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通篇은 按武成敗之事하여 而責之나 而文多烟波生色處라
天下之士가 與之言兵하여 而曰我不能者가 幾人이며
今其書에 論奇權密機한대 出入神鬼하니 自古로 以兵著書者罕所及이라
以是로 而揣其爲人이면 必謂有應敵無窮之才라하리라
而武
는 使秦
으로 得聽
之言
하여 出兵救楚
한대 無忌吳之心
하니라
且武以九年冬에 伐楚하여 至十年秋에 始還하니 可謂久暴矣라하노라
然始吳能以入郢
은 乃因胥嚭唐蔡之怒
와 及乘
이요 武之功
은 蓋亦鮮矣
라
夫以武自爲書로도 尙不能自用하여 以取敗北온 況區區祖其故智餘論者하여 而能將乎아
且
與武
는 一體之人也
로 皆著書言兵
하니 世稱之曰 孫吳
라하니라
然而나 吳起之言兵也는 輕法制하고 草略無所統紀하여 不若武之書가 詞約而意盡이라
然이나 吳起始用於魯하여 破齊하고 及入魏하여 又能制秦兵하고 入楚하여 楚復霸하니라
今夫外御一隷하고 內治一妾은 是賤丈夫도 亦能이니 夫豈必有人而敎之리오
及夫御三軍之衆하여는 闔營而自固라도 或且有亂하니 然則是三軍之衆이 惑之也라
故로 善將者는 視三軍之衆을 與視一隷一妾하여 無加焉하니 故로 其心常若有餘라
夫以一人之心
으로 當三軍之衆
하되 而其中恢恢然
하여 猶有餘地
니 此韓信之所以
也
라
注
전편이 손무孫武가 실패한 일에 의거하여 그를 책망하였지만, 문장은 자욱한 물안개 속에 색이 피어나듯 출중出衆한 곳이 많다.
물어서 막힘이 없는 자는 천하의 기재奇才이다.
천하의 선비들이 그와 용병用兵을 이야기하면서 ‘나는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자는 몇이나 될까?
이론理論에 대해 물어서 막힘이 없는 자는 몇이나 될까?
이론理論은 막히지 않으나, 실전實戰에 참가하여 막히지 않는 자는 몇이나 될까?
아아! 실전實戰에 이르러서도 막힘이 없는 자는 나는 아직 보지 못하였다.
《손자병법孙子兵法》 13편篇은 병가兵家에서는 모두가 모범으로 여긴다.
그러나 내 나름으로 그것을 평가하건대, 병법兵法을 이야기한 것으로는 참으로 걸출하다!
지금 그 책에서 기특奇特‧권변權變‧비밀秘密‧기지機智를 논하였는데 신출귀몰하니, 예로부터 병법兵法을 가지고 쓴 책으로는 거기에 미칠 만한 것이 거의 없다.
이것으로 그 사람을 헤아려본다면 반드시 적敵에 대응하는 무궁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도 손무孫武가 용병하여서는 반드시 이길 수만은 없었고, 책에서 말한 것과도 심히 거리가 멀었던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오왕吳王 합려闔閭가 〈초楚나라 수도〉 영郢으로 쳐들어갈 때에 손무孫武를 장군으로 삼았다.
진秦나라와 초楚나라는 연합하여 오吳나라 군대를 패배시켰고, 월왕越王이 그 틈을 이용하여 오吳나라로 들어와 짓밟으니, 외화내환外禍內患이 하루아침에 겹쳐 오왕吳王은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며 스스로를 구원할 틈도 없었는데, 손무孫武는 끝내 이 환란을 멈추게 할 계책 하나 내놓지 못하였다.
만약 손무孫武의 책에 근거해서 손무孫武의 과실을 책망하자면, 모두 세 가지가 있다.
〈구지편九地篇〉에서는 “적에게 위압威壓을 가함으로써 〈다른 나라들이 그들과〉 외교관계外交關係를 맺을 수 없도록 한다.”라고 하였지만,
손무孫武는 진秦나라가 신포서申包胥의 말을 듣고서 출병하여 초楚나라를 구원하는데도 오吳나라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위압을 제대로 가한 것이 아니니, 손무孫武의 첫 번째 과실이다.
