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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洵(1)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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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此書 凡三段이라
一段 歷敍諸君子之離合하여 見己慕望之切이라
二段 稱歐陽公之文하여 見己知公之深이라
三段 自敍平生經歷하여 欲歐陽公之知之也
而情事婉曲周折하니 何等意氣 何等風神
布衣窮居하여 常竊自歎하고 以爲天下之人 不能皆賢이요 不能皆不肖 賢人君子之處於世 合必離하고 離必合이라
할새하고 하고 하고 하니 方是之時 天下之人 毛髮絲粟之才 紛紛然而起하여 合而爲一이라
而洵也自度其愚魯無用之身이니 不足以自奮於其間일새 退而養其心하여 幸其道之將成하여 而可以復見于當世之賢人君子러니 이라
하여 親見其事하고 忽忽仰天歎息하며 以爲斯人之去 而道雖成이나 不復足以爲榮也
旣復自思念하니 往者 衆君子之進於朝 其始也 必有善人焉推之 今也亦必有小人焉間之
今之世 無復有善人也 則已矣 如其不然也 吾何憂焉이리오
姑養其心하여 使其道大有成而待之 何傷이리오
退而處十年 雖未敢自謂其道有成矣이나 浩浩乎其胸中하여 若與曩者異하고 復相繼登於朝하며 하시니 其勢將復合爲一이라
喜且自賀하여 以爲道旣已粗成하여 而果將有以發之也
旣又反而思하니 其向之所慕望愛悅之而不得見之者 蓋有六人焉이라
今將往見之矣로되 而六人者 하니 則又爲之澘然出涕以悲
嗚呼 二人者 不可復見矣로되 而所恃以慰此心者 猶有四人也하니
則又以自解하고 思其止于四人也하니 則又汲汲欲一識其面하여 以發其心之所欲言이나
而富公 又爲天子之宰相하니 遠方寒士 未可遽以言通於其前이요 獨執事在朝廷間이요 而其位差不甚貴하니 可以叫呼扳援而聞之以言이나 而饑寒衰老之病 又痼而留之하여 使不克自至於執事之庭이라
夫以慕望愛悅其人之心으로 十年而不得見하고 而其人已死 如范公尹公二人者 則四人者之中 非其勢不可遽以言通者 何可以不能自往而遽已也리오
執事之文章 天下之人 莫不知之이나 竊自以爲洵之知之特深하여 愈於天下之人이라
何者 孟子之文 語約而意盡하여 不爲巉刻斬絶之言이로되 而其鋒不可犯이요
韓子之文 如長江大河 渾浩流轉하여 魚黿蛟龍 萬怪惶惑이로되
而抑遏蔽掩하여 不使自露하여 而人望見其淵然之光 蒼然之色하고 亦自畏避하여 不敢迫視
執事之文 紆餘委備하여 往復百折이로되 而條達疏暢하여 無所間斷하며 氣盡語極하여 急言竭論이로되 而容與閑易하여 無艱難勞苦之態하니
此三者 皆斷然自爲一家之文也
之文 其味黯然而長하고 其光油然而幽하며 俯仰揖讓 有執事之態하고
之文 遣言措意 切近的當하여 有執事之實이로되 而執事之才 又自有過人者
蓋執事之文 非孟子韓子之文이요 而歐陽子之文也
夫樂道人之善而不爲諂者 以其人誠足以當之也
彼不知者 則以爲譽人以求其悅己也 夫譽人以求其悅己 洵亦不爲也
而其所以道執事光明盛大之德而不自知止者
雖然이나 執事之名 滿於天下하여 雖不見其文이라도 而固已知有歐陽子矣
而洵也不幸하여 墮在之中이라가 而其知道之心 又近而粗成하여 欲徒手奉咫尺之書하여 自托於執事하노니 將使執事로되 何從而知之 何從而信之哉
少年不學하고 生二十五歲 始知讀書 從士君子遊라가 年旣已晩이요 而又不遂刻意厲行하여 以古人自期하고 而視與己同列者 皆不勝己 則遂以爲可矣
其後 困益甚하고 然後 取古人之文而讀之하고 始覺其出言用意與己大異
時復內顧하고 自思其才하니 則又似夫不遂止於是而已者
由是盡燒其曩時所爲文數百篇하고 取論語孟子韓子及其他聖人賢人之文하여 而兀然端坐하고 終日以讀之者 七八年矣
方其始也 入其中而惶然하고 博觀於其外而駭然以驚하고 及其久也 讀之益精하니 而其胸中 豁然以明하여之言 固當然者
이나 猶未敢自出其言也
時旣久 胸中之言 日益多하여 不能自制
試出而書之하고 已而再三讀之하니 渾渾乎覺其來之易矣
이나 猶未敢以爲是也
近所爲史論凡七篇 執事觀其如何
噫嘻 區區而自言 不知者 又將以爲自譽以求人之知己也라하리니
惟執事 思其十年之心 如是之不偶然也而察之하노이다


03. 구양내한歐陽內翰에게 올린 글
이 글은 모두 세 단락이다.
