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蘇氏父子는 往往按事後成敗하여 立說이나 而非其至라
吾嘗論項籍은 有取天下之才나 而無取天下之慮요 曹操는 有取天下之慮나 而無取天下之量이요 劉備는 有取天下之量이나 而無取天下之才라
且夫不有所棄면 不可以得天下之勢요 不有所忍이면 不可以盡天下之利라
是故로 地有所不取요 城有所不攻이요 勝有所不就요 敗有所不避라
其來不喜하고 其去不怒하여 肆天下之所爲하여 而徐制其後면 乃克有濟라
嗚呼
라 項籍
은 有百戰百勝之才
나 而
하니 無惑也
라
也
한대 見其慮之不長
하고 量之不大
하여 未嘗不怪其死於垓下之晚也
라
하니 籍於此時
에 若急引軍趨秦
하여 及其鋒而用之
면 可以據咸陽
하여 制天下
라
不知出此
하고 而區區與秦將
으로 爭一旦之命
하고 라
曰
死
에 謂楚不足慮
라 故
로 移兵伐趙
하니 有輕楚心
하여 而良將勁兵
을 盡于鉅鹿
이라
籍誠能以必死之士로 擊其輕敵寡弱之師면 入之易耳라
且亡秦之守關과 與沛公之守가 善否可知也요 沛公之攻關과 與籍之攻이 善否又可知也라
以秦之守에 而沛公攻入之하고 沛公之守에 而籍攻入之하니 然則亡秦之守에 籍不能入哉아
曰 虎方捕鹿한대 羆據其穴하여 搏其子면 虎安得不置鹿而返고 返則碎於羆明矣라
籍據關逆擊其前
하고 趙與諸侯救者十餘
가 躡其後
면 覆之必矣
라
彼
號知兵
이나 殊不達此
하고 屯安陽不進
하여 而曰待秦敝
라하니 吾恐秦未敝
에 而沛公先據關矣
라
吾嘗觀蜀之險한대 其守不可出하고 其出不可繼하니 兢兢而自完도 猶且不給이어늘 而何足以制中原哉아
若夫
는 沃土千里
요 洪河大山
이니 眞可以控天下
어늘 又烏事夫不可以措足如劍門者而後
에 曰險哉
아
今夫富人必居四通五達之都하여 使其財布出於天下然後에 可以收天下之利라
有小丈夫者는 得一金하여도 櫝而藏諸家하여 拒戶而守之라
注
소씨蘇氏 부자父子는 왕왕 사후事後의 성패成敗에 의거해서 자신의 견해를 세웠지만 적절한 데에 이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문장만은 뛰어나 《전국책戰國策》에 가깝다.
나는 일찍이 “항우項羽는 천하를 취할 재능才能은 있으나 천하를 취할 책략策略이 없고, 조조曹操는 천하를 취할 책략策略은 있으나 천하를 취할 도량度量이 없으며, 유비劉備는 천하를 취할 도량度量은 있으나 천하를 취할 재능才能이 없었다.”라고 논평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이 세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성공할 수 없었다.
또한 대저 버리는 것이 있지 않으면 천하의 대세大勢를 얻을 수 없고, 인내하는 바가 있지 않으면 천하의 이익利益을 다 차지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땅도 취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고, 성城도 공격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으며, 승리할 수 있어도 나아가지 말아야 할 것이 있고, 실패할 수 있어도 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와도 기뻐하지 않고 떠나도 성내지 아니하여, 천하 사람들이 하는 대로 놓아두었다가 서서히 그 뒤를 제압하면 이에 성공할 수 있다.
아아! 항우項羽는 백전백승百戰百勝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해하垓下에서 죽었으니, 의아해할 것이 없다.
나는 거록鉅鹿에서 그가 한 싸움을 관찰해보았는데, 그의 책략이 장구하지도 않고 도량도 크지 않음을 보고서, 그가 그렇게 늦게 해하垓下에서 죽은 것을 괴이하게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항우項羽가 황하黃河를 건너고 있을 때에, 유방劉邦은 비로소 군대를 정돈하여 함곡관函谷關으로 향하기 시작하였으니, 항우項羽가 이때에 서둘러 군대를 이끌고 진秦나라로 나아가, 병사의 사기가 충만했을 때에 용병用兵을 했더라면 함양咸陽(진秦의 수도)을 차지하여 천하를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계책을 낼 줄도 모르고 속 좁게 진秦나라 장군과 보잘것없는 승부를 다투고, 이미 거록鉅鹿을 온전히 차지하고서도 하남河南‧신안新安 사이를 배회하다가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니, 유방劉邦은 함양咸陽에 입성한 지가 수개월이나 되었다.
진秦나라 사람들은 이미 유방劉邦에게 편안함을 느끼고 항우項羽에게는 적개심을 느꼈으니, 그렇다면 그 형세상 〈진秦나라 사람을〉 항우項羽에게 억지로 복종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항우項羽는 비록 유방劉邦을 한중漢中 땅으로 옮기기는 하였지만, 그는 끝내 팽성彭城에 도읍을 정함으로써 유방劉邦이 다시 삼진三秦을 평정할 수 있게 하였으니, 그렇다면 천하의 대세는 한漢나라에 있었지 초楚나라에 있지 않았다.
