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宋은 以忠厚立國하여 似失之弱하니 而蘇氏父子往往注議於此하여 以矯當世라
治天下者
는 定所
이니 所尙一定
이면 至於千萬年而不變
하여 使民之耳目純于一
하고 而子孫有所守
면 易以爲治
라
夫豈惟其民之不忘其功하여 以至于是리오 蓋其子孫이 得其祖宗之法하여 而爲依據하여 可以永久니라
視天下之所宜尙하여 而固執之하여 以此而始하고 以此而終하니 不朝文而暮質하여 以自潰亂이라
後世
에 有
者
가 說漢文帝
하여 亦欲先定制度
나 而其說不果用
이라
今者에 天下幸方治安하니 子孫萬世帝王之計를 不可不預定于此時라
然이나 萬世帝王之計는 常先定所尙하여 使其子孫으로 可以安坐而守其舊요 至於政弊然後엔 變其小節하되 而其大體는 卒不可革易이라
今也에 考之于朝野之間하여 以觀國家之所尙者하니 而愚猶有惑也라
何則고 天下之勢는 有强弱하니 聖人審其勢하여 而應之以權하니라
勢彊矣한대 彊甚而不已면 則折이오 勢弱矣한대 弱甚而不已면 則屈이라
夫彊甚者면 威竭而不振이요 弱甚者면 惠褻하여 而下不以爲德이라
乘强之威하여 以行惠면 則惠尊이요 乘弱之惠하여 以養威면 則威發하여 而天下震慄이라
然而不知彊弱之勢者면 有殺人之威하되 而下不懼하고 有生人之惠하되 而下不喜하니
故로 有天下者는 必先審知天下之勢而後에 可與言用威惠라
不先審知其勢하여 而徒曰我能用威요 我能用惠者라하여는 未也라
故로 有彊而益之以威하고 弱而益之以惠면 以至於折與屈者니 是는 可悼也라
譬之人身
컨대 將欲
하여 以養其生
하면 必先審觀其性之爲陰
과 其性之爲陽
하여 而投之以藥石
이라
藥石之陽이면 而投之以陰하고 藥石之陰이면 而投之以陽하니 故로 陰不至於涸이요 而陽不至於亢이라
苟不能先審觀己之爲陰과 與己之爲陽하고 而以陰攻陰하고 以陽攻陽하면 則陰者는 固死於陰이요 而陽者는 固死於陽하여 不可救也라
是以로 善養身者는 先審其陰陽하고 而善制天下者는 先審其彊弱하여 以爲之謀라
昔者에 周有天下엔 諸侯大盛하여 當其盛時엔 大者는 已有地五百里로되 而畿內는 反不過千里하니 其勢爲弱이라
然
이나 方其
엔 諸侯無小大
히 莫不臣伏
하니 弱之勢
가 未見於外
라
及其後世失德하여 而諸侯禽奔獸遯하여 各固其國하여 以相侵攘이나 而其上之人卒不悟하고 區區守姑息之道하여 而望其能以制服彊國하니 是謂以弱政으로 濟弱勢라하니라
하고 日趨於彊大
하여 及其子孫
엔 已幷天下
나 而亦不悟
하고 專任法制
하여 以斬撻平民
하니 是謂以彊政
으로 濟彊勢
라하니라
周拘於惠
하여 而不知權
이요 秦勇於威
하여 而不知
이니 二者
는 皆不審天下之勢也
라
吾宋制治
는 有縣令
이요 有
요 有
하니 以大系小
하여 絲牽繩聯
하여 總合於上
이라
雖其地在萬里外하고 方數千里에 擁兵百萬이라도 而天子一呼于殿陛間하여 三尺豎子로 馳傳捧詔하여 召而歸之京師면 則解印趨走하며 惟恐不及하니라
由賞與刑與兵之不得其道하여 是以로 有弱之實著於外焉이라
曰 官吏曠惰하고 職廢不擧하되 而敗官之罰을 不加嚴也요
多贖數赦하여 不問有罪하니 而典刑之禁이 不能行也요
冗兵驕狂하여 負力幸賞하되 而維持姑息之恩하여 不敢節也요
若此類者가 太弱之實也니 久而不治면 則又將有大於此하여 而遂浸微浸消하여 釋然而潰하여 以至於不可救止者가 乘之矣라
然이나 愚以爲弱在於政이요 不在於勢니 是謂以弱政으로 敗彊勢라하니라
今에 夫一輿薪之火면 衆人之所憚하여 而不敢犯者也나 擧而投之河면 則何熱之能爲리오
是以로 負彊秦之勢나 而溺於弱周之弊이니 而天下不知其彊焉者는 以此也라
當其卽位하여 委政不治하니 諸侯竝侵하여 而人不知其國之爲彊國也라
하고 하고 而發兵
하여 擊趙魏
하니 趙魏衛盡走請和
