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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洵(1)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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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揣料匈奴脇制中國之狀하여 極盡事理하니 非當時熟覩而經算者 安能道此리오
中國內也 外也
憂在內者本이나 憂在外者末也
夫天下無內憂 必有外懼
本旣固矣 盍釋其末以息肩乎 曰未也
古者 夷狄憂在外 憂在內
釋其末可也 而愚不識方今夷狄之憂爲末也
古者 夷狄之勢 大弱則臣하고 小弱則遁하며 大盛則侵하고 小盛則掠하니라
吾兵良하고 而食足하며 將賢하고 而士勇하면 則患不中原이라
如是 而曰外憂可也라하니라
今之蠻夷 姑無望其臣與遁하고 求其志止於侵掠이나 而不可得也
驕恣 爲日久矣하여
昔者 幸吾有하여 出不遜語하여 以撼中國이라
天子 不忍使邊民으로 重困於鋒鏑하시니 是以 虜日益驕하여하니 迨今하여는 凡數十百萬이로되 而猶慊然未滿其欲하여 視中國 如外府하니라
然則其勢 又何止數百萬也리오
夫賄益多 則賦斂不得不重하고 賦斂重이면 則民不得不殘이라
雖名爲息民이나 而其實 愛其死而殘其生也
名爲外憂 而其實憂在內也니라
外憂之不去라도 聖人 猶且恥之한대 內憂而不爲之計하니 愚不知天下之所以久安而無變也
古者 匈奴之彊 不過이라
當暴秦刻剝하여 劉項戰奪之後 中國溘然矣
以今度之컨대 彼宜遂入踐中原이면 如決大河潰蟻壤이리라
이나 卒不能越其疆하여 以有吾尺寸之地
何則 中原之彊 固皆百倍於匈奴
雖積衰新造 而猶足以制之也
五代之際 中原無君하여 苟一時之利하여 以子行事하며 割幽燕之地하여 以資其强大
孺子繼立이나 하니 匈奴掃境來寇어늘 兵不血刃하고 而京師不守하여 天下被其禍니라
匈奴 自是 始有輕中原之心하여 以爲可得而取矣니라
及吾宋景德中하여 大擧來寇하니 一戰而却之하시고 遂與之盟以和하니라
夫人之情 勝則狃하고 狃則敗하고 敗則懲하고 懲則勝이라
匈奴 狃石晉之勝하여 而有景德之敗하고 懲景德之敗하리니 而愚未知其所勝이나 甚可懼也
雖然이나 數十年之間 能以無大變者 何也
匈奴之謀 必曰 我百戰而勝人하여 人雖屈이라도 而我亦勞니라
馳一介入中國하여 以形凌之하고 以勢邀之 歲得金錢 數十百萬이라
如此數十歲 我益數百千萬이요 而中國 損數百千萬이니
吾日以富하고 中國 日以貧하리니 然後 足以有爲也라하리라
天生北狄 謂之하니 投骨於地 狺然而爭者 犬之常也
今則不然하니 邊境之上 豈無可乘之釁
使之來寇 大足以奪一郡하고 小亦足以殺掠數千人이나 而彼不以動其心者 此其志非小也
將以蓄其銳하여 而伺吾隙以伸其所大欲하니 不忍以小利而敗其遠謀니라
匈奴之勢 日長炎炎한대 今也 柔而養之하여 以冀其卒無大變하니 其亦惑矣
且今中國之所以竭生民之力하여 以奉其所欲하되 而猶恐恐焉하여 懼一物之不稱其意者 非謂中國之力 不足以支其怒也
이나 以愚度之컨대 當今中國 雖萬無有如石晉可乘之勢者하고 匈奴之力 雖足以犯邊이라도이나 今十數年間 吾可以必無犯邊之憂
何也 非畏吾也 其志不止犯邊也
其志不止犯邊하고 而力又未足以成其所欲爲 則其心 惟恐吾之一旦絶其好하여 以失吾之厚賂也
然而 驕傲하여 不肯少屈者 何也
其意曰 邀之而後 固也라하니라
鷙鳥將擊 必匿其形이라
匈奴之君臣 莫不張形勢以夸我
其志不欲戰明矣
하고 하니라 匈奴 誠欲與吾戰耶
曩者 하고 하고 한대 亦可乘之勢矣
이나 終以不動이니 則其志之不欲戰又明矣
彼不欲戰하되 而我遂不與戰이면 則彼旣得其志矣
於敵反是라하니 今無乃與此異乎
且匈奴之力 旣未足以伸其所大欲하고 而奪一郡하고 殺掠數千人之利 彼又不以動其心이라
則我勿賂而已
勿賂하여 而彼以爲辭 則對曰 爾何功於吾하여 歲欲吾賂 吾有戰而已 賂不可得也라하니라
雖然이나 天下之人 必曰 此愚人之計也
天下孰不知賂之爲害하고 而勿賂之爲利 顧勢不可耳라하니라
愚以爲不然이라
當今夷狄之勢之勢
昔者 高祖 急於滅項籍이라 擧數千里之地하여 以王諸將이라
項籍死 天下定이나 而諸將之地 因遂不可削이라
當是時 이라
高祖 懼其且爲變하여 大封吳楚齊趙同姓之國하여 以制之
