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挾數用術
하여 以制一時之利害
엔 不如
하고 揣摩天下之勢
하여 擧指搖目
하여 以劫制
엔 不如
하니 微此二人
이면 則天下不歸漢
이요 而高帝
는 乃木彊之人而止耳
라
然이나 天下已定에 後世子孫之計는 陳平張良智之所不及하니 則高帝常先爲之規畫處置하여 以中後世之所爲하여 曉然如目見其事하여 而爲之者라
蓋高帝之智는 明於大而暗於小가 至於此而後에 見也라
帝嘗語
曰
은 重厚少文
이나 然
이나 安劉氏
는 必勃也
니 可令爲
라하니라
昔者
에 武王沒
에 成王幼而
叛
하니 帝意
에 將相大臣及諸侯王
에 有武庚祿父者
면 而無有以制之也
라
獨計以爲家有主母
면 而豪奴悍婢
가 不敢與弱子抗
이요 呂氏佐帝定天下
하여 爲大臣素所畏服
하니 獨此可以鎭壓其邪心
하여 以待
之壯
이라
呂后旣不可去하니 故로 削其黨하여 以損其權하여 使雖有變이라도 而天下不搖라
嗚呼
라 彼豈獨於噲不仁耶
아 且噲與帝偕起
하여 拔城陷陣
하며 功不爲少矣
요 方
嗾項莊時
에 微噲誚讓羽
면 則漢之爲漢
을 未可知也
라
夫噲之罪가 未形也요 惡之者誠僞도 未必也요 且高帝之不以一女子로 斬天下功臣도 亦明矣라
彼其娶於呂氏
하고 呂氏之族
에 若
輩
는 皆庸才
하여 不足恤
이라
獨噲豪健하여 諸將所不能制니 後世之患이 無大於此矣라
樊噲死면 則呂氏之毒이 將不至於殺人이니 高帝以爲是足以死而無憂矣라
或謂噲於帝最親하니 使之尙在라도 未必與産祿叛이라
夫
은 皆
요 而綰又最爲親幸
이나 然及高帝之未崩也
에 皆相繼以逆誅
하니 誰謂百歲之後
에 之人
이 見其親戚乘勢爲帝王
이면 而不欣然從之耶
아
注
愚謂高帝死而呂后獨任陳平하여 未必不由不斬噲一着이요 且噲不死라도 其助祿産之叛亦未必이라
觀其譙羽鴻門與排闥而諫이면 噲似有氣岸而能守正者니 豈可以屠狗之雄而遽逆其詐哉아
蘇氏父子兄弟는 往往以事後成敗하여 摭拾人得失이 類如此라
注
비록 한漢나라의 성패成敗를 명확히 논의한 것은 아니지만, 행문行文은 오히려 자유자재로 거침이 없어 좋아할 만하다.
한 고조漢 高祖는 술수術數를 가지고 술법術法을 써서 한때의 이해利害를 제어하는 데에는 진평陳平만 못하였고, 천하天下의 형세形勢를 헤아려 손가락을 들고 눈을 깜박여서 항우項羽를 위협하고 통제하는 데에는 장량張良만 못하였으니, 이들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천하는 한漢나라의 것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고, 고조高祖는 나무처럼 뻣뻣한 융통성 없는 사람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천하가 평정된 뒤에 후세 자손들을 위한 계획을 세우는 데에는 진평陳平과 장량張良의 지혜智慧가 〈고조高祖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고조高祖가 언제나 앞서 그것을 계획하고 처리하여 후세에 해야 할 일에 딱 들어맞아, 마치 눈으로 환히 그 일을 직접 보고서 한 것 같았다.
대체로 고조高祖의 지혜는 큰 일에는 밝았지만 작은 일에는 어두웠음이 여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드러난다.
고조高祖가 일찍이 여후呂后에게 “주발周勃은 중후重厚하고 겉치레는 적으나, 유씨劉氏를 안정케 해줄 사람은 반드시 주발周勃일 것이니, 그를 태위太尉에 임명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바로 그때는 유씨劉氏들이 이미 안정되어 있던 때였거늘, 주발周勃이 또 그 누구를 안정케 해준다는 것이었을까?
그러므로 내 생각으로는, 고조高祖가 태위太尉의 벼슬을 주발周勃에게 주라고 부탁한 것은 여씨呂氏의 화禍가 있을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데도 그가 여후呂后를 제거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옛날 주 무왕周 武王이 죽고 성왕成王이 아직 어렸는데 삼감三監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고조高祖의 생각으로는 자신이 죽고 난 뒤에 장군將軍‧재상宰相‧대신大臣‧제후왕諸侯王들 중에 무경武庚 녹보祿父 같은 자가 있으면 제어할 방법이 없게 될지 모른다고 여겼을 것이다.