첫 번째 단락은 여러 군자君子이합離合을 차례로 서술하여 자기가 그리고 바라는 간절함을 나타냈다.
두 번째 단락은 구양공歐陽公의 글을 칭찬하여 자기가 을 아는 것이 깊음을 나타냈다.
세 번째 단락은 평생의 경력經歷자술自述함으로써 구양공歐陽公이 알아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정사情事완곡婉曲하고 이리저리 감돌고 구부러짐이 많으니 얼마나 높은 의기意氣이며 얼마나 훌륭한 풍채風采인가!
저는 평민平民으로 궁하게 살면서 늘 속으로 스스로 탄식하고, 천하의 사람들은 모두 다 현명賢明할 수도 없고 모두 다 못날 수도 없으므로, 현인賢人군자君子들은 세상에 처신함에 합쳐졌다가는 반드시 떨어지게 되고, 떨어졌다가는 반드시 합쳐지게 되는 것이라 여겨왔습니다.
전날 천자天子께서 막 정치政治에 뜻을 두고 계실 때에는, 범중엄范仲淹 공이 참지정사參知政事로 계셨고, 부필富弼 공이 추밀부사樞密副使로 계셨으며, 집사執事여정余靖 공과 채양蔡襄 공이 간관諫官이 되셨으며, 윤수尹洙 공은 아래위로 뛰어다니면서 전쟁이 있는 고장에서 힘을 다하였으니, 이러한 때에는 천하 사람들이 머리털이나 실과 좁쌀 같은 재능才能을 가진 자라도 분분히 일어나서 하나로 합쳐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아둔하여 쓸 데가 없는 몸이니 그 사이에 스스로 분발奮發하며 나서기에는 부족하다 여겨, 물러나 마음을 보양保養하여 올바른 가 이루어져 다시 이 세상에서 현인과 군자들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랐으나 불행히도 올바른 도를 이루기도 전에, 범중엄 공은 서쪽으로 나가셨고, 부필 공은 북쪽으로 나가셨으며, 집사와 여정 공‧채양 공은 흩어져 사방으로 나가셨고, 윤수 공도 세력을 잃고 작은 벼슬로 바삐 뛰어다니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서울에 있으면서 친히 그러한 일들을 보고서 맥없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이런 분들이 떠나간 즈음에 올바른 도가 비록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다시는 영화롭다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
그 뒤에 다시 스스로 생각해보니, 지난날 여러 군자君子들이 조정朝廷에 나아갔던 것은 처음에는 반드시 선인善人이 그들을 추천推薦했기 때문일 것이나, 지금은 또한 반드시 소인小人이 그들을 이간질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에 다시 선인善人이 없다면 그만이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제가 무엇을 걱정해야 하겠습니까?