하고 而齊國人人
도 震懼
하여 不敢飾非者
라
況今以天子之尊으로 藉郡縣之勢하여 言脫於口면 而四方響應하니 其所以用威之資가 固以完具라
今誠能一留意於用威하여 一賞罰하고 一號令하고 一擧動하여 無不一切出於威하고
嚴用刑法하여 而不赦有罪하며 力行果斷하되 而不牽衆人之是非하고
用不測之刑하고 用不測之賞하여 而使天下之人으로 視之如風雨雷電하여 遽然而至하고 截然而下하여 不知其所從發하되 而不可逃遁하니라
朝廷如此然後에 平民益務撿愼이요 而奸民猾吏도 亦常恐恐然懼刑法之及其身하여 而斂其手足하여 不敢輒犯法이라
政彊矣하여 爲之數年이면 而天下之勢는 可以復彊이라
愚故曰 乘弱之惠以養威면 則威發而天下震慄이라하니라
然則以當今之勢로 求所謂萬世爲帝王이면 而其大體는 卒不可革易者니 其尙威而已矣라
然이나 孰知夫萬世之間에 其政之不變하여 而必曰威耶라하니라
久而政弊면 變其小節하고 而參之以惠하여 使不至若秦之甚可也요 擧而棄之過矣라하니라
武王
은 乘紂之暴
하여 出民於
之地
하니 苟又遂多殺人
하고 多刑人
하여 以爲治
면 則民之心去矣
리라
桀之惡固無以異紂나 然其刑不若紂暴之甚也하여 而天下之民이 化其風하여 淫惰不事法度라
書
에 曰
이라하고 而又
하여 於是
에 誅鋤其强梗怠惰不法之人
하여 以定紛亂
이라
桓公用管仲하니 管仲之書에 好言刑이라 故로 桓公之治는 常任刑이요
요 其佐
도 皆不說以刑法
하고 其治
도 亦未嘗以刑爲本
하되 而號亦爲霸
라하니라
然則今之勢는 何爲不可用刑이요 用刑이라도 何爲不曰王道리오
注
王遵巖이 曰 老泉此論은 於宋煞是對病之藥이어늘 惜乎라 當時之不能用也여
03. 천하天下의 형세形勢를 살피는 것에 대한 논문
注
송宋나라는 충후忠厚로 나라를 세워 결점이 연약함에 빠진 것 같았으니 소씨蘇氏 부자父子는 종종 여기에 의논을 집중하여 당세當世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그의 문장은 되짚어가면서 강조하고 전환轉換하여 문장의 수미首尾를 잘 조화시킨 묘미를 볼 수 있다.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숭상崇尙할 바(국시國是)를 정해야 하니, 숭상할 바가 일단 정해지면 천년만년에 이르도록 바꾸지 않고, 백성들의 이목耳目이 오로지 〈숭상할 바의〉 한 곳에만 쏠리게 하고, 〈통치자의〉 자손들도 〈그것을〉 고수하는 바가 있으면 쉽게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삼대三代의 성인聖人 가운데에 그 후세가 멀게는 7, 8백 년에까지 이르기도 했다.
어찌 오직 그 백성들이 그 공로를 잊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에까지 이르렀겠는가? 대개 그 자손들이 그 조상祖上의 법도法道를 얻어서 〈치국治國의〉 근거로 삼았기에 그렇게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夏나라는 충忠(충성忠誠)을 숭상하였고, 상商나라는 질質(질박質朴)을 숭상하였으며, 주周나라는 문文(문화文化)을 숭상하였다.
천하 사람들이 마땅히 숭상할 바를 살피고 정하여 그것을 고집스럽게 집행하여 그것으로 시작하고 그것으로 끝났으니, 아침에는 문文을 숭상하다가 저녁이면 질質을 숭상하여 스스로 무너져 혼란에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성인聖人이 나온 뒤에는 반드시 먼저 그의 일대一代에 숭상할 것을 정했던 것이다.
