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蘇洵(1)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9.
一篇議論 由戰國策縱人之說來 却能與戰國策相伯仲이라 當與子由六國論幷看이라
非兵不利 戰不善이요 弊在이라
賂秦而力虧 破滅之道也
或曰 六國互喪 率賂秦耶아하니
曰 不賂者 以賂者喪하니 蓋失彊援하여 不能獨完이라하니라
曰 弊在賂秦也라하니라
秦以攻取之外 小則獲이요 大則得城이라
較秦之所得하면 與戰勝하여 而得者 其實百倍
諸侯之所亡 與戰敗하여 而亡者 其實亦百倍
則秦之所大欲 諸侯所大患이요 固不在戰矣
思厥先祖父 暴霜露하고 斬荊棘하여 以有尺寸之地어늘 子孫視之不甚惜하고 擧以與人 如棄草芥하니 今日割五城이요 明日割十城然後 得一夕安寢이라
起視四境이면 而秦兵又至矣
然則諸侯之地 有限이요 暴秦之欲 無厭이니 奉之彌繁하고 侵之愈急이라
不戰而强弱勝負 已判矣
至於顚覆하여는 理固宜然이라
齊人 未嘗賂秦이나 終繼五國遷滅하니 何哉하여 而不助五國也
五國旣喪하니 齊亦不免矣
燕趙之君 始有遠略하여 能守其土하고 義不賂秦이라
是故 燕雖小國이나 而後亡하니 斯用兵之效也
하니 始速禍焉이라
하니 惜其用武而不終也
且燕趙 處秦之際하여 可謂智力孤危하니 戰敗而亡 誠不得已
向使三國으로 各愛其地하고 齊人 勿附于秦하고 刺客不行하고 良將猶在하여 則勝負之數 存亡之理 當與秦相較 或未易量이니라
嗚呼 以賂秦之地 封天下之謀臣하고 以事秦之心으로 禮天下之奇才하여 幷力西嚮이면 則吾恐秦人食之不得下咽也리라
悲夫 有如此之勢 而爲秦人積威之所劫하여 日削月割하여 以趨於亡하니 爲國者 無使爲積威之所劫哉리라
夫六國 與秦으로 皆諸侯 其勢弱於秦이나 而猶有可以不賂而勝之之勢
苟以天下之大 而從六國破亡之故事 是又在六國下矣


09. 육국六國에 대해 논함
이 한 편의 의론議論은 《전국책戰國策》의 합종合縱을 주장하던 사람의 설에서 나왔지만, 오히려 《전국책戰國策》과 서로 쌍벽을 이루니, 당연히 소철蘇轍의 〈육국론六國論〉과 함께 보아야 한다.
육국六國이 파멸한 것은 병기兵器가 날카롭지 않아서도 아니요, 싸움을 잘못하여서도 아니며, 그 폐단이 나라에 땅을 뇌물賂物로 바친 데에 있다.
나라에 땅을 뇌물로 바쳐서 그 국력國力이 결핍된 것이 멸망의 길이 되었다.
어떤 사람이 “육국六國이 서로 망한 것은 모두가 나라에 땅을 뇌물로 바쳐서인가?”라고 하니,
“땅을 뇌물로 바치지 않았던 나라도 뇌물을 바친 나라 때문에 망하였으니, 대개 강력한 원조를 잃어 홀로 자기 나라를 완전하게 보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폐단이 나라에 땅을 뇌물로 바친 데에 있다.”라고 말한 것이다.
나라는 다른 나라를 공격해서 빼앗은 것 이외에, 〈뇌물을 통해〉 작게는 을 얻고 크게는 을 얻었다.
나라가 뇌물로 얻은 땅을 비교해보면 전쟁에서 이겨 얻은 땅보다 실제로 백 배나 되었다.
제후들이 〈나라에 바쳐서〉 잃은 땅이 전쟁에 져서 잃은 땅보다 실제로 또한 백 배나 되었다.
그렇다면 나라의 큰 욕심이 제후들의 큰 걱정거리였지, 사실 전쟁에 있지 않았다.
