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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洵(1)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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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7.
通篇 按武成敗之事하여 而責之 而文多烟波生色處
求之而不窮者 天下奇才也
天下之士 與之言兵하여 而曰我不能者 幾人이며
求之於言하여 而不窮者 幾人이며
言不窮矣 求之於用하여 而不窮者 幾人이리오
嗚呼 至於用而不窮者 吾未之見也
兵家擧以爲師
이나 以吾評之컨대 其言兵之雄乎
今其書 論奇權密機한대 出入神鬼하니 自古 以兵著書者罕所及이라
以是 而揣其爲人이면 必謂有應敵無窮之才라하리라
不知武用兵 乃不能必克하고 與書所言遠甚이라
武爲將軍이라
若按武之書하여 以責武之失이면 凡有三焉이라
九地이라하니라
而武 使秦으로 得聽之言하여 出兵救楚한대 無忌吳之心하니라
斯不威之甚이니 其失一也 作戰라하니라
且武以九年冬 伐楚하여 至十年秋 始還하니 可謂久暴矣라하노라
越人 能無乘間入國乎
其失二也
又曰 殺敵者 怒也라하니라
不達此하니 其失三也
然始吳能以入郢 乃因胥嚭唐蔡之怒 及乘이요 武之功 蓋亦鮮矣
夫以武自爲書로도 尙不能自用하여 以取敗北 況區區祖其故智餘論者하여 而能將乎
與武 一體之人也 皆著書言兵하니 世稱之曰 孫吳라하니라
然而 吳起之言兵也 輕法制하고 草略無所統紀하여 不若武之書 詞約而意盡이라
天下之兵說 皆歸其中이라
이나 吳起始用於魯하여 破齊하고 及入魏하여 又能制秦兵하고 入楚하여 楚復霸하니라
而武之所爲 反如是하니 書之不足信也 固矣
今夫外御一隷하고 內治一妾 是賤丈夫 亦能이니 夫豈必有人而敎之리오
及夫御三軍之衆하여는 闔營而自固라도 或且有亂하니 然則是三軍之衆 惑之也
善將者 視三軍之衆 與視一隷一妾하여 無加焉하니 其心常若有餘
夫以一人之心으로 當三軍之衆하되 而其中恢恢然하여 猶有餘地 此韓信之所以
夫用兵 豈有異術哉
其衆而已矣


07. 손무孫武의 실책을 논함
전편이 손무孫武가 실패한 일에 의거하여 그를 책망하였지만, 문장은 자욱한 물안개 속에 색이 피어나듯 출중出衆한 곳이 많다.
물어서 막힘이 없는 자는 천하의 기재奇才이다.
천하의 선비들이 그와 용병用兵을 이야기하면서 ‘나는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자는 몇이나 될까?
이론理論에 대해 물어서 막힘이 없는 자는 몇이나 될까?
이론理論은 막히지 않으나, 실전實戰에 참가하여 막히지 않는 자는 몇이나 될까?
아아! 실전實戰에 이르러서도 막힘이 없는 자는 나는 아직 보지 못하였다.
손자병법孙子兵法》 13병가兵家에서는 모두가 모범으로 여긴다.
그러나 내 나름으로 그것을 평가하건대, 병법兵法을 이야기한 것으로는 참으로 걸출하다!
지금 그 책에서 기특奇特권변權變비밀秘密기지機智를 논하였는데 신출귀몰하니, 예로부터 병법兵法을 가지고 쓴 책으로는 거기에 미칠 만한 것이 거의 없다.
이것으로 그 사람을 헤아려본다면 반드시 에 대응하는 무궁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도 손무孫武가 용병하여서는 반드시 이길 수만은 없었고, 책에서 말한 것과도 심히 거리가 멀었던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오왕吳王 합려闔閭가 〈나라 수도〉 으로 쳐들어갈 때에 손무孫武를 장군으로 삼았다.