주周나라의 시대에는 주공周公이 주周나라를 위하여 예禮를 만드니, 천하가 마침내 문文을 숭상하게 되었다.
후대로 내려와 가의賈誼라는 사람이 한 문제漢 文帝를 설득하여, 그 역시 먼저 나라의 제도를 정하려 했지만, 그의 말은 결국 채용되지 않았다.
지금의 천하는 다행히도 잘 다스려져 편안하니, 자손만대에까지 미칠 제왕帝王의 계책을 지금 이때에 미리 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만대에까지 미칠 제왕의 계책은 항상 숭상할 바를 먼저 정해서, 그 자손으로 하여금 편안히 앉아서도 그 옛 제도를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정치의 폐단이 생긴 뒤에는 그 사소한 항목만 고치되 그 큰 체제는 끝까지 바꾸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 누리는 세월이 장구할 것이고, 백성들도 구차하고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지금 조정朝廷과 재야在野에서 점검하여 국가가 숭상하는 바를 살펴보니, 나는 오히려 의혹이 생긴다.
무엇 때문인가? 천하天下의 형세形勢에는 강한 때와 약한 때가 있으니, 성인聖人은 그 형세를 잘 살펴서 권변權變으로 거기에 응한다.
형세가 강한데 강함이 더 심해져 멈추지 않으면 꺾이고 말 것이고, 형세가 약한데 약함이 더 심해져 멈추지 않으면 굽히고 말 것이다.
성인聖人이 그것을 저울질해서 심하게 꺾이거나 굽히는 데에 이르지 않게 한 것은 위엄威嚴과 은혜恩惠였다.
대저 강함이 너무 심하면 위엄이 다하여 다시 떨쳐 일어나지 못하고, 약함이 너무 심하면 은혜를 얕잡아 보고서 아랫사람들이 은덕恩德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약한 형세에 처하여서는 위엄을 이용함이 이롭고, 강한 형세에 처하여서는 은혜를 이용함이 이롭다.
강한 위엄에 편승해서 은혜를 베풀면 그 은혜는 존중되고, 약한 은혜에 편승해서 위엄을 기르면 그 위엄이 발동되어 천하가 떨게 된다.
그러므로 위엄과 은혜는 천하의 강하고 약한 형세를 조절하는 도구이다.
그러나 강약强弱의 형세形勢를 알지 못하는 자라면 사람을 죽이는 위엄威嚴이 있으되 아랫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살리는 은혜恩惠를 베풀되 아랫사람들이 기뻐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위엄은 다 없어지고, 은혜는 얕잡아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하를 가진 자는 반드시 먼저 천하의 형세를 잘 살펴 안 다음에야 위엄과 은혜의 이용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
먼저 그 형세를 잘 살펴 알지 못하면서, 공연히 “나는 위엄을 잘 쓸 수 있고, 나는 은혜를 잘 쓸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은 안 될 일이다.
그러므로 형세가 강한데 더욱 위엄을 부리고, 형세가 약한데 더욱 은혜를 베풀면 결과적으로 꺾이고 굽히는 데에 이를 것이니, 이는 실로 애석한 일이다.
사람의 신체에 비유해보면, 약물藥物을 복용하여 그 몸을 보양하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그 성질이 음성陰性인지 아니면 그 성질이 양성陽性인지를 잘 살펴보고서 약물을 투여해야 한다.
약물이 양성이면 음성에다 투여하고, 약물이 음성이면 양성에다 투여하니, 그래서 음성이 고갈됨에 이르지 않고 양성이 넘쳐남에 이르지 않는다.
만약 자신이 음성인지 양성인지를 잘 살펴보지도 않고, 자신이 음성인데도 음성의 약물로 다스리고, 자신이 양성인데도 양성의 약물로 다스리면, 음성인 자는 결국 음성의 약물에 죽게 되고, 양성인 자는 결국 양성의 약물에 죽게 되어 구제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양생養生을 잘하는 자는 먼저 자신이 음성인지 양성인지를 잘 살펴야 하고, 천하를 잘 통치하는 자는 먼저 그 천하의 형세가 강한지 약한지를 잘 살펴서 그 계책을 세워야 한다.