旣而 하되 而吳楚齊趙之强하여 反無以制
當是時 諸侯王 雖名爲臣이나 而其實 莫不有帝制之心이라
膠東膠西濟南 又從而和之하여 於是 擅爵人하고 赦死罪하며하고 하니 匕首交於京師
罪至彰也하여 勢至逼也
이나 當時之人 猶且徜徉容與하여 若不足慮
月不圖歲하고 朝不計夕하되 循循而摩之하고 煦煦而吹之하여 幸而無大變이라
以及於孝景之世하여 有謀臣 始議削諸侯地하여 以損其權이라하니라
天下皆曰 諸侯必且反이라하니라
曰 固也
削亦反이요 不削이라도 亦反이라
削之 則反疾而禍小 不削이면 則反遲而禍大
吾懼其不及今反也라하니라
天下皆曰晁錯라하니라
七國之禍 期於不免이라
與其發於遠而禍大 不若發於近而禍小
以小禍易大禍 雖三尺童子라도 皆知其當然이라
而其所以不與錯者 彼皆不知其勢將有遠禍
與知其勢將有遠禍 而度己不及見하여 謂可以寄之後人하고 以苟免吾身者也
然則錯爲一身謀 則愚 而爲天下謀 則智니라
人君 又安可捨天下之謀하여 而用一身之謀哉
匈奴之彊 不減於七國하되 而天下之人 又用當時之議하여 因循維持하며 以至於今 方且以爲無事
而愚以爲天下之大計 不如勿賂
勿賂 則變疾而禍小 賂之 則變遲而禍大
畏其疾也 不若畏其大 樂其遲也 不若樂其小
天下之勢 如坐弊船之中하여 駸駸乎將入於深淵이니 不及其尙淺也 舍之하여 而求所以自生之道
而以濡足爲解者 固夫覆溺之道也
聖人 除患於未萌然後 能轉禍而爲福이라
今也 不幸養하여 以至此하되 而近憂小患 又憚하여 而不決하니 則是遠憂大患終不可去也
然則宏遠深切之謀 固不能合庸人之意
此晁錯所以爲愚也
雖然이나 錯之謀 猶有遺憾이라
何者 錯知七國必反이나 而不爲備反之計
變起騷動이라
今者 匈奴之禍 又不若七國之難制
七國反 中原半爲敵國이요 匈奴叛 中國以全制其後 此又易爲謀也
然則謀之奈何
曰 匈奴之計 不過三이라
一曰聲이요 二曰形이요 三曰實이라
匈奴謂中國怯久矣라하여 以吾爲終不敢與之抗하고 且其心 嘗欲固前好하여 而得厚賂以養其力이라
今也遽絶之 彼必曰戰而勝 不如坐而得賂之爲利也라하니라
華人怯하니 吾可以先聲으로 脇之 彼將復賂我
於是 宣言於遠近하여 我將以某日 圍某所하고 以某日 攻某所
如此謂之聲이라하니라
命邊郡하여 休士卒하고 偃旗鼓하여 寂然若不聞其聲이라
聲旣不能動이면 則彼之計 將出於形이라
除道翦棘하여 多爲疑兵以臨吾城이니 如此謂之形이라하니라
深溝固壘하고 淸野以待하여 寂然若不見其形이라
形又不能動이면 則技止此矣
將遂練兵秣馬하여 以出於實이라
實而與之戰이면 破之易耳
彼之計 必先出於聲與形而後 出於實者
出於聲與形 期我懼而以重賂請和也 出於實 不得已而與我戰이니 以幸一時之勝也
夫勇者 可以施之於怯이요 不可以施之於智
今夫叫呼跳踉하여 以氣先者 世之所謂善鬪者也
雖然이나 蓄全力以待之 則未始不勝이라
彼叫呼者 聲也 跳踉者 形也
無以待之 則聲與形者 亦足以乘人於卒이나 不然이면 徒自弊其力於無用之地하여 是以 不能勝也
節度宣武軍할새 忌公嚴整하여 使來告曰 吾將假道伐滑이라하거늘
曰 爾能越吾界爲盜耶 有以相待 無爲虛言이라하니라
滑帥 告急하니 使謂曰 吾在此하니 公安無恐이라하니라
或告除道翦棘하니 兵且至矣라한대 曰 兵來不除道也라하니라
師古 詐窮하여 遷延以遁이니라
愚故曰 彼計出於聲與形이나 而不能動하니 則技止此矣
與之戰이면 破之易耳라하니라
方今匈奴之君 有內難新立하니 意其必易與인저
隣國之難 霸王之資也
且天與不取 將受其弊
數年之後 大抵皆冠하여 血氣方剛이면 漢之傅相 以病而賜罷하리니 當是之時 而欲爲安이면 雖堯舜이라도 不能이라하니라
嗚呼 是七國之勢也
蘇氏父子之論虜情 大略本此


04. 을 살피는 것에 대한 논문
흉노匈奴중국中國을 협박하고 억제하는 상황을 요량하여 모든 사리事理를 다했으니, 당시 자세히 보고 계획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중국中國내부內部요, 사방 이적夷狄외부外部이다.
우환憂患이 내부에 있는 것이 근본적根本的인 문제이고, 우환이 외부에 있는 것은 지엽적枝葉的인 문제이다.
대저 천하에 내우內憂가 없으면 반드시 외환外患이 있기 마련이다.
근본이 견고하면, 어찌 그 지엽적인 것을 내려놓고 쉬지 않겠는가? 대답은 “아직은 아니다.”라고 하겠다.
옛날 이적夷狄에 대한 근심은 외적外的인 것이었지만, 지금 이적夷狄에 대한 근심은 내적內的인 것이다.