잠시 마음을 보양하면서 올바른 도가 크게 이루어지기를 기다린다면, 무슨 손실이 되겠습니까?
물러나 10년을 지내면서 비록 감히 스스로 도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가슴속이 탁 트여서 옛날과는 다르게 된 것 같고, 그리고 여정 공께서는 마침 남방南方에서 을 이루셨고, 집사와 채양 공은 다시 연이어 조정으로 올라오시고, 부필 공은 다시 밖으로부터 들어와 재상宰相이 되셨으니, 그 형세形勢는 다시 합쳐져 하나로 되는 것입니다.
기뻐하고 또 스스로 축하하여, 올바른 도가 이미 대강 이루어져 과연 장차 그것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다음 또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전에 흠모欽慕하고 우러러보며 사랑하고 좋아하면서도 뵐 수가 없었던 분들은 모두 여섯 분이었습니다.
지금 그분들을 찾아가 뵈려니, 여섯 분 가운데 이미 범중엄 공과 윤수 공 두 분은 돌아가셨으니, 또 그 때문에 줄줄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습니다.
아아! 그 두 분은 다시 뵐 수가 없게 되었지만, 의지하여 이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는 분들이 아직도 네 분 계시니,
또 이렇게 스스로의 마음을 풀고 생각이 그 네 분들께 머무니, 또 서둘러 그분들의 얼굴을 한 번 뵙고서 마음속으로 말하고자 하던 것을 펴보고 싶었으나,
부필 공은 다시 천자天子재상宰相이 되셨으니 먼 곳의 빈한貧寒한 선비로서는 갑자기 말로써 그분 앞에 나아갈 수가 없을 것이고, 또 여정 공과 채양 공은 멀리 만 리 밖에 계시며, 오직 집사만 조정 안에 계시고 그 지위의 차등도 대단히 존귀尊貴하지는 않으시니 소리쳐 부여잡고 올라가 말로써 아뢸 수가 있으나, 굶주리고 춥고 쇠약해지고 늙은 병이 또한 고질痼疾로 남아 있어, 스스로 집사 댁 마당으로 갈 수 없게 하고 있습니다.
흠모하고 우러러보며 사랑하고 좋아하는 마음으로 10년 동안이나 뵙지를 못하고 범중엄 공과 윤수 공 두 분처럼 이미 작고한 이들도 있으니, 나머지 네 분 중에 그 형세가 황급히 말로써 뜻을 통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어찌 스스로 가지 않고 갑자기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집사執事문장文章은 천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이가 없으나, 저 스스로는 제가 거기에 대하여 아는 것이 특히 깊어서 천하 사람들보다 더 낫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어째서이겠습니까? 맹자孟子의 글은 말은 간략簡略하면서도 뜻이 깊어 날카롭고 예리한 말이 아니지만 그 뾰족함을 범할 수가 없습니다.
한유韓愈의 글은 마치 장강長江황하黃河가 질펀히 흐르며 돌아 물고기와 큰 자라와 교룡과 용 등이 너무도 기괴하고 정신 못 차리게 하지만,
그것들을 억누르고 막고 가리고 덮어서 스스로 드러나지 않게 하고 있어, 사람들이 그 깊숙한 빛과 푸른 색깔을 바라보고는 또한 스스로 두려워하고 피하면서 감히 가까이 가서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집사의 글은 이리저리 구부러지며 모든 것을 다 갖추어 왔다갔다 하며 무수히 꺾이되, 조리條理가 통하여 거침이 없고 중간에 끊어지는 일이 없으며, 기운氣韻을 다하고 말을 다하여 다급히 표현하며 이론理論을 다 펴되, 여유餘裕가 있고 한가閑暇한 듯하여 힘들고 애쓴 것 같은 모양이 없습니다.
이 세 분들은 모두가 틀림없이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룬 문장입니다.