〈고조高祖는〉 유일한 계책으로 ‘집안에 주모主母가 있으면, 기운 있는 사내종이나 사나운 계집종이 감히 약한 자식에 대하여 항거하지 못할 것이고, 여후呂后는 나를 도와서 천하를 평정하여 대신들이 평소에도 두려워하고 복종하니, 오직 그녀만이 그들의 사악한 마음을 진압하여 뒤를 이을 자식이 장성할 수 있게 할 것이다.’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후呂后를 제거하지 아니하였던 것은 혜제惠帝를 위한 계책이었던 것이다.
여후呂后는 이미 제거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무리들을 쳐내어 그녀의 권력을 줄임으로써, 변고가 생기더라도 천하가 요동치 않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번쾌樊噲와 같이 공이 큰 사람도 하루아침에 의심도 없이 죽이려 했던 것이다.
아아! 고조高祖는 어찌 번쾌樊噲에게만 인자仁慈하지 않았단 말인가? 게다가 번쾌樊噲는 고조高祖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적의 성을 함락시키고 적진을 쳐부수며 적지 않은 공을 세웠고, 〈홍문鴻門에서〉 범증范增이 항장項莊을 시켜 〈고조高祖를 죽이려 했을〉 때에 번쾌樊噲가 항우項羽를 꾸짖지 않았더라면, 곧 한漢나라가 한漢나라를 세울 수 있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번쾌樊噲를 미워하여 〈번쾌樊噲가〉 척씨戚氏를 죽이려 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자, 당시 번쾌樊噲는 연燕나라를 정벌하러 나가 있었거늘 즉시 진평陳平과 주발周勃에게 명하여 진영陣營으로 가서 번쾌樊噲를 죽이도록 하였다.
그때 번쾌樊噲의 죄가 드러난 것도 아니었고, 그를 미워한 자의 말의 진위眞僞도 확인할 수 없었으며, 또한 고조高祖가 한 여자 때문에 천하의 공신을 죽이지 않는 것도 분명하였다.
번쾌樊噲는 여씨呂氏 집안에 장가를 들었고, 여씨呂氏의 일족 중 여산呂産이나 여록呂祿 같은 무리들은 모두 용렬庸劣한 인물이어서 걱정할 것이 못 되었다.
오직 번쾌樊噲만이 호걸豪傑이어서 여러 장수들도 제어할 수 없는 인물이었으니, 후세의 환난患難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조高祖가 여후呂后를 보는 태도는 마치 의사醫師가 독초毒草를 보는 것과 같았다.
그 독이 단지 사람의 병만 치료할 수 있어야지 사람을 죽이는 데에 이르게 해서는 안 될 따름이다.
번쾌樊噲가 죽으면 여씨呂氏의 독이 사람들을 죽이는 데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니, 고조高祖는 그래야만 죽은 뒤에도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저 진평陳平과 주발周勃이 고조高祖의 걱정거리를 남겨놓았던 것이다.
번쾌樊噲는 혜제惠帝 6년에 죽었으니, 천명天命이었다.
그가 살아 있었더라면, 여산呂産과 여록呂祿을 속여 넘길 수가 없었을 것이고, 태위太尉인 주발周勃이 북군北軍으로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번쾌樊噲가 고조高祖와 가장 친하였으니, 그가 살아 있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여산呂産‧여록呂祿과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라 한다.
한신韓信‧경포黥布‧노관盧綰은 모두 왕의 신분이었고, 노관盧綰은 또 가장 임금의 총애를 받았지만, 고조高祖가 죽기도 전에 모두 연이어 반역죄로 처형을 당하였으니, 〈고조高祖가〉 죽고 난 뒤에 사람을 때려죽여 땅에 묻고 개백정 노릇이나 하던 번쾌樊噲가 그의 친척이 시세時勢를 타서 제왕帝王이 되는 것을 본다면 흔쾌히 따르지 않을 것이라 누가 말하겠는가?
나는 그래서 “저 진평陳平과 주발周勃이 고조高祖의 걱정거리를 남겨놓았다.”라고 한 것이다.
注
내 생각으로는, 고조高祖가 죽고 여후呂后가 진평陳平에게 모든 일을 맡겼으니 번쾌樊噲를 제일 먼저 참하도록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할 수도 없고, 또 번쾌樊噲가 죽지 않았다 해도 반드시 여록呂祿‧여산呂産의 반란을 도왔을 것이라 할 수도 없다.
그가 홍문연鴻門宴에서 항우項羽를 꾸짖었던 일과 문을 밀어제치고 들어가 간諫한 일로 볼 때, 번쾌樊噲는 마음이 견실하고 정의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인 듯한데, 어찌 개 잡는 사나이라 하여 갑자기 그가 가장하고 있을 것이라 지레 짐작할 수 있단 말인가!
소씨蘇氏 부자父子와 형제兄弟들은 왕왕 사후事後의 성패成敗에 의거해서 남의 득실을 주워담는 것이 대개 이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