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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洵(1)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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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6.
論三敗處 刺骨이라
孫武 旣言하고 則又有曰 在夏 周之興也 在商이라
明君賢將 能以上智 爲間者 必成大功이라
兵之要 所恃而動也라하니라
所謂在夏在商 誠矣
이나 以爲間 何也
文王 固使人間夏商耶
固與人爲間耶
固待間而後 可伐耶
雖甚庸이라도 亦知不然矣
然則 天下存亡 寄於一人이라
伊尹之在夏也 必曰 桀雖暴 一旦 用伊尹이면 則民心復安이니 吾何病焉이리오라하고
及其歸亳也 必曰 桀 得伊尹하여 不能用하니 必亡矣
吾不可以安視民病이라하고 遂與天下 共亡之
呂牙之在商也 文王 必曰 紂雖虐이나 一旦 用呂牙 則天祿必復이니 吾何憂焉이리오하고
及其歸周也 文王 必曰 紂 得呂牙하여 不能用하니 必亡矣 吾不可以久遏天命이라하고 遂命武王與天下 共亡之
然則夏商之存亡 待伊呂用否而決이라
今夫問將之賢者 必曰 能逆知敵國之勝敗라하니라
問其所以知之之道 必曰 不愛千金하니 能使人으로 爲之出萬死하여 以間敵國이라하고
或曰 能因敵國之使하여 而探其陰計라하니라
嗚呼 其亦勞矣
伊呂一歸하니 而夏商之國 爲決亡하니 使湯武無用間之名 與用間之勞하고 而得用間之實하니
非上智 其誰能之리오
夫兵 雖詭道 而本於正者 終亦必勝이라
今五間之用 其歸於詐 成則爲利 敗則爲禍
且與人爲詐 人亦將且詐我
能以間勝者 亦或以間敗
吾間 不忠하여 反爲敵用 一敗也 不得敵之實하고 而得敵之所僞示者하여 以爲信 二敗也 受吾財하고 而不能得敵之陰計하여 懼而以僞告我 三敗也
夫用心於正이면 一振 而群綱擧하고 用心於詐 百補라도 而千穴敗
智於此 不足恃也
五間者 非明君賢將之所上이요
明君賢將之所上者 上智之間也
嗚呼 是亦間也


06. 용간用間에 대해 논함
세 가지 실패를 논한 부분은 뼈를 찌른다.
손무孫武는 이미 오간五間을 이야기하고 나서, 또 “나라가 일어난 것은 이윤伊尹나라에 있었기 때문이요, 나라가 일어난 것은 여상呂尙나라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총명聰明한 임금과 현명賢明한 장수가 최고의 지혜智慧를 가진 사람을 간자間者로 삼을 수 있으면, 반드시 큰 공을 이룰 수 있다.
이것은 용병用兵의 요체이고, 삼군三軍이 그를 믿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상서尙書》의 기록에 의하면 이윤伊尹나라로 갔으나 나라 정치가 추악하여 〈탕왕湯王이 있는〉 으로 돌아왔고, 《사기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강태공姜太公이 일찍이 나라 주왕紂王을 섬겼지만 그를 떠나 나라로 돌아갔다.
손무孫武이윤伊尹이〉 나라에 있었고〈여상呂尙이〉 나라에 있었다고 한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간자間者로 여긴 것은 무엇 때문인가?
임금과 문왕文王이 정말 그들을 나라와 나라에 간자間者 노릇을 시켰단 말인가?
이윤伊尹여상呂尙이 정말 남의 간자間者가 된 것인가?
아니면 걸왕桀王주왕紂王은 정말 간첩을 기다린 뒤에야 정벌될 수 있었던 것인가?
이것은 아주 용렬한 사람이라도 그렇지 않음을 알 것이다.
그렇다면 손무孫武의 생각은 천하의 존망存亡을 한 사람에게 돌렸던 것이다.
