이 서로 협력하여 秦나라를 치려고 하는데 어찌하여 秦나라를 도와 제후를 친다고 하느냐?” 酈生이 말하였다. “반드시 무리를 모으고 義兵을 합쳐서 無道한 秦나라를 없애려면 거만하게 나이 든 사람을 만나서는 안 됩니다.”라 하였다. 이에 沛公은 씻는 것을 그만두고 일어나 옷자락을 당기며 酈生을 윗자리로 끌어 앉히고 사과하였다. 《史記 酈生陸賈列傳》
역주17 蘇代 以土偶笑田文 : 蘇代는 蘇秦의 아우이다. 燕나라는 제후들에게 蘇秦 때와 같이 合從으로 화친을 맺으려 하였다. 蘇代가 齊나라로 갔는데 秦 昭王이 孟嘗君 田文을 보기를 구하자 田文이 가려고 하였으며 빈객들이 간하여도 듣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蘇代가 말하기를 “오늘 아침 제가 밖에서 오다가 나무인형[木偶人]과 흙인형[土偶人]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무인형이 말하기를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너는 허물어질 것이다.’라 하니, 흙인형이 말하기를 ‘나는 흙에서 났으니 허물어지면 흙으로 돌아갈 뿐이다. 이제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그대를 흘려보내 머물 곳이 어딘지 알지 못할 것이다.’라 하였습니다. 지금 秦나라는 호랑이나 승냥이 같은 나라인데 그대가 가려고 하니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대는 흙인형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라 하였다. 孟嘗君은 이에 그만두었다. 《史記 蘇秦列傳‧孟嘗君列傳》
역주18 楚人 以弓繳感襄王 : 楚나라 頃襄王이 楚나라 사람 중에 가벼운 화살과 가는 실로 기러기를 쏘아 맞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불러서 물어보니, 楚나라 사람은 기러기나 작은 새를 쏘아 맞히는 일은 곧 작은 화살을 쏘는 것이며, 임금은 어찌 聖人을 화살로 삼고 勇士를 실로 삼아 적당한 시기를 보아 활을 당겨 천하를 향해 쏘지 않느냐고 하였다. 또 齊‧魯‧韓‧魏나라는 모두 쏘기 쉬우며 오직 秦나라만이 큰 새로 등 뒤로는 대륙을 의지하고 살고, 얼굴은 동쪽을 향하고 서 있고, 왼쪽 어깨로 趙나라의 서남쪽을 제어하고 있고, 오른쪽 어깨로는 楚나라의 鄢과 郢을 위협하고 있고, 가슴으로 韓나라와 魏나라를 대하고 있고, 아래로는 중원의 여러 나라를 내려다보며, 살고 있는 地形은 편리하고 地勢가 유리하여 날개를 펴고 3천 리를 종횡무진하니 秦나라는 하룻밤 사이에 혼자의 힘으로는 제압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고 하여 頃襄王을 격노케 하려 했다. 頃襄王이 이에 그를 불러 말하니 마침내 선왕인 懷王이 秦나라에 감금되어 죽은 원한이 있는데다가 이제 또 앉아서 곤란을 당하고 있으니 이는 왕이 취할 태도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에 頃襄王은 제후들에게 사자를 보내어 다시 合從을 맺고 秦나라를 치려고 하였다. 《史記 楚世家》
