年二十七
에 始發憤爲學
하여 擧進士及
이나 皆不中
한대 悉焚常所爲文
하고 閉戶益讀書
하여 遂通六經百家之說
하여 下筆頃刻數千言
하니라
間
에 與二子軾轍來京師
하니 翰林學士歐陽脩
가 上其所著文二十二篇
하니라
旣出에 士大夫爭傳之하고 一時學者競效蘇氏爲文章하니라
宰相韓琦奏于朝
하여 한대 辭疾不至
하니 遂除秘書省校書郞
이라
乃以爲霸州文安縣主簿하여 與陳州項城令姚闢으로 同修禮書하여 爲太常因革禮一百卷하니라
賜其家縑銀二百이러니 軾辭所賜하고 求贈官하여 特贈光祿寺丞이라
소순蘇洵은 자가 명윤明允이고 미산眉山 사람이다.
27세에 비로소 분발하여 학문을 닦아 진사과進士科와 무재이등茂才異等에 응시하였으나, 모두 합격하지 못하자 평소에 지은 글들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문을 걸어 잠그고 더욱 독서讀書에 전념하여, 마침내 육경六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설에 통달하여 붓을 잡으면 잠깐 사이에 수천 언言의 글을 지어내었다.
지화至和와 가우嘉祐 연간에 소식蘇軾‧소철蘇轍 두 아들과 함께 서울에 올라오니, 한림학사 구양수歐陽脩가 소순蘇洵이 지은 글 22편을 천자天子(혹은 재상 한기韓琦)께 올렸다.
그의 글이 세상에 나오자 사대부들이 앞다투어 전하고, 한동안 학자들이 소씨蘇氏가 지은 문장을 경쟁하듯이 모방하였다.
재상 한기韓琦가 조정에 아뢰어 사인원舍人院에 불러 시험을 보게 하였는데 병으로 사양하고 이르지 아니하니, 마침내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의 관직을 제수하였다.
때마침 태상시太常寺에서 건륭建隆 이래의 예서禮書를 편찬하고 있었다.
이에 패주霸州의 문안현주부文安縣主簿로 삼아서 진주陳州의 항성령項城令인 요벽姚闢과 함께 예서를 편찬하게 하여 《태상인혁례太常因革禮》 100권을 만들었다.
책이 완성되자 바야흐로 주달하여 회보가 내려오기 전에 죽으니 58세였다.
천자께서 그의 집에 합사비단과 은 200냥을 하사하였으나, 소식이 하사한 물건을 사양하고 관직을 증직해줄 것을 요구하여 특별히 광록시승光祿寺丞의 관직을 증직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