나라와 나라는 연합하여 나라 군대를 패배시켰고, 월왕越王이 그 틈을 이용하여 나라로 들어와 짓밟으니, 외화내환外禍內患이 하루아침에 겹쳐 오왕吳王동분서주東奔西走하며 스스로를 구원할 틈도 없었는데, 손무孫武는 끝내 이 환란을 멈추게 할 계책 하나 내놓지 못하였다.
만약 손무孫武의 책에 근거해서 손무孫武의 과실을 책망하자면, 모두 세 가지가 있다.
구지편九地篇〉에서는 “적에게 위압威壓을 가함으로써 〈다른 나라들이 그들과〉 외교관계外交關係를 맺을 수 없도록 한다.”라고 하였지만,
손무孫武나라가 신포서申包胥의 말을 듣고서 출병하여 나라를 구원하는데도 나라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위압을 제대로 가한 것이 아니니, 손무孫武의 첫 번째 과실이다.
작전편作戰篇〉에서는 “장기간 군대를 밖에 나가 있게 하면 병기兵器가 무디어지고 병사兵士들의 사기士氣가 꺾이며, 전투력戰鬪力이 소진되고 재정財政이 바닥나면 주변의 제후들이 그 폐해를 이용하여 일어난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손무孫武합려闔閭 9년 겨울에 나라 정벌에 나섰다가 합려闔閭 10년 가을이 되어서야 돌아왔으니, 장기간 군대를 밖에 나가 있게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라 사람이 이 틈을 타서 나라를 침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손무孫武의 두 번째 과실이다.
작전편作戰篇〉에서 또 “적을 죽이려는 자는 적개심敵愾心을 일으켜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손무孫武오자서伍子胥백비伯嚭초 평왕楚 平王의 무덤을 파서 그 시체에 채찍질하여 일부一夫의 개인적 원한을 갚도록 내버려두었다가 적을 격분시켰으니, 이것이 〈나라〉 사마수司馬戍자서子西자기子期가 필사적으로 나라에 원수를 갚고자 결심한 원인이 되었다.
구천句踐은 〈나라 왕들의〉 무덤을 훼손하지 않음으로써 나라 백성들이 복종하였고, 전단田單연군燕軍이 〈나라 사람의〉 무덤을 파헤친다고 속여 나라 사람의 투지를 불러일으켰으니, 그들의 지모智謀손무孫武보다 훨씬 더 원대하였다.
손무孫武는 여기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그의 세 번째 과실이다.
처음 나라가 〈나라의 수도〉 으로 바로 진격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오자서伍子胥백비伯嚭당국唐國채국蔡國나라에 대한 분노와 초와楚瓦의 어질지 못함을 틈탄 것이지, 손무孫武의 공적은 어쩌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대저 손무孫武는 자신이 쓴 책조차도 오히려 스스로 잘 운용하지 못하여 패배를 하였는데, 하물며 구구하게 그의 낡은 지식智識과 여분의 이론理論을 으뜸으로 여겨서야 장수가 될 수 있겠는가?
오기吳起손무孫武는 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모두 다 책을 지어 병법兵法을 말하였으니,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칭하여 ‘손오孫吳’라고 한다.
그러나 오기吳起가 말한 병법兵法법제法制를 중시하지 않고 글도 거칠고 소략하여 통일된 규칙이 없어, 손무孫武의 책이 말은 간략하지만 뜻이 깊은 것만 못하였다.
그래서 천하天下병법兵法 이론은 모두 《손자병법孙子兵法》 속에서 그 근원을 찾는다.
그러나 오기吳起는 처음 나라에 등용되어 나라를 격파하였고, 나라로 가서는 또 나라 군대를 제압할 수 있었으며, 나라로 가서는 나라를 다시 패자霸者로 만들었다.
그러나 손무孫武가 한 일은 이(오기吳起의 공적)와 반대였으니, 책은 족히 믿을 것이 못 되는 게 분명하다.
지금 대저 밖으로 한 사내종을 부리고 안으로 한 여자 종을 관리하는 것은 미천한 남자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니, 어찌 그것을 가르칠 사람이 필요하겠는가?