역주19 蒯通 以娶婦悟齊相 : 蒯通은 范陽(지금의 河北 涿縣) 사람이다. 楚漢 사이의 智士이다. 曹參이 齊 悼惠王의 相이 되어 賢人을 예우하면서 蒯通에게 賓客이 되기를 청하였다. 蒯通이 齊나라의 處士 東郭先生과 梁石君을 위하여 相國을 만나 말하기를 “부인 중에 남편이 죽은 후 사흘 만에 시집가는 자와 깊이 거처하며 정절을 지키며 문을 나서지 않는 자가 있는데, 족하께서 즉시 아내를 구하고자 하신다면 어느 쪽을 취하시겠습니까?”라 하니, 말하기를 “시집가지 않는 자를 취하겠소.”라 하였다. 蒯通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신하를 구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저 東郭先生과 梁石君은 齊나라의 빼어난 선비로 은거하여 시집을 가지 않고 일찍이 절의를 낮추어 벼슬을 구한 적도 없습니다. 족하께서는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예우하도록 하십시오.”라 하였다. 曹參은 그들을 모두 上賓으로 삼았다. 《漢書 蒯伍江息夫傳》
역주20 唐魏鄭公 其初實學縱橫之說 : 魏鄭公은 魏徵(580~643)을 말하며, 자가 玄成이고 鉅鹿 曲城 사람으로 讀書를 좋아하여 通涉한 것이 많았다. 천하가 점점 혼란해지는 것을 보고 더욱 縱橫의 설에 뜻을 두어 十策으로 李密에게 써주기를 구하였으나 李密은 이 계책을 쓰지 못하였다. 나중에 李密을 따라 唐나라에 항복하였다. 太宗이 즉위하자 諫議大夫로 발탁하였다. 太宗은 政道에 전심전력을 쏟아 자주 魏徵을 내실까지 끌어들여 정치의 득실을 물었다. 魏徵 또한 자신을 알아주는 임금을 만난 것을 기뻐하여 그 쓰임을 다하고자 하였으며 못할 말이 없음을 알았다. 누차 승진하여 尙書左丞과 秘書監이 되었으며 侍中으로 승진하여 鄭國公에 봉하여졌다. 《舊唐書 魏徵傳》
역주21 龍逢比干 不獲稱良臣 : 제후들이 桀에게 반기를 들자 關龍逢이 〈皇圖〉를 가지고 桀에게 간하며 서서 떠나지를 않았다. 桀은 노하여 이에 〈皇圖〉를 불태우고 龍逢을 죽였다. 《帝王世紀》 紂는 갈수록 더욱 음란해져서 그칠 줄을 몰랐다. 比干이 말하기를 “신하 된 자는 죽음으로 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 하고는 이에 紂에게 강하게 간하였다. 紂가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聖人은 심장에 7개의 구멍이 있다고 하더라.”라 하며 比干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관찰하였다. 《史記 殷本紀》 《舊唐書》 〈魏徵傳〉에는 魏徵이 한 말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良臣은 后稷과 契(설)‧咎陶(고요) 같은 사람이다. 忠臣은 龍逢, 比干 같은 사람이다. 良臣은 몸으로 하여금 아름다운 명성을 얻게 하고, 임금이 드러난 명성을 받게 하여 자손대대 만세토록 그 복록이 무궁하나, 忠臣은 몸으로 죽임을 받아 임금은 큰 죄악에 빠지게 되고 나라도 함께 잃으며 헛되이 그 명성만 남는다.”
역주22 張儀 : 張儀(?~B.C. 309)는 魏나라 사람이다. 처음에는 일찍이 蘇秦과 함께 鬼谷先生을 사사한 적이 있었다. 蘇秦이 이미 趙나라 왕을 설득하여 合從을 약속받았으나 秦나라가 趙나라를 칠까 봐 두려워하여 〈趙나라에서〉 張儀에게 車馬와 金錢을 대주고 秦나라에 들여보냈는데 惠王이 그를 客卿으로 삼았다. 張儀는 魏나라가 上郡과 少梁을 바치게 하고 秦 惠王에게 감사하게 하자, 惠王은 그를 재상으로 삼았다. 이에 秦나라를 위해 魏나라의 재상이 되고 楚나라의 재상이 되었으며 韓나라로 갔다가 燕나라에 유세하여 連衡策을 쓰니 秦나라는 이 때문에 강하여졌다. 《史記 張儀列傳》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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