옛날 주周나라가 천하를 차지했을 때에는 제후국諸侯國이 크게 성하여, 한창이었던 때에는 큰 제후국은 이미 5백 리의 영토를 가졌는데도 기내畿內(천자天子의 직할지直轄地)는 도리어 천 리를 넘지 않았으니, 그 형세는 약한 것이었다.
진秦나라가 천하를 차지했을 때에는 〈천하를〉 나누어 군郡과 현縣을 만들어 〈권력을〉 서울의 〈천자에게로〉 집중하니, 지방의 군수郡守나 현령縣令에게는 큰 권력이 없었다.
늘이고 줄이며 나아가게 하고 물러나게 하는 것이 천자에게 있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그 형세는 강한 것이었다.
〈그러나 주대周代의〉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이 천자의 자리에 있을 때에는 제후들은 크거나 작거나 신하로 복종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약한 형세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 후세에 이르러 덕德을 잃게 되자 제후들은 마치 금수가 날뛰듯 제각기 자기의 나라를 굳게 지키면서 서로간에 침략하였으나, 위에 있던 〈천자는〉 끝내 깨닫지 못하고 소심하게 일시적 안일만 바라는 길을 고수하면서 강한 제후국들을 제압하고 복종시킬 수 있기를 바랐으니, 이를 일러 약한 정치政治로 약한 형세形勢를 구제하려 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주周의 천하는 끝내 약세弱勢로 망한 것이다.
진秦나라는 효공孝公 때부터 이미 그 세가 급속히 커지고 나날이 강대하여져서, 그의 자손 〈시황제始皇帝에〉 이르러 천하를 통일하였지만, 또한 깨닫지 못하고 오로지 법률法律에 따라 백성을 목 베고 매로 쳤으니, 이를 일러 강한 정치로 강한 형세를 구제하려 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진秦의 천하는 강함으로 망한 것이다.
주周나라는 은혜恩惠에 구속되어 권변權變을 몰랐고, 진秦나라는 위엄威嚴에 치우쳐 근본根本을 몰랐으니, 이 두 나라는 다 천하의 형세를 잘 살피지 못한 것이다.
우리 송宋나라의 통치제도는 현령縣令이 있고 군수郡守가 있으며 전운사轉運使가 있으니, 큰 벼슬로 작은 벼슬을 묶어서, 마치 실이 이어지고 새끼가 이어진 것처럼 모든 〈권력이〉 천자天子에게로 집중集中되어 있다.
비록 그 지역이 만 리 밖에 있고 사방 수천 리의 땅에 백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다 할지라도, 천자가 조정에서 일단 호출하여 삼척동자三尺童子에게라도 조서詔書를 받들어 역마를 타고 가서 그를 경사京師로 불러오게 하면, 그는 몸에 찼던 관인官印을 풀어놓고 황급히 달려오며 오직 제때에 도착하지 못할까 두려워한다.
이러한 형세라면 옛날 진秦나라가 의지했던 바의 강한 형세이다.
이처럼 국세國勢는 강하지만, 그 천하의 병폐는 약한 데에 병들어 있다.
아아! 강한 형세는 옛 진秦나라와 같으면서도 오히려 약함에 빠져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은혜恩惠를 베푸는 것에 익숙하고 위엄威嚴을 부리는 것을 겁내며, 은혜가 지나쳐서 위엄이 은혜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은혜에 익숙해지고 은혜가 지나치게 된 이유는 상 주는 일이 잦아서 공이 없는 자에게까지 베풀어지기 때문이다.