오직 이고李翶의 글은 그 맛이 은은하면서도 길고, 그 빛은 빛나는 듯하면서도 그윽하며, 그 점잖은 움직임에는 집사의 자태姿態가 있습니다.
육지陸贄의 글은 말의 사용과 뜻의 표현이 정확하고 확실하여 집사의 내용이 있으나, 집사의 재능은 또한 스스로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습니다.
대체로 집사의 글은 맹자孟子한유韓愈의 글이 아니라 구양수歐陽脩 자신의 글인 것입니다.
남의 훌륭함을 얘기하기 좋아하지만 그것이 아첨이 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이 진실로 이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남을 칭찬하여 자신을 좋아하도록 하는 것이라 여기나, 남을 칭찬함으로써 그가 자기를 좋아하도록 바라는 짓은 저 역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집사의 밝게 빛나는 성대한 덕을 얘기함에 있어서 스스로 멈출 줄 모르는 까닭은, 또한 집사께서 〈사람들이〉 집사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라서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집사의 이름은 천하에 가득 차서 비록 집사의 글을 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구양수歐陽脩란 분이 계시다는 것은 본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불행하여 초야草野의 진흙 속에 떨어져 지내오다가 올바른 를 알려는 마음이 또한 근래에야 대략 이루어져서, 맨손으로 짧은 편지를 받쳐 들고 스스로 집사께 의탁하려는 것이오니, 집사로 하여금 어찌하면 그런 뜻을 알게 하고 어찌해야 이를 믿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젊어서는 공부를 못하고 스물다섯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글을 읽을 줄 알게 되었으나, 선비들을 따라 노닐다가 나이가 이미 들게 되었고, 또 끝내 뜻을 세워 행실行實을 닦아 옛사람들과 같이 되려고 스스로 노력한 것이 아니고, 자기와 같은 대열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보다 더 낫지 않음을 보기만 하면 마침내 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 뒤로 곤경困境이 더욱 심해졌고 그런 뒤에 다시 옛사람들의 글을 가져다 읽어보고는 비로소 그분들이 하신 말씀과 의도意圖가 나와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다시 안을 돌아보고 스스로의 재능을 생각해보니 또한 여기서 그치고 말 것이 아닌 듯하였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지었던 글 수백 편을 모두 태워버리고, 《논어論語》‧《孟子》‧《한유문집韓愈文集》과 그 밖의 성인聖人현인賢人들의 글을 갖다놓고는 꼿꼿하고 단정하게 앉아서 하루 종일 그것들을 읽기를 7, 8년을 하였습니다.
막 그렇게 시작할 때에는 그 속에 들어가서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고, 그 밖을 널리 보고서는 깜짝 놀랐고, 그렇게 하기를 오래하여 그것들을 더욱 꼼꼼히 읽자 가슴속이 탁 트이며 밝아져서, 그러한 사람들의 말이 진실로 당연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감히 스스로 자기의 말을 꺼내지는 못했습니다.
시일時日이 더 오래 지나자, 가슴속에 하고자 하는 말이 날로 더욱 많아져서, 자제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시험 삼아 이를 밖으로 꺼내어 쓰고, 얼마 후 재삼 그것들을 읽어보니, 깊고 커서 글 짓는 일이 쉬워졌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감히 옳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근래 지은 〈홍범론洪範論〉‧〈사론史論〉 등 7을 집사께서 보아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아! 구구하게 제 스스로 말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또한 스스로를 칭찬함으로써 남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부디 집사께서는 10년의 마음이 이와 같이 우연한 일이 아님을 생각하여 살펴주십시오.