그 지엽적인 것을 내려놓는 것은 괜찮지만, 나는 지금의 이적夷狄에 대한 근심을 지엽적인 것이라 인식하지 않는다.
지난날 이적夷狄의 세력이 크게 약했을 때에는 신하로 복종하였고 조금 약했을 때에는 달아나 숨었으며, 그들의 세력이 크게 강성했을 때에는 침략을 해왔고 조금 강성했을 때에는 노략질을 하였다.
우리의 군대가 정예화되고 식량이 풍족하며, 장수가 현명하고 군사가 용감하면, 환난이 중원中原에 이르지 않는다.
이와 같은 상황이면 외우外憂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지금의 만이蠻夷에게는 잠시라도 그들이 신하로 복종하거나 달아나 숨기를 바랄 수 없고, 그들의 뜻이 침략하여 노략질에 그치기를 바라지만 기대할 수가 없다.
북쪽 오랑캐(거란契丹)의 교만驕慢함과 방자放恣함은 오래되어, 해마다 금전과 비단을 요구하는 것이 수십만을 헤아린다.
지난날 우리에게 있은 서하西夏의 변란을 다행으로 여겨 불손한 말을 하면서 우리 중국을 흔들었다.
천자께서 차마 변방 백성들을 또다시 전쟁에 시달리게 할 수 없으시니, 이 때문에 오랑캐들은 나날이 교만해져 요구하는 세폐歲幣 또한 나날이 늘어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수십 수백만이나 되는데도 오히려 불만스럽게 그들의 욕심을 아직 다 채우지 못한 듯, 중국中國을 마치 외부의 창고나 되는 것처럼 본다.
그렇다면 그 형세상 또 어찌 수백만에만 그치겠는가?
세폐歲幣가 많아지면 거두는 세금이 무겁지 않을 수 없고, 세금이 무거워지면 백성들이 손상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비록 명분이야 백성들을 쉬게 한다 하지만, 그 실상은 백성들의 죽음을 아끼려다 그 삶을 손상시키는 것이다.
이름은 외우外憂라 하지만 실상은 내우內憂인 것이다.
외우外憂를 제거하지 못해도 성인聖人은 오히려 부끄럽게 여겼는데, 내우內憂가 생겼는데도 해결할 계책을 세우지 않으니, 나는 천하가 오래도록 편안하면서 변란이 없을지 모르겠다.
옛날 흉노匈奴의 강성함은 묵특선우冒顿單于를 능가한 적은 없다.
당시 포악한 나라가 가혹하게 착취하자, 유방劉邦항우項羽가 쟁탈전을 벌인 뒤에 중국中國은 극도로 쇠약하였다.
지금의 입장에서 헤아려보건대, 저 흉노匈奴가 당시 중원中原을 쳐들어왔다면 마치 큰 강물이 터져 흘러 개미 둑을 무너뜨리듯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그들의 국경을 넘어서 한 치의 우리 강토를 소유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중원中原의 강함이 본래 모두 흉노匈奴보다 백 배 더 강하였기 때문이다.
중원中原이 비록 쇠약함이 쌓이고 새롭게 국가가 세워졌지만, 그래도 충분히 그들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대五代 때에는 중원中原에 주인이 없어, 후진後晉석경당石敬瑭이 구차하게 일시적인 이익을 탐하여 거란契丹을 어버이로 섬기며, 유연幽燕의 땅을 떼어 바쳐 그들의 강대함을 도왔다.
아들이 뒤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대신大臣이 밖으로 배신하니 거란契丹이 국경의 군대를 끌고 침입해 왔거늘, 병사는 싸우지도 않고 경사京師는 지키지도 않아 온 천하가 그 를 입게 되었다.
거란契丹은 이때부터 비로소 중원中原을 얕보는 마음이 생겨, 중원中原을 차지할 수 있다고 여겼다.
우리 나라 경덕景德 연간年間에 이르러 대거 침입해 오니 장성황제章聖皇帝(진종眞宗)께서 한 차례 싸워서 그들을 물리치시고, 마침내 그들과 맹약盟約하여 강화强化를 맺으셨다.
대저 사람의 마음이란, 승리하면 탐닉에 빠지고, 탐닉에 빠지게 되면 패배하고, 패배하면 경계하게 되고, 경계하면 승리하게 된다.
거란契丹후진後晉의 승리를 탐닉하다가 경덕景德 연간年間의 패배가 있었고, 경덕景德 연간年間의 패배를 경계할 것이니, 나는 그들이 승리할지는 알 수 없지만 심히 두렵다.
비록 그러하나 수십 년간 큰 변란이 없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거란契丹이 꾀하는 것은 틀림없이 “우리가 백 번을 싸워 상대를 이겨서, 상대가 굴복하더라도 우리 또한 수고로울 것이다.
사신使臣 한 사람을 중국에 보내어 형세形勢로써 깔보고 세력勢力으로 요구하면, 해마다 얻는 금전이 수십 수백만 냥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수십 년을 하면, 우리에게는 수백 수천만의 이익利益이 생길 것이고, 중국은 수백 수천만의 손해損害가 생길 것이다.
우리는 나날이 부유해지는 반면 중국은 나날이 빈곤해질 것이니, 그런 다음에 족히 할 일이 있을 것이다.”라 할 것이다.
천성적인 북적北狄견융犬戎이라 하는데, 땅에 뼈다귀를 던져주면 으르렁거리며 다투는 것이 개의 일상적 모습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변경邊境에서 어찌 틈을 엿보지 않겠는가?