위엄 부리는 것을 겁내고 위엄이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형벌이 느슨하여 군軍의 위세를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상과 형벌과 군의 위세가 정도正道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로써 약한 실상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관리官吏가 일이 없어 게으름을 피우고 직무職務를 버려두고 거행하지 않아도 관직官職을 무너뜨린 데에 대한 처벌을 엄중하게 하지 않는 것이요,
죄인罪人에게 대부분 벌금형을 처하거나 자주 사면해주며 죄가 있어도 엄하게 묻지 않아 법령法令에 금지된 것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것이요,
쓸모없는 병사兵士들이 거만하고 횡포하게 굴면서 힘을 믿고 상 주기를 바라는데도 조정朝廷에서는 고식적인 은혜를 유지하여 감히 절제하지 않는 것이요,
또 장수將帥가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나갔다가 패전하여 말 한 마리조차 살려서 데려오지 못하였는데도 그 패전敗戰의 책임을 엄중히 따지지 않는 것이요,
서하西夏와 거란契丹의 세력이 강성해져 우리 중국을 무시하고 압박하여 금전과 비단을 요구하고 또 이미 바치고 있는 비단의 양을 늘려달라는 치욕을 받으면서도 성을 내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이 현재의 크게 약한 실상이니, 오래토록 이것을 바로잡지 않으면, 또한 장차 이보다 더 커져서 마침내는 점점 쇠약하고 쇠퇴하여 와르르 무너져 더 이상 구제할 수 없는 지경이 뒤따를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우리 송宋나라의 약함이 정치政治에 있는 것이지 형세形勢에 있는 것이 아니니, 이것을 일러 약한 정치로 강한 형세를 꺾어버린 것이라 하겠다.
지금 한 수레의 땔나무에 불이 나면 뭇 사람들은 두려워하면서 감히 가까이 가려하지 않지만, 그것을 들어서 강물에 던져버리면 무슨 열을 낼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옛 진秦나라와 같은 강한 형세를 가지고 있지만 약했던 주周나라의 병폐에 빠져 있으니, 천하의 사람들이 그 강함을 모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비록 그러하나, 약한 정치는 형세形勢의 약함처럼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가령 옛날 약한 주周나라의 형세形勢 같은 경우는 반드시 제후의 나라를 갈아치운 다음에야 강하게 할 수가 있었다.
천하의 제후는 갈아치우기가 본래 쉬운 일도 아니고, 이것은 또한 하루에 해낼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약한 정치라면 다만 위엄을 행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아침에 바꾸면 저녁이면 안정이 된다.
저 제齊나라는 옛날의 강한 나라였고, 위왕威王 또한 제齊나라의 현명賢明한 군주였다.
그가 임금의 자리에 올랐을 때 신하들에게 정치를 위임하고 돌보지 않으니, 다른 제후들이 서로 제齊나라를 침범하여, 사람들이 제齊나라가 강한 나라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이에 위왕威王은〉 하루아침에 성을 내고는, 만호萬戶의 땅을 떼어내어 즉묵대부卽墨大夫에게 봉하여주고, 아대부阿大夫와 일찍이 아대부阿大夫를 칭찬했던 자들은 불러서 삶아 죽이고, 군대를 내어 조趙‧위魏‧위衛를 치니 조趙‧위魏‧위衛가 다 패주하면서 화친을 청하였고, 제齊나라 백성들도 저마다 떨고 두려워하여 감히 잘못을 속이려 하지 않았다.
제 위왕齊 威王은 실로 그의 정치가 약했던 것을 알고 그의 위엄을 잘 부려서 약한 정치를 구제한 것이다.
하물며 지금은 천자의 존엄함으로써 군郡‧현縣의 세력에 기대어 말씀이 입에서 떨어지기만 하면 사방이 다 호응하니, 그 위엄을 부릴 수 있는 바탕이 본래부터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게다가 천하를 가진 사람은 하지 않는 게 걱정이지, 어찌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겠는가?
이제는 진실로 위엄을 부리는 데에 오로지 뜻을 두어, 상賞과 벌罰을 통일하고 호령號令을 통일하고 거동擧動을 통일해서 그 모든 것이 위엄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도록 하고,
형법을 엄중히 시행해서 죄 지은 자를 용서치 않으며, 일을 힘써 행하고 과단성 있게 처리하되 사람들의 시시비비에 끌려다니지 않고,
사람들이 예상치 못한 형벌을 사용하고 예상치 못한 상을 운용하여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비바람과 번개를 보듯 갑자기 닥치고 번쩍하며 떨어져 그것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모르게 하되, 피하여 달아날 수도 없게 한다.
조정에서 이와 같이 한 뒤에야 일반 백성들은 더욱 자신을 단속하고 신중히 하는 데에 힘을 쓸 것이고, 간악奸惡한 자들이나 교활狡猾한 관리官吏들도 항상 벌벌 떨며 형벌이 자신의 몸에 이를까 두려워하여 자신의 수족手足을 단속해서 감히 법을 함부로 어기지 않을 것이다.