역주
역주1 上歐陽內翰書 : 歐陽內翰은 곧 歐陽脩(1007~1072)이다. 歐陽脩는 자가 永叔이며 호는 醉翁, 六一居士로, 北宋의 저명한 문학가이자 사학가로 《歐陽文忠公文集》과 《新五代史》, 《新唐書》 등을 남겼다. 內翰은 곧 翰林의 별칭으로, 이때 歐陽脩는 翰林院의 侍讀學士로 있었기 때문에 歐陽內翰이라고 하였다. 이 글은 干謁文으로 蘇洵이 歐陽脩에게 보낸 첫 번째 글이며, 네 번째 글에서 “丙申年 가을에서 戊戌年 겨울까지 무릇 7백여 일 만에 부름을 받았다.”라 하였으니, 병신년은 嘉祐 원년(1056)으로 이 글은 이때보다 조금 일찍 지어졌을 것이다.
역주2 往者 天子方有意於治 : 天子는 宋 仁宗을 가리킨다. 이때는 仁宗의 慶曆 3년(1042)이다. 仁宗은 이때 范仲淹과 韓琦, 富弼 등을 발탁하여 임용하였다.
역주3 范公 在相府 : 范公은 范仲淹으로, 자는 希文이다. 進士가 된 뒤 西夏의 침입을 막은 공으로 仁宗 慶曆 3년 4월에 樞密副使를 거쳐 8월에는 參知政事가 되었다. 이해 9월에 黜陟을 분명히 할 것, 僥倖을 누를 것 등 열 가지를 상주하였는데 다 받아들여졌다. 相府는 宰相 자리로, 宋나라 때에는 同平章事가 宰相, 참지정사가 副相의 지위였다.
역주4 富公 爲樞密副使 : 富公은 곧 富弼이다. 자는 彦國으로, 仁宗 때 契丹을 제어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樞密副使가 된 것은 慶曆 3년 8월의 일이다. 英宗 때는 樞密使가 되었고, 王安石의 新法에 반대하여 致仕했는데, 司空이라는 최고의 名譽職 벼슬이 가해지고 韓國公에 봉해진 바 있다.
역주5 執事與余公蔡公 爲諫官 : 執事는 歐陽脩를 가리키며, 慶曆 3년 3월에 知諫院이 되었다. 余公은 余靖이며, 자는 安道로 韶州 曲江(지금의 廣東 韶關) 사람이다. 과거에 급제한 仁宗 초 慶曆 3년 3월에 右正言이 되어 諫院에서 봉직했다. 歐陽脩‧王素‧蔡襄과 함께 ‘四諫’이라 불리었다. 뒤에 벼슬은 工部尙書까지 지냈다. 蔡公은 곧 蔡襄(1012~1067)으로, 자는 君謨이며 興化 仙遊(지금의 福建) 사람이다. 慶曆 3년 4월에 秘書丞, 知諫院이 되었다. 뒤엔 福州‧泉州‧杭州 등의 知事를 역임했다. 성품이 忠誠스럽고 곧았으며, 詩文과 書法에도 뛰어났었다.
역주6 尹公……用力於兵革之地 : 尹公은 尹洙(1001~2046)를 가리킨다. 자는 師魯이며 河南(지금의 河南 洛陽) 사람이다. 慶曆 초에 太常丞으로 知涇州였으며, 또한 右司諫으로 知渭州 兼 領涇源路經略公事로 西夏의 침략을 막는 일에 참여하였다.
역주7 不幸道未成……而尹公亦失勢奔走於小官 : 慶曆 4년(1044) 6월 范仲淹은 陝西‧河東宣撫使로 나갔고, 이듬해인 慶曆 5년 정월에는 知邠州로 나갔다. 이 해 7월 富弼은 河北宣撫使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資政殿學士로 知鄆州로 나갔다. 9월에는 歐陽脩가 河北都轉運使가 되었다가 이듬해 8월에 知滁州로 나갔다. 余靖은 契丹에 使者로 나갔다가 蕃語로 詩를 지었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慶曆 5년 5월 知吉州로 나갔다. 蔡襄은 慶曆 4년 10월에 知福州로 나갔다. 尹洙는 변방의 신하와 의견이 맞지 않아 知慶州‧晉州‧潞州로 옮겼다가 公使錢을 빌린 일로 崇信軍節度副使로 폄적되었으며, 監均州酒稅로 옮겼다가 오래지 않아 病死했다.