가령 그들이 침입해 오면, 크게는 족히 한 개의 정도는 뺏을 만하고, 작게도 족히 수천 사람을 죽이거나 약탈할 만하지만, 저들이 그것만으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은 그들의 뜻이 작지 않아서이다.
장차 그 예기銳氣를 축적하여 우리의 틈을 엿보아 그들의 큰 야욕을 펴려 하는 것이니, 작은 이익을 참아서 그들의 원대한 계획을 망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옛사람들의 말에 “어린 뱀일 때 꺾어놓지 않으면 큰 뱀이 되면 어떻게 하리오?”라는 말이 있다.
거란契丹의 세력은 나날이 커지고 있는데 지금 유화책宥和策으로 그들의 힘을 길러주면서 끝까지 그들의 큰 변란이 없기를 바라니, 그 또한 의혹스럽다.
게다가 지금 중국은 백성들의 힘을 다해 그들이 바라는 것을 받들되, 오히려 벌벌 떨며 물건 하나라도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이유가 중국의 힘이 족히 그들의 분노를 견디지 못할 것이라 여긴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내가 헤아려보건대, 지금 중국은 절대로 후진後晉석경당石敬瑭처럼 틈탈 수 있는 형세가 없고, 거란契丹의 힘이 변방을 침범하기에 넉넉하다 할지라도 지금부터 십수 년간에는 우리는 변방 침입을 걱정할 필요가 결코 없을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우리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뜻이 변방 침입에만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뜻이 변방 침입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힘 또한 그들이 하고 싶은 것을 이루기에 아직 부족하다면, 그들의 마음은 오직 우리가 하루아침에 우호관계를 끊어서 우리의 많은 세폐歲幣를 잃을까 걱정할 뿐이다.
그렇지만 오만방자하여 조금도 굽히려 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들의 의도는 〈우리를 협박하여〉 요구한 다음에 〈우호관계가〉 공고해진다고 여기는 것이다.
맹금猛禽이 장차 공격을 하려 할 때에는 반드시 그 공격의 모습을 숨기는 법이다.
지난날 묵특선우冒顿單于나라를 공격하고자, 나라 사신이 당도하면 그때마다 건장한 병사와 말을 숨겼다.
그러므로 병법兵法에 “상대가 하는 말이 비굴하면 진격進擊을 하려는 것이고, 상대가 하는 말이 강경하면 퇴각退却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거란契丹의 임금과 신하들이 형세를 과장해서 우리에게 허세를 부리지 않음이 없다.
이것은 그들의 뜻이 싸우고 싶지 않다는 것이 분명하다.
오왕吳王 합려闔閭나라를 침입할 때에 나라와 나라를 이용하였고, 월왕越王 구천句踐나라를 침입할 때에 나라와 나라를 이용하였으니, 거란契丹이 진실로 우리와 싸우려 하겠는가?
지난날 섬서陝西에서는 원호元昊의 반란이 있었고, 하삭河朔에서는 왕칙王則의 변란이 있었으며, 영남嶺南에서는 농지고儂智高의 난이 있었는데, 이러한 일들은 또한 틈을 엿볼 만한 기회였다.
그러나 끝내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그들의 뜻은 전쟁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또한 분명하다.
아! 저들이 싸우려 하지 않는데 우리마저도 싸우려 하지 않으면, 저들은 이미 그들의 뜻을 얻은 것이다.
병법兵法에 “그들이 하고 싶은 일에 그들을 써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하고,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은 버려야 한다.
적에 있어서는 이와 반대로 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지금이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게다가 거란契丹의 힘도 그들의 큰 야욕을 이루기에 아직 부족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을 빼앗거나 수천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여 생기는 이익에는 저들 또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폐歲幣를 주지 않으면 될 뿐이다.
세폐歲幣를 주지 않아서 저들이 구실거리로 삼으면 “너희들이 우리에게 무슨 공로가 있어 해마다 우리에게 세폐歲幣를 요구한다 말인가? 우리에겐 전쟁이 있을 뿐이요 세폐歲幣는 더 이상 얻을 수 없다.”라고 대답하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천하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계책이다.
천하에 어느 누가 세폐歲幣를 주는 폐해를 모르고 세폐歲幣를 주지 않는 이득을 모르겠는가? 다만 형세形勢가 부득이해서 그렇게 할 뿐이다.”라고 할 것이다.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지금 이적夷狄의 형세는 칠국七國의 형세와 같다.
지난날 한 고조漢 高祖항우項羽를 치는 데에 급하였기 때문에, 수천 리의 땅을 들어 여러 장수들을 으로 삼았다.
항우項羽가 죽자 천하는 안정되었지만, 여러 장수들의 땅은 끝내 삭감할 수가 없었다.
이때에 유씨劉氏가 아니면서 왕이 된 자가 여덟 나라였다.
한 고조漢 高祖는 그들이 장차 변란을 일으킬까 걱정하였으므로, 같은 동성同姓의 제후국을 크게 봉하여 그들을 견제하였다.
얼마 후 한신韓信팽월彭越영포英布노관盧綰은 모두 주살되었지만, 같은 동성同姓 제후국이 강해져 도리어 그들을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이때 제후왕諸侯王들은 이름은 신하라 하였지만, 실제로는 황제가 되고자 하는 야심이 없지 않았다.