그들 선조先祖부모父母를 생각해보면 서리와 이슬을 맞고 가시덤불을 쳐내어서 이 작은 땅을 소유하게 되었거늘, 그 자손子孫들은 그런 땅을 보고 심히 아깝게 여기지 않고, 〈그 땅을〉 들어 다른 이에게 주기를 마치 지푸라기를 내버리듯 하였으니, 오늘은 다섯 개의 성을 떼어주고, 내일은 열 개의 성을 떼어준 뒤에야 겨우 하루저녁의 편안한 잠을 잘 수 있다.
그리고 일어나 사방을 살펴보면, 나라의 군대가 또 쳐들어온다.
그러니 제후들의 땅은 한계가 있고, 포악한 나라의 욕심은 만족함이 없으니, 나라에 바치는 땅은 더욱더 많아지고, 나라의 침략은 갈수록 급박해진다.
그러므로 싸워보지도 않고서 강약强弱승패勝敗가 이미 판가름이 나고 말았다.
그러니 나라가 망하는 것은 이치상 당연하였다.
옛사람이 “땅을 떼어주면서 나라를 섬기는 것은 마치 나무를 껴안고 불에 뛰어들어 불을 끄려고 하는 것과 같으니, 탈 나무가 다 없어지지 않으면 불은 꺼지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이치에 꼭 맞는 말이다.
나라 사람은 나라에 뇌물로 땅을 떼어준 적도 없었지만, 끝내 다섯 나라의 뒤를 이어 멸망하였으니, 어째서인가? 〈나라가〉 나라의 편이 되어 다른 다섯 나라를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섯 나라가 이미 멸망하였으니, 나라 또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라와 나라의 임금은 처음엔 원대한 계략이 있어, 각자의 땅을 잘 지킬 수 있었고, 의리를 지키며 나라에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라는 비록 작은 나라였지만 〈다른 나라보다〉 뒤에 망했던 것이니, 이는 용병用兵으로 저항한 효과이다.
나라의 태자太子형가荊軻를 〈자객刺客으로 삼아 나라 임금을 시해하려고〉 계획하니 비로소 를 재촉하고 말았다.
나라는 일찍이 다섯 번 나라와 싸워 두 번 지고 세 번 이겼다.
그 후 나라는 두 번이나 나라를 공격하였지만 〈나라의 장수〉 이목李牧이 연달아 진군秦軍을 물리쳤다.
이목李牧이 모함에 걸려 처형되자, 〈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은 〈나라의 한〉 이 되고 말았으니, 무력武力으로 끝까지 맞서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게다가 나라와 나라는 나라가 〈제후 국가들을〉 거의 멸망시켜 갈 무렵에 처해서 그들의 지혜와 힘이 고립무원孤立無援이라 할 만했으니, 싸움에 패하여 망하는 것은 실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가령 〈〉 세 나라가 각자의 땅을 아끼고, 나라가 나라의 편에 붙지 않고, 〈형가荊軻를〉 자객으로 보내지 않고, 좋은 장수가 여전히 살아 있어서 승부勝負운수運數존망存亡이치理致나라와 서로 겨루어보았더라면 아마도 쉽게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아! 나라에게 뇌물로 바친 땅을 천하의 지모智謀가 뛰어난 신하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라를 섬기는 마음으로 천하의 기재奇才를 예우하여, 힘을 합쳐 서쪽 〈나라에〉 대항했더라면, 내 생각으로는 아마 나라 사람들이 밥조차 목으로 넘기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 슬프도다! 이와 같이 좋은 형세形勢가 있었으나 나라 사람의 누적되어 온 위세威勢에 겁먹어, 날마다 땅이 깎이고 달마다 땅을 떼어주어 멸망의 길로 나아갔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누적되어 온 위세에 겁먹지 말아야 할 것이다.
대저 그 육국六國나라와 함께 다 제후의 나라이니, 그 세력이 나라보다는 약하였지만, 오히려 나라에 뇌물을 주지 않고도 그를 이길 수 있는 형세形勢가 있었다.
