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로 其作愈大니라 是以로 因史修經이니 卒之에 論其效者는 必曰 亂臣賊子懼라하니라
其義一이요 其體二이니 故로 曰史焉이요 曰經焉이라
大凡文之用四니 事以實之요 辭以章之요 道以通之요 法以檢之니 此經史所兼而有之者也라
經不得史면 無以證其褒貶이요 史不得經이면 無以酌其輕重이며 經非一代之實錄이요 史非萬世之常法이라
夫易禮樂詩書에 言聖人之道與法詳矣나 然이나 弗驗之行事니라
仲尼懼後世以是爲聖人之私言
이라 하여 旌善而懲惡
이니 此經之道也
라
使後人不知史而觀經이면 則所褒莫見其善狀이요 所貶弗聞其惡實이라
使後人不通經而傳史면 則稱讚不知所法하고 懲勸不知所沮라
史之一紀一世家一傳에 其間美惡得失은 固不可以一二數니라
則其論贊數十百言之中에 安能事爲之貶褒하여 使天下之人으로 動有所法如春秋哉아
然而不得器면 則規無所效其圓이요 矩無所用其方이요 準無所施其平이요 繩無所措其直이니라
注
경經과 사史를 함께 말하였으니 손님에게 주인의 주장을 논한 것이다.
역사歷史는 무엇 때문에 짓는가? 아마 근심이 있어서일 것이다.
무슨 이유로 그것을 아는가? 그 이름으로 안다.
초楚나라의 역사를 《도올檮杌》이라고 한다. 도올檮杌은 사흉四凶의 하나이다.
군자君子는 포양褒揚을 기다리지 않고 격려激勵하며, 폄훼貶毁를 기다리지 않고 징벌懲罰한다.
그렇다면 역사가 징계하고 격려하는 것은 다만 소인일 따름이다.
중니仲尼의 뜻이 컸으므로 그 근심이 더욱 컸으며, 근심이 더욱 컸으므로 지음이 더욱 컸다.
그런 까닭으로 역사를 통하여 경서經書를 편수하였는데, 그것을 끝내자 그 효과를 논하는 자들이 반드시 말하기를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두려워하였다.”라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역사와 경서는 모두 소인을 근심하여 지었는데 그 뜻은 마찬가지이다.
그 뜻은 하나이고 그 체體는 둘이기 때문에 그것을 ‘사史’라 하고 ‘경經’이라고 한다.
대체로 문文의 쓰임은 네 가지인데, 사실事實로 진실眞實을 드러내고, 문사文辭로 문채文彩를 드러내고, 도道로 통하게 하며, 법法으로 규범規範을 드러내니, 이는 경經과 사史가 겸하여 가지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러하지만 경經은 도道와 법法을 뛰어난 것으로 여기고, 사史는 사실事實과 문사文辭를 뛰어난 것으로 여긴다.
경經이 사史를 얻지 않으면 그 포폄褒貶을 증명할 방법이 없고, 사史가 경經을 얻지 못하면 그 경중輕重을 짐작할 방법이 없으며, 경經은 일대一代의 실록實錄이 아니고 사史는 만세의 상법常法이 아니다.
체體는 서로 따르지 않지만 용用과 실實은 서로 바탕으로 삼는다.
대체로 《주역周易》, 《예기禮記》, 《악기樂記》, 《시경詩經》, 《서경書經》에서 성인聖人의 도道와 법法을 말한 것은 상세하지만 행사行事로 그것을 증험證驗하지 않았다.
중니仲尼는 후세에서 이것을 성인聖人의 사사로운 말로 생각할까 두려워하였으므로, 부고赴告와 책서策書에 따라 《춘추春秋》를 편수하여 선善을 격려하고 악惡을 징계하였는데 이것이 경經의 도道이다.
그래도 후세에서 자기가 억단臆斷한 것으로 생각할까 두려워하였으므로 《주례周禮》에 근본함을 대요大要로 삼았는데, 이것이 경經의 법法이다.
사실事實에 이르면 그 대략을 들고 문사文辭는 간략함에 힘쓴다.
내 그러므로 말하기를 “경經은 도道와 법法을 뛰어난 것으로 여긴다.”라 하였다.
역사는 그렇지 않으니, 사실事實은 이미 상세하고 문사文辭 또한 화려하고 아름다워 이른바 포폄褒貶은 ‘논찬論贊’ 외에는 거의 없다.
내 그러므로 말하기를 “역사는 사실과 문사를 뛰어난 것으로 여긴다.”라 하였다.
후인後人들로 하여금 역사歷史를 알지 못하고 경經을 보게 한다면 포양褒揚한 것에서 그 좋은 모습을 보지 못하고 폄훼貶毁한 것에서 그 나쁜 실상을 듣지 못한다.
내 그러므로 말하기를 “경經이 역사歷史를 얻지 못하면 그 포폄褒貶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라 하였다.
후인後人들로 하여금 경經에 통하지 않고 역사歷史를 전하게 한다면 칭찬稱讚을 본받을 줄 모르고 징권懲勸을 그만둘 줄 모른다.
내 그러므로 말하기를 “역사歷史가 경經을 얻지 못하면 그 경중輕重을 헤아릴 길이 없다.”고 하였다.
경經은 혹 거짓 부고赴告를 따라 기록하기도 하였고, 혹 꺼리는 것을 숨기고 기록하지 않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것은 많은데 모두가 ‘가르침’으로 나아갈 따름이다.
내 그러므로 말하기를 “경經은 일대一代의 실록實錄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역사歷史의 한 기紀와 한 세가世家, 한 전傳에 있는 그 사이의 미악美惡과 득실得失은 실로 일일이 헤아릴 수 없다.
곧 그 논찬論贊 수십백數十百 언言 가운데 어찌 사위事爲를 포폄褒貶하여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춘추春秋》처럼 본받게 할 수 있겠는가?
내 그래서 말하기를 “역사歷史는 만세萬世의 상법常法이 아니다.”라 하였다.
대체로 그림쇠, 곡척曲尺, 수준기水準器, 먹줄은 기물器物을 제어하는 것이니, 기물이 이에 의지하여 바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물을 얻지 못하면 그림쇠는 원圓을 그릴 때 아무 효과가 없고, 곡척은 방형方形을 만들 때 소용이 없으며, 수준기는 평평하게 할 때 베풀 곳이 없고, 먹줄은 곧게 할 때 쓸 곳이 없게 될 것이다.
역사歷史는 경經을 기다려 바르게 되니, 역사歷史를 얻지 못하면 경經은 어두워질 것이다.
내 그러므로 말하기를 “체體는 서로 따르지 않지만 용用과 실實은 서로 바탕으로 삼는다.”라고 하였다.
아, 하나의 그림쇠, 하나의 곡척曲尺, 하나의 수준기水準器, 하나의 먹줄로 충분히 모든 기물을 제어할 수 있다.
후대의 사람들이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의 실록을 바라는 데 힘쓴 것은 옳다.
실로 왕통王通과 육장원陸長源 같은 무리들이 야단스레 쓸데없고 참람되이 한 것은 없었다면 좋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