역주8 洵 時在京師 : 蘇轍의 〈東坡先生墓誌銘〉에서는 “公(蘇軾)이 난 지 10년 만에 先君(蘇洵)은 벼슬을 위한 學問으로 사방을 돌아다녔다.”라 하였다. 蘇軾은 景祐 3년(1036)에 태어났으니 慶曆 5년(1045)이 정확하게 10년이므로 이때 蘇洵은 游學하느라 서울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역주9 余公 適亦有成功於南方 : 余靖은 皇祐 4년(1052) 廣西路按撫使로 儂智高의 반란을 평정하였는데 이를 가리킨다. 앞의 〈上余靑州書〉 참조.
역주10 執事與蔡公 : 至和 원년(1054) 9월 歐陽脩는 조정으로 돌아와 翰林學士가 되었다. 皇祐 4년(1052) 蔡襄은 起居舍人으로 옮겼다가, 至和 원년에는 龍圖閣學士로 옮겼으며, 知開封府가 되었다.
역주11 富公 復自外入爲宰相 : 富弼은 至和 2년(1055) 6월에 判幷州에서 同中書門下平章事 集賢殿大學士로 임명되었다.
역주12 已有范公尹公二人 亡焉 : 范仲淹은 皇祐 4년(1052)에 죽었고, 尹洙는 慶曆 6년(1046)에 죽었다.
역주13 余公蔡公 遠者又在萬里外 : 蘇洵이 이 글을 지었을 때 余靖은 知桂州였고, 蔡襄은 知泉州에서 知福州로 옮겼다.
역주14 李翶 : 772~841. 唐代의 문인이다. 자는 習之로, 隴西 成紀(지금의 甘肅 泰安) 사람이다. 韓愈에게 古文을 배웠다. 進士가 된 뒤에 禮部侍郞, 諫議大夫, 中書舍人, 工部尙書 등직을 역임하였으나 성품이 剛直하여 벼슬길은 여의치 못하였다. 山南東道節度使를 지냈다. 한유의 뒤를 이어 儒學을 옹호하고 佛敎를 배척한 학자로 유명하다.
역주15 陸贄 : 754~840. 唐나라 때의 학자로 자는 敬輿이며, 蘇州 嘉興 사람이다. 성격이 忠實하고 곧았으며, 進士가 된 뒤 德宗 때 翰林學士가 되었다. 이후에도 中書侍郞과 同平章事 등직을 역임하였으나 참소로 인해 재상직에서 파면되어 忠州(지금의 四川 忠縣)別駕로 폄적되었다. 좋은 계책을 많이 내고 곧은 말을 많이 하여, 나라의 중요한 일들이 그에 의하여 결정되었으므로 사람들이 ‘內相’이라 불렀다 한다. 그가 황제에게 올린 여러 가지 奏議로 특히 유명하다.
역주16 亦欲執事之知其知我也 : 조선시대 李德弘의 《艮齋先生續集》 권4 〈古文後集質疑〉에 ‘知其知我’를 풀이하면서 “위의 知자는 歐陽公이 알아주는 것이고, 아래의 知자는 蘇公이 歐陽公을 알아주는 것이다. 我는 歐陽公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上知字 歐陽知也 下知字 蘇公知歐陽公也 我 知歐陽公而言]” 하였다.
역주17 草野泥塗 : 草野의 진흙으로, 시골에서 형편없는 처지로 지내는 것을 뜻한다.
역주18 : 李德弘의 《艮齋先生續集》 권4 〈古文後集質疑〉에 “人은 孟子, 韓愈 등의 여러 古人을 가리킨다.[人指孟韓諸古人]”고 하였다.
역주19 洪範論 : 《書經》 〈洪範〉의 취지를 설명한다는 뜻인데, 세상을 다스리는 커다란 經綸에 관하여 논함을 이른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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