〈작전편作戰篇〉에서는 “장기간 군대를 밖에 나가 있게 하면 병기兵器가 무디어지고 병사兵士들의 사기士氣가 꺾이며, 전투력戰鬪力이 소진되고 재정財政이 바닥나면 주변의 제후들이 그 폐해를 이용하여 일어난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손무孫武는 합려闔閭 9년 겨울에 초楚나라 정벌에 나섰다가 합려闔閭 10년 가을이 되어서야 돌아왔으니, 장기간 군대를 밖에 나가 있게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월越나라 사람이 이 틈을 타서 오吳나라를 침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작전편作戰篇〉에서 또 “적을 죽이려는 자는 적개심敵愾心을 일으켜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손무孫武는 오자서伍子胥‧백비伯嚭가 초 평왕楚 平王의 무덤을 파서 그 시체에 채찍질하여 일부一夫의 개인적 원한을 갚도록 내버려두었다가 적을 격분시켰으니, 이것이 〈초楚나라〉 사마수司馬戍‧자서子西‧자기子期가 필사적으로 오吳나라에 원수를 갚고자 결심한 원인이 되었다.
월越 구천句踐은 〈오吳나라 왕들의〉 무덤을 훼손하지 않음으로써 오吳나라 백성들이 복종하였고, 전단田單은 연군燕軍이 〈제齊나라 사람의〉 무덤을 파헤친다고 속여 제齊나라 사람의 투지를 불러일으켰으니, 그들의 지모智謀가 손무孫武보다 훨씬 더 원대하였다.
손무孫武는 여기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그의 세 번째 과실이다.
처음 오吳나라가 〈초楚나라의 수도〉 영郢으로 바로 진격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오자서伍子胥‧백비伯嚭‧당국唐國‧채국蔡國의 초楚나라에 대한 분노와 초와楚瓦의 어질지 못함을 틈탄 것이지, 손무孫武의 공적은 어쩌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대저 손무孫武는 자신이 쓴 책조차도 오히려 스스로 잘 운용하지 못하여 패배를 하였는데, 하물며 구구하게 그의 낡은 지식智識과 여분의 이론理論을 으뜸으로 여겨서야 장수가 될 수 있겠는가?
또 오기吳起와 손무孫武는 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모두 다 책을 지어 병법兵法을 말하였으니,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칭하여 ‘손오孫吳’라고 한다.
그러나 오기吳起가 말한 병법兵法은 법제法制를 중시하지 않고 글도 거칠고 소략하여 통일된 규칙이 없어, 손무孫武의 책이 말은 간략하지만 뜻이 깊은 것만 못하였다.
그래서 천하天下의 병법兵法 이론은 모두 《손자병법孙子兵法》 속에서 그 근원을 찾는다.
그러나 오기吳起는 처음 노魯나라에 등용되어 제齊나라를 격파하였고, 위魏나라로 가서는 또 진秦나라 군대를 제압할 수 있었으며, 초楚나라로 가서는 초楚나라를 다시 패자霸者로 만들었다.
그러나 손무孫武가 한 일은 이(오기吳起의 공적)와 반대였으니, 책은 족히 믿을 것이 못 되는 게 분명하다.
지금 대저 밖으로 한 사내종을 부리고 안으로 한 여자 종을 관리하는 것은 미천한 남자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니, 어찌 그것을 가르칠 사람이 필요하겠는가?
삼군三軍과 같은 많은 수를 통솔함에 이르러서는 병영兵營의 문을 닫고 자신을 견고히 하더라도 때로는 소란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그렇다면 그것은 삼군三軍의 많은 수가 그를 혼란스럽게 해서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장수는 삼군三軍의 많은 병사를 한 사내종이나 한 여자종에 더 보탠 것이 없는 것처럼 보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늘 여유가 있는 것이다.
대저 한 사람의 마음으로 삼군三軍의 많은 병사兵士를 감당하되 그 속은 넉넉하여 오히려 여유가 있으니, 이것이 한신韓信이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고 한 이유이다.
그러므로 용병用兵에 어찌 다른 특별한 기술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