교동膠東교서膠西제남왕濟南王들도 그들을 따라 호응하여, 이에 멋대로 사람들에게 작위爵位를 주고, 사형수를 사면하며, 수레 덮개를 누런 비단으로 장식하고, 자객刺客을 보내어 공공연히 암살을 시도하니, 비수匕首경사京師에서 횡행하였다.
그 죄상이 확연히 드러나 형세가 지극히 긴박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여전히 유유자적하면서 족히 걱정할 것이 못 되는 것처럼 하였다.
한 달이 지나면 한 해를 생각할 수 없고, 아침이면 저녁을 생각할 수 없는데도, 공손한 마음으로 어루만지고 작은 은혜를 베풀며 추켜세워서, 요행히 큰 변란은 없었다.
경제시대景帝時代에 이르러서 책략가 가운데 조조晁錯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제후왕諸侯王들의 땅을 삭감하여 그들의 권력을 줄여야 한다고 논의하였다.
그러자 천하 사람들은 모두가 “제후들이 틀림없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 하였다.
조조晁錯는 “분명하다.
땅을 삭감하여도 반란할 것이요, 삭감하지 않아도 반란할 것이다.
삭감하면 반란은 빨라지겠지만 그 는 작을 것이요, 삭감하지 않으면 반란은 늦어지겠지만 그 는 클 것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이 지금 반란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천하 사람들은 모두 조조晁錯를 어리석다 하였다.
아! 칠국七國는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반란이 늦게 일어나 그 가 커지는 것보다는 빨리 일어나 가 작은 것이 더 낫다.
작은 로 큰 를 바꾸는 것은 삼척동자三尺童子라도 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함을 안다.
그러나 그들이 조조晁錯의 의견에 찬성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 모두가 형세상 먼 뒷날에 환란이 생길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 형세상 먼 뒷날에 환란이 생길 것을 알았더라도 자신은 그 화를 보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여, 후인에게 맡기고 자신의 몸은 일시적으로 면할 수 있어서 한 말이다.
그렇다면 조조晁錯는 자기 일신一身을 위한 계책으로는 어리석었지만, 천하天下를 위한 계책으로는 지혜로웠다.
임금이 되어서 또한 어찌 천하를 위한 계책을 버리고 일신을 위한 계책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지금 흉노匈奴의 강성함은 칠국七國보다 못하지 않는데도, 천하 사람들은 또 당시의 의논으로 답습하고 지키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무사하기를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천하의 가장 좋은 계책은 세폐歲幣를 주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세폐歲幣를 주지 않으면 변란은 빨라지겠지만 그 는 작을 것이요, 세폐歲幣를 주면 변란은 늦어지겠지만 그 는 클 것이다.
변란이 빨라지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그 환란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요, 변란이 늦어지는 것을 좋아하기보다는 그 환란이 작아지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지금 천하의 형세는 마치 부서진 배 속에 앉아 점점 깊은 물속으로 침몰해가는 것과 같으니, 배가 아직 얕은 곳에 있을 때에 배를 버리고 스스로 살 수 있는 방도를 찾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러나 발이 젖는 것쯤으로 이해를 해버리면, 이는 분명 배가 뒤집혀 익사로 가는 길이 될 것이다.
성인聖人은 싹이 트기 전에 우환憂患을 제거하여 를 돌려 으로 만들 수 있었다.
지금은 불행히도 그들을 길러서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도 가까운 근심과 작은 우환을 또 꺼려하며 척결하지 않으니, 그렇다면 먼 근심과 큰 우환은 끝내 제거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적벽赤壁의 싸움에 오직 주유周瑜여몽呂蒙만이 자신들이 승리할 것임을 알았고, 나라를 치는 일에 양호羊祜장화張華만이 옳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원대遠大하고 심오深奧한 계책은 진실로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과 합치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조조晁錯를 어리석게 여긴 이유이다.
비록 그러하지만 조조晁錯의 계책에도 오히려 유감이 있다.
무엇인가? 조조晁錯칠국七國이 반드시 모반할 것을 알았지만, 모반을 대비한 계책은 세우지 않았다.
산동山東에서 변란이 일어나면 관내關內가 소란스러워진다.
지금 거란契丹는 또한 칠국七國의 반란처럼 제압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칠국七國의 반란은 중원中原의 절반이 적국敵國이 되는 것이요, 거란契丹의 반란은 중국中國전력全力으로 그 뒤에서 제압하면 되는 것이니, 이것 또한 쉽게 꾀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꾀함이 어떠해야 할까?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거란契丹의 계책은 세 가지에 불과하다.
첫째가 이요, 둘째가 이며, 셋째가 이다.
거란契丹은 중국이 겁을 먹은 지 오래되어 우리가 끝내 그들에게 감히 대항하지 못할 것이라 여기고, 또 그들의 마음은 늘 이전의 우호관계를 공고히 해서 많은 세폐歲幣를 받아 그들의 힘을 기르고자 한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그들과의 우호관계를 끊어버리면, 저들은 틀림없이 싸워서 이기는 것보다는 앉아서 많은 세폐歲幣를 얻는 이익이 더 낫다고 할 것이다.
중화中華 사람들이 겁이 많으니 우리가 먼저 성세聲勢로 그들을 협박하면 저들은 다시 우리에게 세폐歲幣를 바칠 것이다.
이에 멀고 가까운 곳에 선포하여, 우리는 장차 모일某日모소某所를 포위하고 모일某日모소某所를 공격할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은 것을 이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변방의 에 명을 내려 병사들을 휴양시키고 깃발을 눕혀두고 북소리를 멈추고서 조용히 그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한다.