정치를 강하게 하여 몇 년을 행하면 천하의 형세는 다시 강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약한 은혜에 편승해서 위엄을 기르면, 그 위엄이 발동되어 천하가 떨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형세를 가지고 이른바 만대의 제왕帝王이 되기를 바란다면, 그 큰 체제는 끝까지 바꿀 수 없는 것이니, 오직 위엄威嚴을 숭상할 뿐이다.
어떤 사람은 “지금의 형세形勢로는 일을 함에 실로 위엄威嚴을 숭상하는 것보다 더 편한 것은 없다.
그렇지만 만대의 사이에 그 정치政治는 변함없이 반드시 위엄威嚴이어야 한다고 말할 것인지 누가 알겠는가?”라고 한다.
나는 거기에 대해 “위엄이란, 임금이 그것을 의지함으로써 임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루라도 위엄이 없다면 이는 임금이 없는 것이다.
오래되어 정치상의 폐단이 생기면, 그 작고 사소한 항목을 바꾸고 거기에다 적당한 은혜를 베풀어서 옛날 진秦나라처럼 심한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하면 되는 것이지, 위엄을 들어다 아주 버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하겠다.
혹자는 또 “왕도王道를 행하는 사람은 덕德을 베풀지, 형벌刑罰을 쓰지 않는다.
형벌을 쓰는 것은 패도霸道의 일이니 말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한다.
대저 상商나라 탕湯임금과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다 왕도王道를 행하였고, 제 환공齊 桓公이나 진 문공晉 文公은 다 패도霸道를 행하였다.
무왕武王은 주왕紂王의 난폭함을 틈타 포락炮烙과 참월斬刖의 땅에서 백성을 구출하였으니, 만약 그 또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온갖 형벌을 사람에게 가하여 정치를 하였다면 민심民心이 그에게서 떠났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정치는 오로지 예의禮義에서 나왔던 것이다.
걸왕桀王의 포악함도 물론 주왕紂王과 다름이 없었지만, 그의 형벌은 주왕紂王의 포학함만큼 심하지 않아서, 천하의 백성들은 걸왕桀王의 풍기風氣의 영향을 받아 음란하고 나태하여 법도를 지키지 않았다.
《서경書經》에서는 “백성이 다 게으르고 화합하지 않았다.”라고 하였고, 또 제후인 곤오씨昆吾氏가 먼저 난을 일으켜서, 이에 탕왕湯王은 그 강경하고 게으르고 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죽여 분란을 안정시켰다.
그러므로 《예기禮記》에서 “상商나라 사람을 먼저 벌을 준 뒤에 상을 주었다.”라고 하였다.
환공桓公‧문공文公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또한 두 사람 다 형벌을 쓴 것은 아니다.
환공桓公이 관중管仲을 등용하니, 관중管仲은 책(《관자管子》)에서 형법刑法을 즐겨 이야기했기 때문에 환공桓公이 정치를 하면서 늘 형법刑法을 사용하였다.
문공文公은 관대寬大하고 후덕厚德한 사람이었고, 그를 보좌한 호언狐偃‧조쇠趙衰‧선진先軫‧위주魏犨도 모두가 형법刑法을 말하지 않았고, 문공文公의 정치 또한 형법刑法을 근본으로 삼은 적이 없는데도 그를 부를 때에는 또한 패자霸者라고 한다.
그렇다 해서 탕왕湯王은 왕자王者가 아니요, 문공文公은 패자霸者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따라서 형법刑法을 쓴다고 해서 반드시 패도霸道가 아니며, 덕德을 쓴다고 해서 반드시 왕도王道가 아니다.
각각 그 형세에 무엇을 쓰는 것이 적당한지를 살펴볼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형세에는 무엇 때문에 형법刑法을 쓸 수가 없겠으며, 형법刑法을 쓴다 하여 왜 왕도王道라 할 수가 없겠는가?
저들은 먼저 천하의 형세를 깊이 살피지도 않고 천하의 일에 응하고자 하니, 어려운 것이다.
注
왕준암王遵巖(왕신중王愼中)은 “소순蘇洵의 이 논(〈심세론審勢論〉)은 송宋나라의 병폐에 맞추어 쓸 수 있는 약藥이었거늘, 애석하구나! 당시에 쓸 수 없었음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