이윤伊尹나라에 있을 때에 탕왕湯王은 틀림없이 “이 비록 포악하나, 하루아침에 이윤伊尹을 등용하면 민심은 다시 안정될 것이니, 내가 무엇을 걱정하겠는가?”라고 하였을 것이고,
이윤伊尹이〉 으로 돌아오니 탕왕湯王은 틀림없이 “이윤伊尹을 얻고도 임용하지 못했으니, 〈나라는〉 반드시 망해야 한다.
나는 백성의 고통을 편안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다.”라고 하고, 마침내 천하 제후들과 함께 〈나라 걸왕桀王을〉 멸망시켰던 것이다.
여상呂尙나라에 있을 때 문왕文王은 틀림없이 “가 비록 포학하나, 하루아침에 여상呂尙을 등용하면 하늘이 준 복록福祿을 반드시 회복할 것이니, 내가 무엇을 걱정하겠는가?”라고 하였을 것이고,
여상呂尙이〉 로 돌아오니 문왕文王은 틀림없이 “여상呂尙을 얻고도 임용하지 못했으니 반드시 망해야 한다. 나는 오랫동안 천명天命을 막을 수는 없다.” 하고, 마침내 무왕武王에게 명하여 천하의 제후들과 함께 〈나라 주왕紂王을〉 멸망시켰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라와 나라의 존망存亡이윤伊尹여상呂尙의 임용 여부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지금 어떤 장수將帥현명賢明한지를 묻는다면, 반드시 “적과의 싸움에서 승패를 미리 알 수 있어야 한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물어보면, 반드시 “천금千金을 아까워하지 않았기에 사람을 시켜 온갖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적국을 정탐할 수 있었다.”라고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적국의 사신使臣을 통해서 그들의 은밀한 계획을 탐지할 수 있었다.”라고 할 것이다.
아아! 그것 또한 수고로운 것이다.
이윤伊尹여상呂尙이 일단 귀순하자마자 나라와 나라는 바로 멸망되었으니, 탕왕湯王무왕武王은 간첩을 이용했다는 이름이나 간첩을 쓰는 수고도 들이지 않고 오히려 간첩을 이용한 실익을 얻었으니,
이것은 최고의 지혜가 아니면 그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용병用兵이 비록 교묘한 속임수의 방법이지만, 정도正道에 근본을 두면 종국에는 또한 반드시 승리한다.
지금 다섯 가지 간첩의 운용은 그 귀착점은 속임수에 있으니, 성공하면 이익利益이 되겠지만 실패하면 가 된다.
아울러 우리가 남에게 속임수를 쓰면, 남도 장차 우리를 속일 것이다.
그러므로 간첩을 이용해서 이기면 또한 때로는 간첩 때문에 실패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간첩이 충성스럽지 못하여 도리어 적에게 이용되는 것이 첫 번째 실패 요인이요, 적의 실상을 얻지 못하고 적이 거짓으로 보여준 것을 얻고서 사실로 여기는 것이 두 번째 실패 요인이며, 우리의 재물을 받고 적의 은밀한 계획을 정탐하지 못하자 두려워 거짓으로 나에게 보고하는 것이 세 번째 실패 요인이다.
대저 정도正道에 마음을 쏟으면 강령綱領 하나를 들어 올림에 모든 그물코가 딸려 올라오듯 순조로울 것이고, 속임수에 마음을 쏟으면 백 군데를 기워도 천 군데가 새어 결국 실패할 것이다.
여기에 지혜를 쓰면 믿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 다섯 가지 간첩은 총명한 임금과 현명한 장수가 숭상하는 바가 아니다.
총명한 임금과 현명한 장수가 숭상하는 바는 최고 지혜智慧간자間者이다.
이 때문에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곡역후曲逆侯 진평陳平정의正義에 따라 를 섬기지 않자 고조高祖항적項籍을 잡을 계획을 확정하였고, 이좌거李左車주숙周叔나라와 나라에 쓰이지 않으니,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이 출전의 계획을 결정하였다.
아아! 이것 또한 용간用間이다.


