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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洵(1)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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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運險峭之思하여 以爲鑱畫之文이라 其鋒鍔不可嚮邇
天下無事 天子甚尊하고 公卿甚貴하며 士甚賤이라
從士而逆數之하여 至於天子 其積也甚厚하고 其爲變也甚難이라
是故 天子之尊至於不可指하고 而士之卑 至於可殺이라
嗚呼 見其安而不見其危 如此而已矣
方其未敗也 天下之士望爲其鶴而不可得也
及其敗也 思以千乘之國으로 與匹夫共之 而不可得也
人知其卒之至於如此 則天子之尊可以慄慄於上이요 而士之卑可以肆志於下 又焉敢以勢言哉
夫士之貴賤 其勢在天子 天子之存亡 其權在士
世衰道喪이면 天下之士 學之不明하고 持之不堅하니 於是 始以天子存亡之權 下而就一匹夫貴賤之勢
甚矣夫 天下之惑也
持千金之璧以易一瓦缶 幾何其不擧而棄諸溝也리오
古之君子 其道相爲徒하고 其徒相爲用이라
一夫不用乎此 則天下之士 相率而去之
使夫上之人有失天下士之憂하고 而後 有失一士之懼
今之君子 幸其徒之不用하여 以苟容其身이라
其始也輕用之하고 而其終也亦輕去之
嗚呼 其亦何便於此也
當今之世 非有賢公卿이면 不能振其前하고 非有賢士 不能奮其後
洵從蜀來하여 明日 將至長安하여 見明公而東이라
伏惟讀其書而察其心하여 以輕重其禮 幸甚幸甚이니이다
唐荊川曰 議論奇高


01. 왕장안王長安에게 올린 글
험초險峭한 생각을 운용하여 송곳처럼 새긴 글을 지었으므로, 그 칼끝은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천하天下에 일이 없으면 천자天子는 매우 높고 공경公卿은 매우 하며 선비는 매우 합니다.
선비에서부터 거꾸로 헤아려 천자에까지 이르면 그 쌓임은 매우 두텁고 그 변함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 까닭에 천자天子의 높음은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없는 경지에 이르고 선비의 낮음은 죽일 만한 지경에 이릅니다.
아아! 그 편안便安함만 보고 그 위태危殆로움을 보지 못함이 이와 같을 따름입니다.
위 의공衛 懿公의 죽음은 그에게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때문에 거절하여 더불어 싸우지 않아서입니다.
바야흐로 아직 패하지 않았을 때는 천하天下의 선비들이 이 되기를 바랐으나 될 수가 없었습니다.
패하였을 때는 천승千乘의 나라를 필부匹夫와 함께할 것을 생각하였으나 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그의 죽음이 이와 같음에 이르렀음을 안다면 천자天子존귀尊貴함으로 위에서 전전긍긍戰戰兢兢할 수도 있을 것이고, 선비의 낮음으로 아래에서 마음껏 뜻을 펼 수도 있을 것이니, 또한 어찌 감히 형세形勢 때문이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대체로 선비가 귀해지고 천해지는 것은 그 형세가 천자에게 있으며, 천자天子가 존속하거나 망하는 것은 그 권세權勢가 선비에게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쇠퇴해지고 가 상실되면 천하天下의 선비는 배움이 밝지 못하고 지조志操가 굳지 못하니, 이에 비로소 천자를 존속하게도 하고 망하게도 하는 권리가 아래로 내려가서 한 필부를 귀하게 하고 천하게 하는 형세를 이루게 됩니다.
심합니다, 천하天下가 의혹됨이!
천금千金이 나가는 벽옥碧玉을 가지고 한 질장구와 바꾸면 무엇 때문에 그것을 들어 도랑에 버리지 않겠습니까?
군자君子들은 그 로 서로 한 무리가 되고, 그 무리를 서로 썼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여기서 쓰이지 않으면 천하天下의 선비는 서로 따라서 떠나갔습니다.
이는 대체로 위의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의 선비를 잃는 근심을 갖게 하고, 나중에는 한 선비를 잃는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지금의 군자君子들은 그 무리가 쓰이지 않음으로써 제 한 몸이 구차히 세상에 받아들여지는 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그러므로 그 애초에도 가벼이 쓰고 종국에도 가벼이 버립니다.
아아! 그 또한 어찌 여기에 편하겠습니까?
지금 세상에서는 어진 공경公卿이 아니면 앞을 떨칠 수가 없고, 어진 선비가 아니면 그 뒤를 분발시킬 수가 없습니다.
저는 에서 와 내일 장안長安에 이르러 명공明公을 뵙고 동쪽(개봉開封)으로 가려고 합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그 글을 읽고 그 마음을 살피시어 그 경중輕重을 가늠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나이다.
당형천唐荊川(당순지唐順之)이 말하기를 “의론議論기이奇異하고 높다.”라 하였다.


역주
역주1 上王長安書 : 글에서 “저는 蜀에서 와 내일 長安에 이르러 明公을 뵙고 동쪽으로 가려고 합니다.[洵從蜀來 明日將至長安見明公而東]”라 한 것으로 보아, 蜀에서 서울로 가던 도중에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吳廷燮의 《北宋經撫年表》 권3에 의하면, 蘇洵이 활동한 연대에 王拱辰만 두 차례 知永興軍으로 그 治所인 長安에서 지냈다. 그 외에는 성이 王氏인 자가 없다. 한 번은 皇祐 원년(1056)으로 이때는 蘇洵이 집에서 杜門不出할 때이고, 한 번은 至和 2년(1054)에서 嘉祐 2년(1057)까지이다. 이를 근거로 하면 王長安은 곧 王拱辰일 것이며, 嘉祐 원년 蘇洵 부자가 서울에 갈 때 長安을 지나면서 지은 것이다. 이때 王拱辰의 벼슬은 尙書右丞 端明殿學士 兼翰林侍讀學士라는 寄祿官에 知永興軍 判京兆府라는 職事官을 두루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嘉祐集》에서는 이 편지의 서두에 ‘判府左丞閤下’라는 말로 시작하나, 여기서는 생략되어 있다. 京兆府는 長安을 말한다.
역주2 衛懿公之死……以鶴辭而不與戰也 : 《史記》 〈衛康叔世家〉에 “懿公은 즉위하자 鶴 기르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淫蕩하게 享樂을 즐기고 奢侈를 일삼았다. 9년에 翟族이 衛나라를 쳤다. 懿公은 군대를 일으켜 막으려고 하였으나, 군사들 중 일부는 반기를 들었다. 大臣들이 ‘군주께서는 학을 즐겨 기르시니 학으로 하여금 翟族의 사람들에 대항해서 싸우라고 하면 될 것입니다.’라고 빈정거렸다. 그렇게 논란만 벌이고 있을 때 翟族 군사들이 쳐들어와서 懿公을 죽였다.”라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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