초楚나라가 비록 백전백승할 수 있더라도 오히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해하垓下에서 죽음이 예견된 것은 거록鉅鹿의 싸움이었다.” 하겠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비록 그러하나 항우項羽가 모름지기 진秦나라로 들어갈 수는 있었을까?”이에 대답하였다.
“항량項梁이 죽자, 장한章邯이 초楚나라는 족히 염려할 것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군대를 옮겨 조趙나라를 쳤으니, 초楚나라를 가볍게 여긴 마음이 있어 뛰어난 장군과 날쌘 병사들을 모두 거록鉅鹿으로 집결시켰던 것이다.
항우項羽가 진실로 필사의 병사들로, 적을 가볍게 여기고 얼마 되지도 않은 연약한 〈함곡관函谷關의 진秦나라〉 수비군을 공격했더라면 쉽게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또 망해가는 진秦나라가 함곡관函谷關을 지키는 것과 유방劉邦이 함곡관函谷關을 지키는 것 중 누가 더 잘 지킬지 알 수가 있었을 것이고, 유방劉邦이 함곡관函谷關을 공격하는 것과 항우項羽가 함곡관函谷關을 공격하는 것 중 누가 더 잘 공격할지 또한 알 수가 있었을 것이다.
진秦나라가 지키는데 유방劉邦이 공격해 들어갔고, 유방劉邦이 지키는데 항우項羽가 공격해서 들어갔으니, 그렇다면 망해가는 진秦나라가 함곡관函谷關을 지키는데 항우項羽가 들어갈 수 없겠는가?”
어떤 사람이 물었다. “진秦나라로 들어가면, 조趙나라를 구원하는 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에 대답하였다. “호랑이가 사슴을 잡으려 하고 있는데, 곰이 호랑이굴을 점거하여 그 새끼를 잡으려 한다면, 호랑이가 어찌 사슴을 놓아두고 돌아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돌아오면 곰에게 박살날 것은 분명하다.
병서兵書에 이른바 ‘그들이 반드시 구원할 곳을 공격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항우項羽가 함곡관函谷關으로 들어가게 되면 〈진秦나라 장군〉 왕리王離‧섭간涉間이 반드시 조趙나라를 버리고 스스로 구원하러 올 것이다.
항우項羽가 함곡관函谷關을 점거하여 그들의 앞을 막아 공격하고 조趙나라와 구원에 나섰던 십여 명의 제후諸侯 군대가 그들의 뒤를 밟는다면, 그들을 무너뜨리는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이렇게 해야 항우項羽는 일거에 조趙나라의 포위를 풀게 할 수 있고, 진秦나라에서도 공功을 거둘 것이다.
전국시대에, 위魏나라가 조趙나라를 공격하니 제齊나라가 조趙나라를 구원하였다.
〈제齊나라〉 전기田忌가 군대를 이끌고 재빨리 〈위魏나라 수도인〉 대량大梁으로 들어가니, 이로 인해 조趙나라를 보존시키고 위魏나라를 깰 수 있었다.
저 송의宋義 같은 이는 용병用兵을 안다고 하지만 전혀 이런 이치를 깨우치지 못하고 안양安陽에 주둔하여 나아가려 하지 않으면서 ‘적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린다.’고 하였으니, 나는 진秦나라가 피로해지기도 전에 유방劉邦이 먼저 함곡관函谷關을 점거할까 두렵다.
이 때문에 옛날 천하를 취하려는 자는 늘 지킬 곳을 먼저 도모하였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은 형주荊州를 버리고 서촉西蜀으로 갔는데, 나는 그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임을 알았다.
게다가 그는 일찍이 이처럼 큰 험지를 본 적이 없었으니, 그는 검문劒門이란 곳을 의지하면 망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일찍이 촉蜀의 험준함을 살펴보았는데, 그곳을 지키면 나올 수가 없고 그곳을 나오면 〈후원군을〉 계속해서 보낼 수가 없으니, 전전긍긍하며 자신을 보존하기에도 오히려 또한 넉넉하지 않거늘, 어찌 족히 중원中原을 제압할 수 있겠는가?
저 진秦‧한漢의 옛 도읍 같은 곳은 옥토沃土가 천 리에 걸쳐 있고 큰 강과 높은 산이 있으니 진실로 천하를 통제할 수 있거늘, 또한 어찌하여 발도 편히 둘 수 없는 검문劒門 같은 곳을 기반으로 한 뒤에 ‘험하구나!’라고 한단 말인가!
지금 부자들은 반드시 사통팔달四通八達의 도시에 거주하면서 그들의 재부財富를 천하에 유통시킨 뒤에 천하의 이익을 모두 거두어들인다.
졸장부는 일금一金만 얻어도 함 속에 넣어 집안에 감추어두고서 문을 걸어 잠그고 그것을 지킨다.
아아! 이것은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지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큰 도적이 들어 겁탈하여 가져가버리면, 또한 어찌 과연 잃어버리지 않을 것인지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