역주
역주1 用間 : 이 글은 《孫子》 〈用間篇〉에 대한 批判과 補完의 성격이 있다. 蘇洵은 用間을 詭道(속임수의 방법)와 正道의 用間으로 나누고, 孫武의 ‘五間’을 詭道의 用間으로 여겨, 이 ‘五間’을 쓰면 세 가지 실패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하여 반대하였다. 그는 正道의 用間만이 성공할 수 있다고 보았고, 正道의 用間 중에서도 ‘上智之間’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하였다.
역주2 五間 : 《孫子兵法》 〈用間篇〉에 “用間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因間‧內間‧反間‧死間‧生間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역주3 商之興也……在商 : 伊尹과 呂尙은 夏나라와 商나라에 있으면서 등용되지는 못하였지만, 그 나라의 정세는 잘 알았다. 따라서 孫武는 商나라와 周나라가 伊尹과 呂尙을 최고의 지혜를 가진 間者로 이용한 것으로 보았다.
역주4 伊摯 : 伊尹이라고도 한다. 摯는 그의 이름이고, 伊摯가 당시 宰相의 관직을 지냈는데 재상을 尹이라 하였기 때문에 그를 伊尹이라고도 하였다. 商나라 湯王의 宰相으로 湯王을 도와 夏나라 傑王을 멸하였다.
역주5 呂牙 : 呂尙으로 字가 子牙여서 呂牙라고도 불렀다. 本姓이 姜이어서 姜子牙라고도 하고 姜太公이라고도 한다. 渭水 가에서 낚시하다 周 文王을 만났는데, 文王은 그를 스승으로 삼았고, 아들 武王은 그를 師尙父로 높였다. 武王을 도와 紂王을 멸하고 周나라를 세웠다.
역주6 三軍 : 周制에는 諸侯의 大國은 三軍이 있는데, 中軍이 가장 높고 上軍이 그 다음이고 下軍이 그 다음이었다. 步兵‧戰車兵‧騎馬兵을 합쳐 삼군이라고도 하였고, 군대를 통칭하기도 하였다.
역주7 伊尹適夏 醜夏歸亳 : 《尙書》 〈夏書 胤征〉에 “伊尹이 亳을 떠나 夏나라로 갔지만, 이미 夏나라에는 추악한 정치가 있어 다시 亳으로 돌아왔다.”라는 내용이 있다.
역주8 太公嘗事紂 去之歸周 : 《史記》 〈齊太公世家〉에 “태공이 博聞하여 일찍이 紂를 섬겼지만, 紂가 無道하여 그를 떠났다. 제후들에게 유세하였지만 알아주는 바가 없어 마침내 서쪽의 周나라 西伯(文王)에게로 돌아갔다.”라는 내용이 있다.
역주9 : 저본에는 ‘吾’로 되어 있으나 《嘉祐集》에 따라 ‘武’로 바꾸었다.
역주10 淮陰……擒籍之計定 : 淮陰侯 韓信과 曲逆侯 陳平은 본래 項羽에게 의탁하였는데, 項羽가 그들을 重用하지 않자 項羽를 버리고 劉邦에 귀의하였다. 劉邦이 項羽를 이기고 漢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韓信과 陳平 같은 최고 지혜의 間者를 잘 이용했기 때문으로 蘇洵은 이해하였다.
역주11 左車……進兵之謀決 : 左車는 李左車로 趙나라에서는 廣武君이라 불렀다. 韓信이 趙나라로 진군하자 李左車는 統帥인 陳餘에게 성을 굳게 지키고 싸우지 말 것을 당부하면서, 자신이 3만의 군대를 끌고 韓信의 보급부대를 습격하면 韓信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陳餘는 끝내 그의 말을 듣지 않고 韓信에게 패하였다. 《史記 淮陰侯列傳》 韓信이 魏나라를 치기 전에 酈食其에게 魏나라 대장이 周叔인지를 물어보니, 周叔이 아니라 柏直이라 하였다. 韓信은 柏直이라면 철모르는 아이로다 하고 거병하여 魏나라를 치고 魏王 豹를 사로잡았다. 《漢書 韓彭英盧吳傳》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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