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議論簡嚴하고 情事曲折하니 其氣格이 大略從公穀來라
唐神堯初에 長史味道가 刺眉州라가 卒於官한대 一子留于眉하니 眉之有蘇氏는 自此始而譜不及者는 親盡也라
自吾之父로 以至吾之高祖하여는 仕不仕와 娶某氏와 享年幾와 某日卒皆書나 而他不書者는 何也오 詳吾之所自出也니라
自吾之父로 以至吾之高祖하여는 皆曰諱某나 而他則遂名之는 何也오 尊吾之所自出也니라
譜는 爲蘇氏作이나 而獨吾之所自出을 得詳與尊은 何也오 譜는 吾作也니라
嗚呼라 觀吾之譜者는 孝悌之心이 可以油然而生矣리라
情見於親
하고 親見於服
하며 하고 而至於無服
하니 無服則親盡
이요 親盡則情盡
하며 情盡則喜不慶憂不弔
하니 喜不慶憂不弔
면 則塗人也
라
吾所與相視如塗人者도 其初엔 兄弟也며 兄弟其初엔 一人之身也라 悲夫라
勢는 吾無如之何也니 幸其未至於塗人也에 使其無至於忽忘焉이 可也라
嗚呼라 觀吾之譜者는 孝悌之心이 可以油然而生矣리라
系之以詩하니 曰 吾父之子는 今爲兄이니 吾疾在身이면 兄呻不寧이라
數世之後엔 不知何人하여 彼死而生에 不爲戚欣이라 兄弟之情은 如足與手어늘 其能幾何오 彼不相能은 彼獨何心고
注
의론議論이 간결하고 엄정하며 정사情事가 변화가 많으니, 글의 기개와 품격이 대략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과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을 따랐다.
소씨족보蘇氏族譜는 소씨 일족을 계통에 따라 적어놓은 것이다.
소씨蘇氏는 고양高陽(전욱顓頊)에게서 나와 천하에 널리 뻗어나갔다.
당唐 신요神堯(고조高祖) 초기에 장사長史 소미도蘇味道가 미주자사眉州刺史로 재임 중에 세상을 떠났는데 한 아들이 미주眉州에 남아 있었으니, 미주眉州에 소씨蘇氏가 있게 된 것은 이로부터 비롯되었으나 족보에 미치지 않은 것은 친족관계가 다하였기 때문이다.
친족관계가 다하면 어찌하여 미치지 않게 되는 것인가? 족보는 친족을 위하여 만들기 때문이다.
모든 자식들에 대해서는 기록하면서 손자들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세대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로부터 나의 고조高祖에 이르기까지는 벼슬하고 하지 않은 것과, 아무 씨氏에게 장가든 것과, 몇 살까지 사신 것과, 어느 날 돌아가신 것을 모두 기록하면서 다른 분들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내가 나온 계보를 자세히 하기 위해서이다.
나의 아버지로부터 나의 고조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휘諱가 무엇이었다고 하면서 다른 분들에 대해서는 마침내 〈휘諱자를 넣지 않고 곧바로〉 이름을 적는 것은 어째서인가? 내가 나온 계보를 높이고자 해서이다.
족보는 소씨를 위하여 만든 것인데 유독 내가 나온 계보만을 자세히 하고 높이는 것은 어째서인가? 족보는 내가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아! 나의 족보를 보는 사람들은 부모에게 효도孝道하고 형제간에 우애友愛하는 마음이 유연油然히 생겨나게 될 것이다.
정情은 친족관계에서 드러나고 친족관계는 상복喪服에서 드러나며, 상복은 참최斬衰에서 시작하여 시마緦麻에 이르고, 상복을 입지 않는 데까지 이르니, 상복을 입지 않으면 친족관계가 다한 것이고 친족관계가 다하면 정情도 다하며, 정情이 다하면 기쁜 일에도 경하하지 않고 근심스런 일에도 슬퍼하지 않으니, 기쁜 일에도 경하하지 않고 근심스런 일에도 슬퍼하지 않으면 곧 길거리의 남처럼 된다.
내가 서로 길거리의 남처럼 여기는 사람도 처음에는 형제였으며, 형제도 처음에는 한 사람의 몸이었다.
슬프다! 한 사람의 몸이 나뉘어 길거리의 남처럼 되는 데 이르렀으니 내가 족보를 만든 까닭이다.
족보를 만든 뜻은, 한 사람의 몸이 나뉘어 길거리의 남처럼 되는 데 이르는 것이 형세인데,
형세는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바라건대 길거리의 남처럼 되는 데 이르기 전에 소홀히 하고 잊어버리는 데 이르지 않도록 해야 하겠다.
아아! 나의 족보를 보는 사람들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마음이 유연油然히 생겨나게 될 것이다.
다음과 같은 시詩를 붙인다. 내 아버지의 아들이, 지금 나의 형이니, 내 몸에 병이 생기면, 형도 신음하며 편치 못하네.
몇 세대가 지난 뒤에는, 어떤 사람인지도 알지 못하게 되어, 저들이 죽고 사는 것을, 슬퍼하거나 기뻐하지 않는다네. 형제의 정情은, 수족手足과 같거늘, 이렇게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저들이 서로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은, 저들이 유독 어떤 마음을 지녀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