성세聲勢로 우리를 동요시킬 수 없으면 저들의 계책은 장차 형세形勢로 나올 것이다.
길을 내고 가시를 제거하여 많은 의병疑兵을 만들어 우리의 을 압박해 올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을 이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견고히 하고 들판의 곡식을 깨끗이 없애고 기다리면서 조용히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한다.
형세形勢로도 우리를 동요시킬 수 없으면, 그들의 수단은 여기에서 멈출 것이다.
그러면 장차 곧 병사를 조련하고 말을 먹이고서 실력實力으로 나올 것이다.
실력으로 나와 그들과 싸우면 그들을 격파하는 것은 쉬울 따름이다.
저들의 계획은 반드시 먼저 성세聲勢형세形勢로 나온 이후에 실력實力으로 나오는 것이다.
성세聲勢형세形勢로 나올 때에는 우리가 두려워 많은 세폐歲幣로 우호관계를 청할 것을 기대한 것이고, 실력實力으로 나올 때에는 부득이하여 우리와 싸우는 것이니 일시의 승리마저도 요행으로 여길 것이다.
용감勇敢한 사람은 겁약怯弱한 사람에게 그 용감함을 펼 수 있는 것이요, 지혜智慧로운 사람에는 그것을 펼 수 없다.
지금 소리 지르고 날뛰면서 기세氣勢를 앞세우는 사람은 이른바 세상에서 싸움질을 잘하는 사람이다.
그렇다 하나, 우리가 전력全力을 모아 그들에 맞선다면 이기지 못한다고도 할 수 없다.
저들이 소리 지르는 것은 이요, 날뛰는 것은 이다.
그것에 맞설 방법이 없으면, 으로도 충분히 창졸지간에 남의 틈을 탈 수가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공연히 스스로 쓸모없는 곳에 그 힘을 소모하게 되어, 이 때문에 이길 수 없게 된다.”
한홍韓弘선무군절도사宣武軍節度使로 있을 때, 이사고李師古한홍韓弘엄정嚴整함을 시기하여 사람을 보내어 알리기를 “내 장차 길을 빌려 활주滑州를 치려고 하오.”라고 하거늘,
한홍韓弘이 “그대가 내 경계를 넘어 도둑질을 하겠단 말이오? 상대할 방법이 있으니, 헛소리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활주滑州의 장수가 한홍韓弘에게 급박함을 알리니, 한홍韓弘이 사람을 보내어 “내가 여기에 있으니 그대는 편안히 있으면서 두려워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사고李師古가 길을 내고 가시를 제거하니, 장차 군대가 이를 것이라 알렸는데, 한홍韓弘이 “군대가 오려고 길을 내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사고李師古는 속임수가 다하자 시간을 끌다가 되돌아갔다.
나는 그래서 “저들의 계획이 으로 나왔지만 우리를 동요시킬 수 없으니 그 수법이 여기에서 멈추었다.
그와 싸웠다면 그를 격파하는 것은 쉬울 따름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지금 거란契丹의 임금에게는 내부에 어려움이 있고 막 임금 자리에 올랐으니, 생각건대 그들을 대적하기에 틀림없이 쉬울 것이다.
이웃나라의 환난患難은 우리가 패왕霸王이 될 기반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하늘이 준 기회를 취하지 않으면, 장차 그 폐해를 입을 것이다.
가의賈誼는 “큰 나라의 제후왕들이 유약幼弱하여 아직 장성하지 않아서 나라 조정朝廷에서 임명한 태부太傅승상丞相이 지금 그 정사政事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몇 년 뒤에는 대저 그들 모두가 성인成人이 되어 혈기가 왕성하게 되면, 나라 〈조정에서 임명한〉 태부太傅승상丞相들을 병을 핑계로 파직시킬 것이니, 이러한 때에 정치를 안정시키고자 하면, 비록 같은 임금이라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아! 이것은 칠국七國의 형세이다.
소씨蘇氏 부자父子가 적의 형세를 논한 것은 대략 이 글을 바탕하고 있다.


역주
역주1 審敵論 : 이 글은 앞의 〈審勢論〉의 내용과 서로 보충된다. 〈審勢論〉은 內政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면, 이 〈審敵論〉은 敵, 특히 契丹에 대한 대응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특히 敵情을 중점적으로 분석하여 契丹에 대한 宋나라의 실책을 상세히 지적함과 동시에 거기에 대한 蘇洵 자신의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契丹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적극적으로 피력하였다.
역주2 四夷 : 고대 중국 민족들이 사방 이민족을 경시하여 東夷‧西戎‧南蠻‧北狄이라 불렀다.
역주3 今者 夷狄 : 북방 遼나라의 契丹族과 서쪽 西夏의 拓(탁)跋族을 말한다.
역주4 : 《嘉祐集》에는 ‘及’자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저본을 따랐다.
역주5 北胡 : 宋나라 때에는 遼나라를 세운 契丹族을 北胡라 하였다.
역주6 歲邀金繒 以數十萬計 : 北宋 眞宗 景德 元年(1004)에 契丹이 침입하여 ‘澶淵之盟’을 맺고 매년 契丹에 비단 20만 필과 銀 10만 냥을 보내기로 한 것을 말한다.
역주7 西羌之變 : 仁宗 慶歷 2년(1042)에 西夏가 宋나라를 침입하여 벌어진 전쟁을 말한다.
