仲尼則非吾所可評요 吾惟意遷固非聖人이나 其能如仲尼면 無一可指之失乎아
大者此旣陳議矣요 又欲寸量銖稱以摘其失이면 則煩不可擧이니 今姑告爾其尤大彰明者焉이라
遷之辭는 淳健簡直하여 足稱一家나 而乃裂取六經傳記하여 雜於其間하니 以破碎汩亂其體러라
五帝三代紀엔 多尙書之文하고 齊魯晉楚宋衛陳鄭吳越世家엔 多左傳國語之文이라
孔子世家仲尼弟子傳엔 多論語之文이라 夫尙書左傳國語論語之文이 非不善也로되 雜之則不善也니라
今夫繡繪錦縠은 衣服之窮美者也나 尺寸而割之하여 錯而紉之以爲服이면 則綈繒之不若이니 遷之書가 無乃類是乎아
吾不知遷이 於紀 於表 於書 於世家 於列傳에 所謂太史公者가 果其父耶아 抑其身耶아
今又剽他人之言以足之요 彼旣言矣에 申言之하니 何益이리오
或曰 遷固之失旣爾나 遷固之後에 爲史者多矣니 范曄陳壽는 實巨擘焉이나 然이나 亦有失乎아
曰 烏免哉리오 曄之史之傳에 若酷吏宦者列女獨行에 多失其人이라
又其是非頗與聖人異
하여 엔 則戒以宋襄之違天
이며 엔 則惜張騫班勇之遺佛書
라
夫三國鼎立稱帝하며 魏之不能有吳蜀은 猶吳蜀之不能有魏也라
壽獨以帝當魏하고 而以臣視吳蜀이니 吳蜀於魏何有而然哉오 此壽之失也니라
噫라 固譏遷失이나 而固亦未爲得이요 曄譏固失이나 而曄益甚이며 至壽復爾라
史之才誠難矣라 後之史는 宜以是爲監하여 無徒譏之也니라
注
제가諸家를 평하여 판정함이 혹리酷吏가 옥사獄事를 판결하는 것 같다.
혹자가 물었다. “그대가 역사歷史에 대해 논한 것 중 중니仲尼, 사마천司馬遷, 반고班固의 깊은 법과 숨은 뜻을 찾아낸 것은 좋다.
중니仲尼는 내가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다만 생각하기를,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는 성인聖人이 아니지만, 〈그들이〉 중니仲尼와 같을 수 있다면 하나도 지적할 만한 실수가 없겠는가?”
내가 말했다. “사마천司馬遷은 잡설雜說을 좋아하여 도道의 옳고 그른 곳을 돌아보지 않았으며, 반고班固는 아첨과 거짓을 귀하게 여겼고 죽음으로 의義를 지킴을 천하게 여겼다.
큰 것은 여기서 이미 의논을 펼쳤으며, 또한 아주 미세한 것까지 따져서 그 과실을 가려내려고 한다면 번거로워 들 수가 없으니, 지금은 일단 그대에게 그 가운데 더욱 크고 환히 드러난 것만을 일러주겠다.
사마천司馬遷의 문사文辭는 순박하고 굳세며 간략하고 곧아 일가一家를 이루었다고 할 만하나, 육경六經과 전기傳記를 찢어서 취하여 그 사이에다 섞어 넣어 그 체體를 깨뜨리고 부수어 어지럽게 하였다.
〈오제기五帝紀〉와 〈삼대기三代紀〉에는 《상서尙書》의 문장이 많고, 〈제세가齊世家〉, 〈노세가魯世家〉, 〈진세가晉世家〉, 〈초세가楚世家〉, 〈송세가宋世家〉, 〈위세가衛世家〉, 〈진세가陳世家〉, 〈정세가鄭世家〉, 〈오세가吳世家〉, 〈월세가越世家〉에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과 《국어國語》의 문장이 많으며, 〈공자세가孔子世家〉와 〈중니제자전仲尼弟子傳〉에는 《논어論語》의 문장이 많다.
대체로 《상서尙書》,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국어國語》, 《논어論語》의 문장이 훌륭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섞어놓아서 훌륭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 저 그림을 수놓은 비단은 의복衣服 가운데 매우 아름다운 것인데 한 자 한 치씩 잘라 섞어서 이어 옷을 만든다면 깁비단만 못하게 된다. 사마천司馬遷의 책이 이와 비슷하지 않겠는가!