만약 천하의 강대함을 가지고서도 육국六國이 걸은 파멸의 전철을 밟는다면, 이것은 또한 육국六國보다 못한 것이다.


역주
역주1 六國 : 이 글은 齊‧楚‧燕‧趙‧魏‧韓의 六國이 멸망한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蘇洵은 이 六國이 멸망한 원인을 ‘강한 秦나라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그 禍를 면하기 위해 각국이 자신들의 국토를 뇌물로 바친 데에 있다.’고 분석하였다. 사실 蘇洵은 이 글 말미에 “천하의 강대함을 가지고서도 六國이 걸은 파멸의 전철을 밟는다면, 이것 또한 六國보다 못하다.”라고 하여, 〈六國論〉을 통해 宋이 契丹과의 화친을 통해 歲幣를 주면서 일시적 안녕을 꾀하고 있는 현실을 풍자한 것이라 하겠다.
역주2 六國破滅 : 六國은 전국시대 秦나라 동쪽에 있었던 齊‧楚‧燕‧趙‧魏‧韓의 여섯 나라를 말한다. 秦始皇 17년(B.C. 230)에 韓나라, 19년에 趙나라, 22년에 魏나라, 24년에 楚나라, 25년에 燕나라, 26년에 齊나라가 각각 秦나라에 멸망하였다.
역주3 賂秦 : 본문에서는 전적으로 土地와 城邑을 바쳐 秦나라를 회유한 것을 말한다.
역주4 : 백성들의 취락지로 큰 곳은 ‘都’라 하였고 작은 곳은 ‘邑’이라 하였다.
역주5 : 저본에는 없으나, 《嘉祐集》에 의해 보충하였다.
역주6 古人云……火不滅 : 《戰國策》 〈魏策〉과 《史記》 〈魏世家〉에 같은 내용이 보인다.
역주7 : 秦나라 왕족의 姓이다. 여기서는 秦나라를 대칭한 것이다.
역주8 至丹以荊卿爲計 : 丹은 燕나라 太子로, 姓은 姬씨요, 이름이 丹이다. 燕王 喜의 아들로 荊軻를 秦나라 자객으로 보내 秦始皇을 시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秦나라가 군대를 내어 燕나라를 공격하자 燕王 喜가 太子 丹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秦始皇에게 바쳤으나 결국 멸망하였다. 荊卿은 荊軻로 戰國時代 衛나라 사람이다. 燕나라 太子 丹의 門客이 되었다가 태자의 명을 받고 秦始皇을 시해하려다 실패하여 피살되었다.
역주9 趙嘗五戰于秦 二敗而三勝 : 이 말은 蘇秦이 燕 文侯에게 유세하면서 대략적으로 한 말이다. 실제로 趙‧秦 간의 전쟁은 다섯 번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趙나라가 두 번만 진 것도 아니다.
역주10 秦擊趙者再 李牧連却之 : 趙 幽繆王 3년(B.C. 233)에 秦나라 군대가 趙나라를 공격하니, 趙나라 장군 李牧이 肥下에서 싸워 秦나라 군대를 격퇴하였고, 다음해 秦나라가 다시 침입해오자 李牧이 다시 물리쳤다. 《史記 李牧列傳》
역주11 洎牧以讒誅 邯鄲爲郡 : B.C. 229년 秦나라 장수 王翦이 趙나라를 공격하자 李牧이 秦軍을 물리쳤다. 秦나라는 이에 反間計를 써서 趙나라 寵臣인 郭開를 매수하여 趙王에게 李牧이 반란을 꾀한다고 모함하니, 趙王이 그 말을 믿고 사람을 보내 李牧의 兵權을 뺏고자 하였다. 李牧이 병권을 내놓으려 하지 않자 결국 피살되었다. 李牧이 죽은 뒤 趙나라는 멸망하였고, 秦나라는 趙나라 수도에 邯鄲郡을 설치하였다. 《史記 李牧列傳》
역주12 革滅殆盡 : 革滅은 ‘소멸하다’, ‘멸망하다’의 뜻이다. 즉 六國의 멸망이 거의 끝나간다는 뜻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