삼군三軍과 같은 많은 수를 통솔함에 이르러서는 병영兵營의 문을 닫고 자신을 견고히 하더라도 때로는 소란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그렇다면 그것은 삼군三軍의 많은 수가 그를 혼란스럽게 해서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장수는 삼군三軍의 많은 병사를 한 사내종이나 한 여자종에 더 보탠 것이 없는 것처럼 보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늘 여유가 있는 것이다.
대저 한 사람의 마음으로 삼군三軍의 많은 병사兵士를 감당하되 그 속은 넉넉하여 오히려 여유가 있으니, 이것이 한신韓信이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고 한 이유이다.
그러므로 용병用兵에 어찌 다른 특별한 기술이 있겠는가?
다만 그것을 많게 보지 말아야 할 뿐이다.


역주
역주1 孫武 : 이 글은 兵家의 理論보다는 實戰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한 것이다. 蘇洵은 ‘言兵(理論)에 뛰어나다 해서 반드시 用兵(實戰)을 잘하는 것이 아니며, 言兵에 뛰어나지 않다 해서 用兵을 못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이해하고, 孫武와 吳起의 두 군사 전문가를 그 예로 들어 孫武를 비판하고 吳起를 높였다.
역주2 孫武十三篇 : 《孙子兵法》 13篇이다. 〈計篇〉‧〈作戰篇〉‧〈謀攻篇〉‧〈形篇〉‧〈勢篇〉‧〈虛實篇〉‧〈軍爭篇〉‧〈九變篇〉‧〈行軍篇〉‧〈地形篇〉‧〈九地篇〉‧〈火攻篇〉‧〈用間篇〉이다.
역주3 吳王闔廬之入郢也 : B.C. 506년에 闔閭가 唐‧蔡와 서로 연합하여 楚나라를 쳐서, 한 번의 공격으로 楚나라 수도 郢으로 들어갔다.
역주4 及秦楚交敗其兵……吳王奔走自救不暇 : 闔閭가 楚나라를 치자 越나라가 그 틈을 타서 갑자기 吳나라를 습격하였고, 楚나라에서는 大夫 申包胥를 秦나라로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여 楚‧秦 연합군이 吳나라 군대를 대패시켰다. 吳나라 내부에서는 闔閭의 동생 夫槪가 전장에서 吳나라로 몰래 돌아와 스스로 왕이 되니, 闔閭가 이 소식을 듣고 황급히 철수하여 夫槪를 쳤다. 《史記 吳太伯世家》
역주5 威加於敵 則交不得合 : 《孙子兵法》 〈九地篇〉 원문에는 “威加於敵 則其交不得合”이라 하여 ‘其’자가 한 자 더 있다.
역주6 包胥 : 楚나라 大夫 申包胥이다. 申包胥가 秦나라로 가서 구원병을 요구하며 7일 밤낮을 궁정에서 哭을 하니 秦나라가 구원병을 보냈다.
역주7 久暴師……則諸侯乘其弊而起 : 《孙子兵法》 〈作戰篇〉 원문에는 “장기간 군대를 밖에 나가 있게 하면 국가의 재정이 부족해진다. 대저 兵器가 무디어지고 兵士들의 士氣가 꺾이며, 전투력이 소진되고 재정이 바닥나면 주변의 제후들이 그 폐해를 이용하여 일어난다.”라 하여, ‘國用不足’이란 문구가 더 있다.
