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荊川嘗讀韓非子八諫篇
하고 謂是一面
이라하니 余於老泉此論亦云
이라
注
先生曰 吾知其人矣니 是不近人情者로 鮮不爲天下患이라하니라
安石之母死에 士大夫皆弔호되 先生獨不往하고 作辨奸一篇하니 其文曰
事有必至면 理有固然이니 惟天下之靜者라야 乃能見微而知著니라
人事之推移와 理勢之相因은 其疎闊而難知하니 變化而不可測者는 孰與天地陰陽之事리오
以吾觀之하니 王衍之爲人은 容貌言語가 固有以欺世而盜名者라
然
이나 하고 與物浮沈
하여 使晉無
하고 僅得中主
면 雖衍百千
이라도 何從而亂天下乎
아
然而不學無文
하며 容貌不足以動人
하고 言語不足以眩世
하니 非
之鄙暗
이면 亦何從而用之
리오
今有人口誦孔老之言하고 身履夷齊之行에 收召好名之士不得志之人하여 相與造作言語하고 私立名字하여 以爲顔淵孟軻復出이나 而陰賊險狠하여 與人異趣하니
今也不然
하여 衣臣虜之衣
하고 하며 而談詩書
하니 此豈其情也哉
아
以蓋世之名으로 而濟其未形之患이면 雖有願治之主好賢之相이 猶將擧而用之라도 則其爲天下患必然而無疑者니 非特二子之比也니라
使斯人而不用也면 則吾言爲過하고 而斯人有不遇之嘆이면 孰知禍之至於此哉오
不然이면 天下將被其禍하고 而吾獲知言之名이니 悲夫라
注
형천荊川이 일찍이 《한비자韓非子》 〈팔간편八諫篇〉을 읽어보고 말하기를 “이는 하나의 조요경照妖鏡이다.”라 하였는데, 나는 노천老泉의 이 논論 또한 그렇다고 생각한다.
注
장문정공張文定公(장방평張方平)이 〈노소선생묘표老蘇先生墓表〉를 지어 말하였다.
“가우嘉祐 초년初年에 왕안석王安石의 명성名聲이 비로소 성盛하여 당우黨友들이 한때 〈그 사람에게〉 쏠렸다.
그 〈명상제命相制〉에는 ‘백성이 생겨난 이래 수인數人일 따름이다.’라 하였다.
언어言語를 조작造作하여 심지어 성인聖人에 가깝다고까지 하였다.
구양수歐陽脩 또한 그를 잘 보아 선생先生(소순蘇洵)에게 그와 교유하라고 권하였다.
그리고 왕안석王安石 또한 선생先生과 교유하기를 원하였다.
선생先生이 말하기를 ‘나는 그 사람을 잘 아니 그런 사람은 인정人情에 가깝지 않은 자로, 천하天下의 근심거리가 되지 않음이 드물다.’라 하였다.
왕안석王安石의 모친이 죽자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조문弔問하였으나 선생先生만은 홀로 가지 않고 〈변간론辨奸論〉 한 편을 지었으니 그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에 반드시 이르는 것이 있으면 이치상 실로 그렇게 되는 것이 있으니, 오직 천하의 고요한 자라야 곧 미세한 것을 보고 드러난 것을 알 수 있다.
달무리가 지고 바람이 불면 주춧돌이 축축해지고 비가 옴은 사람마다 알고 있다.
사람의 일의 추이推移와 이치의 형세形勢가 서로 인과因果가 됨은 소활하여 알기 어려우니, 변화變化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천지天地와 음양陰陽의 일에 비하여 어떠한가?
그런데 현자賢者도 모름이 있음은 그 까닭이 어째서인가?
호오好惡가 그 안을 어지럽히고 이해利害가 그 바깥을 빼앗기 때문이다.
옛날에 산거원山巨源(산도山濤)이 왕연王衍을 보고 말하기를 “천하天下의 창생蒼生을 그르치는 사람은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라 하였고,
곽분양郭汾陽(곽자의郭子儀)이 노기盧杞를 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이 뜻을 얻으면 내 자손은 남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라 하였다.
지금 그것을 말하건대 그 이치가 실로 볼 만한 것이 있다.
내가 보기에는 왕연王衍의 위인爲人은 용모容貌와 언어言語가 실로 세상을 속이고 명예名譽를 훔침이 있었지만,
원망하지 않고 추구함이 없이 사물과 더불어 부침浮沈하여, 설사 진晉나라에 혜제惠帝가 없고 중간쯤 되는 임금만 겨우 얻었더라도 왕연王衍 같은 사람이 백천 명이라 한들 무엇 때문에 천하가 어지럽혀졌겠는가?
그러나 노기盧杞의 간사함은 실로 나라를 그르치기에 족하였다.
그런데 배우지 않아 문채가 없으며 용모容貌는 사람을 움직이기에 부족하고 언어言語는 세상을 현혹시키기에 부족하니, 당 덕종唐 德宗의 비루하고 어두움이 아니라면 또한 무엇 때문에 그를 등용했겠는가?
이로써 말하건대 두 공公이 두 사람을 헤아림에 또한 더러 꼭 그렇지 않은 점이 있었다.
지금 어떤 사람이 입으로는 공자孔子와 노자老子의 말을 외고, 몸으로는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행실을 밟는데, 명예名譽를 좋아하는 선비와 뜻을 얻지 못한 사람을 거두어 불러들여 서로 더불어 언어言語를 조작하고 사사로이 명자名字를 세워 안연顔淵과 맹가孟軻가 다시 나왔다고 하나, 음험하고 잔인하며 험악하고 악독하여 남들과는 의취意趣가 다르다.
이는 왕연王衍과 노기盧杞가 합쳐서 한 사람이 된 것이니 그 화禍를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대체로 얼굴이 더러워지면 씻는 것을 잊지 않고, 옷이 더러워지면 빠는 것을 잊지 않으니, 이것은 사람의 지극한 정情이다.
지금 〈이 사람은〉 그렇지 않아서 포로의 옷을 입고 개‧돼지의 음식을 먹으며 죄수의 머리털에 상喪을 당한 사람의 낯짝으로 《시경詩經》‧《서경書經》을 담론하니, 이것이 어찌 그 정이겠는가?
범사가 사람의 정에 가깝지 않은 자는 크게 간특姦慝하지 않음이 드문데, 수조豎刁‧역아易牙‧개방開方이 이런 작자들이다.
세상을 덮는 명성으로 형체가 드러나지 않은 근심을 저지르니, 비록 다스리기를 원하는 임금과 현자賢者를 좋아하는 재상이 있어서 오히려 천거하여 그들을 쓴다 해도 반드시 천하天下의 근심이 될 것임은 의심할 것이 없으니, 〈그 해독이〉 다만 앞의 두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손자孫子가 말하기를 “용병用兵에 뛰어난 자는 혁혁赫赫한 공功이 없다.”라 하였다.
만약 이러한 사람이 등용되지 않으면 내 말이 잘못된 것이고, 이러한 사람이 때를 만나지 못했다는 탄식을 하면, 누가 화禍가 여기까지 이를 줄 알겠는가?
그렇지 않아 〈이러한 사람이 등용되면〉 천하天下는 그 화를 입을 것이고, 나는 식견 있다는 명예를 얻을 것이니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