그의 〈자서自敍〉에서는 “담談이 태사공太史公이 되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태사공太史公이 이릉李陵의 화禍를 당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아버지와 칭호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선유先儒들은 오히려 말하기를 반고班固가 반표班彪의 이름을 없앤 것은 사마천司馬遷이 아름다움을 사마담司馬談에게 양보한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사마천司馬遷이 〈기紀〉, 〈표表〉, 〈세가世家〉, 〈열전列傳〉에서 이른바 ‘태사공太史公’이란 것이 과연 그의 아버지인지 아니면 그 자신인지 모른다.
반고班固는 한漢나라에 대해 찬술하면서 창업創業에서 절필하는 사이에 사마천司馬遷이 논한 것을 답습하여 그 기록에 보탠 것이 반이 넘는다.
또한 현자를 기리고 불초한 자를 폄훼함에 자기의 뜻을 성실히 발휘하였는데 자기의 뜻을 다하였을 뿐이다.
이제 또 다른 사람의 말을 표절하여 거기에 보태었으며, 저기서 이미 말하였는데 거듭 말을 하니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사마천司馬遷과 양웅揚雄의 전기를 쓰면서 모두 그들이 썼던 〈자서自敍〉에서 취하여 자잘하게 그 세계世系를 왜곡하여 기술하였다.
반고班固가 다른 기록에서 어찌 이와 같이 갖추었겠는가!
저 사마천司馬遷과 양웅揚雄의 〈자서〉라면 괜찮으나 자기가 그것을 그대로 쓴 것은 그릇된 것이다.
혹자가 말하였다.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의 과실은 이미 그렇다 치더라도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의 후에도 역사를 집필한 자가 많은데, 범엽范曄과 진수陳壽가 실로 으뜸이지만 또한 과실이 있는가?”
내가 말하였다. “어찌 면하겠는가! 범엽范曄의 사서史書(《후한서後漢書》)의 전傳 가운데 〈혹리전酷吏傳〉, 〈환자전宦者傳〉, 〈열녀전列女傳〉, 〈독행전獨行傳〉 같은 것은 들어가야 할 인물들을 많이 빠뜨렸다.
간혹 더욱 심한 것은 동선董宣은 충의忠毅한데 〈혹리전酷吏傳〉에 개괄하였으며, 정중鄭衆과 여강呂强은 청렴하고 명민하며 곧고 진실된데도 〈환자전宦者傳〉에 개괄하였으며, 채염蔡琰은 치욕을 참아가며 오랑캐의 처가 되었는데 〈열녀전烈女傳〉에 개괄하였으며, 이선李善과 왕돈王忳은 인의仁義가 깊고 두터운데 〈독행전獨行傳〉에 개괄하여 넣었으니,
《한서漢書》에서 장탕張湯을 〈혹리전酷吏傳〉에 수록하지 않고 《사기史記》에서 요씨姚氏, 두씨杜氏, 구씨仇氏, 조씨趙氏의 무리를 〈유협전遊俠傳〉에 수록하지 않은 것과는 거리가 멀도다.
또한 그 시비是非를 가림이 자못 성인聖人과는 다르며, 두무竇武와 하진何進을 논한 것은 송 양공宋 襄公이 하늘을 어긴 것을 가지고 경계하였으며, 서역西域을 논한 것은 장건張騫과 반용班勇이 불서佛書를 빠뜨린 것을 애석히 여겼다.
이는 구차하게 화를 면하고자 하는 것을 하늘의 뜻에 순응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인가?
중국中國이 성인聖人을 배반하고 오랑캐의 신神을 받들겠는가? 이는 범엽范曄의 실수이다.
진수陳壽가 삼국三國의 역사를 기록할 때 위魏나라는 〈본기本紀〉에 넣고 오吳나라와 촉蜀나라는 〈열전列傳〉에 넣었다.
대체로 삼국三國은 정립鼎立하여 칭제稱帝하였으며, 위魏나라가 오吳나라와 촉蜀나라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은 오吳나라와 촉蜀나라가 위魏나라를 가질 수 없었던 것과 같다.
진수陳壽는 유독 위魏나라를 황제皇帝에 해당시키고, 오吳나라와 촉蜀나라를 신하臣下로 간주하였으니, 오吳나라와 촉蜀나라가 위魏나라에 무슨 〈권위가〉 있어서 그렇게 하였던가? 이는 진수陳壽의 실수이다.”
아! 반고班固는 사마천司馬遷의 과실을 나무랐지만 반고班固 또한 제대로 터득하지 못하였고, 범엽范曄은 반고班固의 과실을 나무랐지만 범엽范曄은 더욱 심하였으며, 진수陳壽에 이르러 되풀이되었을 따름이다.
역사의 재능은 실로 어렵도다! 나중의 역사는 마땅히 이를 거울삼아 공연히 나무라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