역주8 今武縱子胥伯嚭 鞭平王尸 : 子胥는 伍子胥로, 이름은 員이다. 그는 본래 楚나라 사람인데, 楚 平王이 讒訴를 믿고 伍子胥의 아버지 伍奢를 감금하고 그의 두 아들을 유인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伍子胥가 이 소식을 듣고 吳나라로 망명하여 吳王 闔閭의 참모가 되었다. 伯嚭는 楚나라 신하였던 伯犁의 손자였는데, 楚王이 伯犁를 죽이자 吳나라로 달아나 吳나라 大夫가 되었다. 伍子胥와 伯嚭는 吳나라가 楚나라를 칠 때 함께 따라가 楚 平王의 무덤을 파서 그 시체에 채찍질을 하며 개인의 원한을 풀었다. 《史記 吳太伯世家》
역주9 此司馬戍子西子期……讐吳也 : 司馬戍‧子西‧子期는 모두 楚나라 신하로, 吳나라가 楚나라 수도 郢에 들어온 뒤 필사적으로 楚 昭王을 도와 楚나라를 되찾았다. 《春秋左氏傳 定公 4년》
역주10 句踐不頹舊塚 而吳服 : 越王 句踐이 吳나라를 대파하고 吳王 夫差를 압박하여 자살하게 하였다. 夫差가 죽은 뒤 句踐이 禮로써 夫差를 안장하니 吳나라 백성들이 신복하였다. 《史記 越王句踐世家》
역주11 田單譎燕掘墓 而齊奮 : 田單은 戰國時代 齊나라 사람이다. 齊 湣王 40년(B.C. 284)에 燕나라는 秦나라 등과 함께 齊나라를 공격하여 70여 城을 함락시켰다. 田單이 지키던 城도 공격을 받아 卽墨으로 달아났는데, 마침 卽墨의 大夫도 싸움에 져서 달아나니, 城 사람들이 田單을 城主로 옹립하였다. 田單은 反間計로 燕나라 大將 樂毅의 병권을 회수하게 하고, 아울러 卽墨의 사람들에게 燕軍이 포로들의 코를 베고 점령지의 무덤을 파헤쳐 죽은 자를 모욕한다고 소문을 퍼뜨려 卽墨 사람들의 투지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는 마침내 燕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잃은 땅을 수복하였다. 《史記 田單列傳》
역주12 楚瓦之不仁 : 楚瓦는 楚 公子 子貞의 손자로 令尹의 벼슬에 있으면서 온갖 탐욕을 부렸다. 그의 탐욕이 원래 楚나라에 복종하던 唐國과 蔡國을 격분시켜, 결국 楚나라를 저버리고 吳나라와 함께 楚나라를 치는 데 동참하게 하였다. ‘楚瓦’가 저본에는 ‘子瓦’로 되어 있으나, 《嘉祐集》에 따라 ‘楚瓦’로 바꾸었다.
역주13 吳起 : 戰國時代 魏나라 사람이다. 일찍이 魯나라 장군이 되어 齊나라를 공격하여 대파하였고, 나중에 魏나라로 들어가 魏 文侯에게 등용되어 秦나라를 공격하여 다섯 개의 城을 빼앗았고, 魏 文侯가 죽은 뒤에는 楚나라로 들어가 楚 悼王의 승상이 되었다. 그는 楚 悼王을 도와 남으로는 百越을 평정하고, 북으로는 陳‧蔡를 병합하였으며, 서로는 秦나라를 쳐서 楚나라로 하여금 다시 霸者가 되게 하였다. 吳起의 兵法으로 알려진 《吳子》가 일부 전해오고 있지만, 후인들이 가탁한 것으로 보인다.
역주14 多多而益善 : 韓信에게 高祖가 묻기를 “나라면 얼마쯤의 군사를 거느릴 수 있겠는가?” 하니, 韓信이 대답하기를 “폐하께서는 10만의 군사를 거느리는 데에 불과합니다.” 하였다. 高祖가 말하기를 “그대는 얼마쯤인가?” 하니, 韓信이 대답하기를 “신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좋습니다.” 하였다. 高祖가 웃으면서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하는 사람이 어째서 10만의 장군에 불과한 나에게 포로가 되었는가?” 하니, 韓信이 대답하기를 “폐하께서는 병사를 잘 거느릴 수는 없지만 장군을 잘 통솔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폐하께 포로가 된 까닭입니다. 또한 폐하의 능력은 하늘이 주신 것이므로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史記 淮陰侯列傳》 저본에는 ‘善’이 ‘辦’으로 되어 있으나. 《嘉祐集》에 따라 ‘善’으로 바꾸었다.
역주15 勿視 : 《嘉祐集》에는 ‘物視’로 되어 있다. ‘物視’로 보아도 뜻은 통한다. 즉, 그 많은 수를 마치 ‘물건인 양 본다.’라는 뜻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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