역주8 賄日益增 : 西夏가 宋나라를 침입한 것을 기회로, 契丹이 宋나라를 압박하여 宋나라는 契丹에 비단과 은을 10만씩 더 늘려주기로 하고, 西夏에도 은과 비단을 주기로 하고서 강화를 맺었다. 賄는 歲幣를 말한다.
역주9 冒頓(묵특) : 秦漢 시기 匈奴의 冒頓單于(B.C. ?~B.C. 174)는 일찍이 북방을 통일하고 秦나라 장수 蒙恬에게 빼앗긴 匈奴의 옛 땅을 수복하였으며, 漢나라를 위협하였다.
역주10 晉瑭 : 五代 때에 後晉을 세운 石敬瑭(892~942)을 말한다. 石敬瑭은 後晉을 찬탈하여 자립할 때에 契丹의 힘을 빌렸다. 그 후 그는 북방 燕雲十六州를 떼어 契丹에 바치고 스스로 아들이라 하여 契丹을 섬겼다. 石敬瑭이 죽고 2대 出帝(石重貴, 石敬瑭의 조카)가 즉위하여 契丹과의 맹약을 끊고, 수 차례 契丹과 전쟁을 하였지만 결국 2대 만에 망하였다.
역주11 匈奴 : 고대 중국의 長城 밖 북방에 거주하던 이민족으로, 秦漢 때에 匈奴라 불렀다. 여기서 말한 匈奴는 그 匈奴가 아니라 契丹을 말한다. 契丹은 東胡族의 일파로 匈奴와는 다르다. 이 문장 이후로 나오는 匈奴는 다 契丹을 지칭한 말이다.
역주12 大臣外叛 : 後晉의 장수 楊光遠(?~944)은 契丹과 밀통하면서 後晉이 맹약을 위반했을 때를 노려 출병하라고 설득했다.
역주13 章聖皇帝 : 章聖은 宋 眞宗의 시호이다.
역주14 犬戎 : 고대 匈奴族의 前身이다.
역주15 古人有言曰……爲蛇奈何 : 《國語》 〈吳語〉에 “越王 句踐이 吳나라에 和議를 청하자 吳王 夫差가 허락하려 하였다. 伍子胥가 諫하여 말하기를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越나라는 眞實되고 忠誠스런 마음으로 吳나라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며, 또 우리 군대의 강함을 두려워하는 것도 아닙니다.……어린 뱀일 때 꺾어놓지 않으면 큰 뱀이 되면 장차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하였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역주16 昔者……輒匿其壯士健馬 : 《史記》 〈劉敬列傳〉에 “韓王 信이 배반하였다. 高祖는 몸소 가서 그를 치려고 하였다.……匈奴에 사자를 보내었다. 匈奴는 그들의 壯士와 살찐 牛馬는 숨기고 다만 노약자들과 파리한 가축들을 보여주었다. 使臣 열 사람이 돌아와서 다 ‘匈奴를 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皇上이 사신으로 劉敬을 다시 匈奴로 보내었는데, 돌아와 이렇게 復命하였다. ‘두 나라가 서로 싸우려 하면 마땅히 과장하여 장점을 상대방에게 보이는 것인데, 이제 신이 가니 다만 파리하고 수척한 노약자들만 보였습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단점을 보여놓고 奇兵을 숨겨두었다가 승리를 쟁취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은 匈奴를 쳐서는 안 된다 생각합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역주17 兵法曰……退也 : 《孫子》 〈行軍篇〉에 “말이 비굴하면서 대비를 굳게 하는 자는 進擊할 뜻이 있는 것이고, 말이 강경하면서 진격할 기세를 보이는 자는 退却할 뜻이 있는 것이다.[辭卑而益備者進也 辭强而進驅者退也]”라는 말이 있다.
역주18 闔閭之入楚也 因唐蔡 : 《史記》 〈吳太伯世家〉에 “吳王 闔閭가 장차 楚나라를 치고자 伍子胥와 孫武에게 묻기를 ‘처음에 그대들은 楚나라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과연 어떤가?’ 하니, 두 사람이 대답하기를 ‘楚나라 대장 子常이 탐욕스러워 唐‧蔡가 다 그를 원망합니다. 왕께서는 꼭 크게 치고자 하시면, 반드시 唐‧蔡와 맹약을 맺고 치시면 가능할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闔閭가〉 크게 군대를 일으켜 唐‧蔡와 〈서로 약속하고〉 서쪽으로 楚나라를 쳤다.”라는 내용이 있다.
역주19 句踐之入吳也 因齊晉 : 《史記》 〈越王句踐世家〉에 “越나라가 다시 吳나라를 치니, 吳나라 士民들은 피폐하였고, 정예병들은 齊나라와 晉나라에서 다 죽었으니, 越나라가 크게 吳나라를 깨뜨렸다.”라는 내용이 있다.
역주20 陝西 有元昊之叛 : 宋 仁宗 慶歷 2년(1042)에 西夏가 宋나라를 침입한 것을 말한다. 陝西는 陝西路이며, 元昊는 西夏 景宗 李元昊(1004~1048)이다. 宋나라에서 자신의 왕족 성인 趙氏를 내렸기 때문에 趙元昊라고도 한다.
역주21 河朔 有王則之變 : 王則(?~1048)이 貝州 宣毅軍의 하급장교로서 彌勒敎를 신봉하였는데, 宋 仁宗 慶歷 7년(1047)에 그 州의 장교들과 미륵교 신자들을 규합하여 난을 일으켜 東平郡王이라 하였다. 이듬해 조정에서 파견한 文言博 등에 의해 난은 평정되고 王則은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역주22 嶺南 有智高之亂 : 智高는 儂智高이며 蠻族이다. 廣南을 근거지로 南天國을 세웠다가 宋 仁宗 皇祐 3년(1051)에 狄靑에게 패하여 大理로 달아났다가 죽었다.
역주23 兵法曰……於敵反是 : 《司馬法》 〈定爵〉에 나온다. ‘적과 싸울 때에는 자기의 장점을 드러내고 자기의 단점을 숨겨야 하며, 적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와 반대로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廢其所不能’은 《司馬法》에는 ‘廢其不欲不能’으로 되어 있다.
역주24 漢七國 : 漢 景帝 때의 吳‧楚‧膠西‧膠東‧淄川‧濟南‧趙의 일곱 劉氏姓의 제후국을 말한다.
역주25 非劉氏而王者 八國 : 齊國‧楚國‧淮南國‧趙國‧燕國‧梁國‧代國‧長沙國을 말한다.
역주26 信越布綰 皆誅死 : 韓信(?~B.C. 196)은 처음에 楚나라 項羽를 섬겼으나 중용되지 않자 漢王(高祖 劉邦)의 군에 참가하였다. 漢軍을 지휘하여 크게 공을 세움으로써 齊王에 이어 楚王이 되었다. 漢나라가 확립되자 차차 권력에서 밀려나 淮陰侯로 격하되었다가, B.C. 196년 陳豨의 난에 연루되어 呂后의 부하에게 참살되었다. 彭越(?~B.C. 196)은 漢나라 개국공신으로, 처음엔 項羽를 섬겼지만 나중에 漢나라 장군이 되어 큰 공을 세워 梁王에 봉해졌지만, 陳豨의 난을 토벌하는 데에 적극적이지 않아 高祖의 미움을 받았다가 반역으로 몰려 죽었다. 英布(?~B.C. 195)는 법을 어겨 墨刑을 받아 黥布라고도 부른다. 처음 項羽 밑에 있다가 劉邦의 휘하로 들어가 많은 공을 세워 淮南王에 봉해졌다가 모반으로 高祖에게 주살되었다. 盧綰(?~B.C. 195)은 高祖와 동향으로 어릴 때부터 친구였다. 건국공신 중 高祖와 가장 친하였으나, 燕王에 봉해진 뒤 모반의 혐의를 받자 匈奴로 망명하여 죽었다.
역주27 黃屋 : 누런 비단으로 장식된 수레 덮개인데, 天子의 수레 덮개만 누런 비단으로 할 수 있었다.
역주28 刺客公行 : 景帝 때에 梁孝王이 세자가 되기를 청했는데, 大臣 袁盎이 반대하였다. 梁孝王은 刺客을 두 번이나 보내 袁盎을 죽였다.
역주29 晁錯(조) : B.C. 200~B.C. 154. 鼂錯라고도 쓴다. 漢初의 유능하고 젊은 정치가로, 景帝 때에 御史大夫가 되어 제후왕들의 영지를 깎아 그들의 세력을 누르려다가 吳楚七國의 난을 불러일으켜 결국 그 희생양이 되었다.
역주30 今者 : 《嘉祐集》에는 ‘今日’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저본을 따랐다.
역주31 : 여기서는 契丹人을 말한다.
역주32 赤壁之戰 惟周瑜呂蒙知其勝 : 曹操가 대군을 끌고 南征했을 때, 吳나라 대신들은 모두 두려워 투항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오직 周瑜와 魯肅만이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吳王 孫權은 이 두 사람의 말을 받아들여 劉備와 연맹하여 赤壁에서 曹軍을 대패시켰고, 呂蒙은 周瑜를 따라 烏林에서 曹軍을 깨뜨렸다.
역주33 伐吳之役 惟羊祜張華以爲是 : 晉 武帝 때에, 尙書左伏射 羊祜가 상소하여 吳나라를 칠 계책을 올리자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였지만, 오직 杜預와 張華만이 찬성하였다. 1년 뒤, 武帝는 군대를 일으켜 吳나라를 쳤다. 羊祜(221~278)는 자가 叔子이고 南城 사람이다. 鉅平侯로 봉해졌고 죽은 뒤 南州 사람들이 그를 위해 罷市하고 조문했다 한다. 張華(231~299)는 字가 茂先으로 範陽 方城 사람이다. 學識이 넓고 詩歌와 文章에 뛰어났다. 惠帝 때에 太子少傅로 임명되었으나, 八王의 난 때에 趙王 倫에게 殺害되었다.
역주34 山東 : 秦漢 시기에 崤山 동쪽 지역을 山東이라 하였다
역주35 關內 : 옛날에는 函谷關 서쪽을 關內라고 하였다.
역주36 韓許公 : 韓弘(765~822)은 唐나라 匡城 사람으로 관직이 宣武軍節度使에 이르렀다. 吳元濟를 토벌하여 許國公에 봉해졌다. 宣武軍은 宋州‧亳州‧潁州를 포함한 것으로 소재지는 宋州이다.
역주37 李師古 : ?~806. 蔭敍로 靑州刺史가 되었다가 아버지 李納의 뒤를 이어 平盧節度使가 되었다.
역주38 賈誼曰……不能 : 賈誼의 〈治安策〉에 나온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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