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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柳宗元(1)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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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이라
辱復書 敎以報張生書及答衢州書言春秋하니 此誠世所希聞이라
兄之學爲不負孔氏矣로다
往年曾記
聞兄與一義하여 嘗諷習之하고 又聞輩言他義하여 知春秋之道久隱이라가 而近乃出焉하니라
京中於 하고 和叔處始見集註하여 恒願掃於陸先生之門이라가
하고 居又與先生同巷하여 始得執弟子禮
講討 會先生病이라
時聞要論하고 嘗以易敎誨見寵이러니 하여 乃大乖謬하여 不克卒業하니라
復於亡友 盡得宗指辨疑集註等一通하여 伏而讀之하니라
見聖人之道 與堯舜合하여 不唯文王周公之志 獨取其法耳
見聖人立孝經之大端 所以明其分也
하고 見聖人褒貶予奪 唯當之所在하여 所謂瑕瑜不掩也
反覆甚喜하니
若吾生前距此數十年이면 則不得是學矣
今適後之하니 不爲不遇也
兄書中所陳 皆孔氏大趣 無得踰焉이라
其言 貶立卓之意也라하니
頃嘗怪荀息奉君之邪心以立嬖子하여 不務正義하고 棄重耳於外而專其寵 러니
今兄言貶息하니 大善이라
息固當貶也니라
然則春秋與仇孔辭不異하니 仇孔亦有貶歟
宗元嘗著非國語六十餘篇하니 其一篇爲息發也
今錄以往하니 可如愚之所謂者乎
微指中明 量力而退하고 告而後絶하니 固先同後異者也로되
今檢此前無與鄭同之文하고 後無與鄭異之據하니 獨疑此一義 理甚精而事有不合이라
兄亦當指而敎焉하라
往年又聞和叔言하니 兄論一義라도 皆所未及이라하니 請具錄하라
當疏微指下하여 以傳末學하리라
亦請見及하라
至之日 勒爲一卷하여 以垂將來하리라
宗元始至是州하여 作陸先生墓表하니라
今以奉獻하니 하라
春秋之道如日月하여 不可贊也
若贊焉이면 必同於孔優劣之說이라 故直擧其一二하노라
不宣이라


04. 《춘추春秋》에 관해 논하는 내용으로 원요주元饒州에게 답한 편지
정교하다.
보내신 답장을 받았는데, 〈보장생서報張生書〉와 〈답구주서答衢州書〉에서 《춘추春秋》에 관해 토론한 내용으로 가르침을 주시니, 이는 실로 세상에서 듣기 어려운 소식입니다.
형의 학문이 공씨孔氏(孔子)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옛날에 배봉숙裴封叔의 집에서 있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형과 배태상裴太常이 “나라 사람이 강융姜戎과 함께 나라를 지방에서 싸워 이기다.”라는 한 대목의 뜻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듣고서 외우고 익혔으며, 또 한선영韓宣英과 죽은 벗 여화숙呂和叔의 무리가 다른 뜻을 말하는 것을 듣고 《춘추春秋》의 도가 오랫동안 숨어 있다가 최근에 와서야 나타나게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도성에 있을 때 한안평韓安平을 통해 처음으로 《춘추미지春秋微指》를 구하고, 여화숙呂和叔을 통해 처음으로 《춘추집주春秋集註》를 보고 나서, 육선생陸先生의 문하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기를 항상 원했습니다.
육선생陸先生께서 급사중給事中이 되셨을 때 종원宗元이 같은 날 상서성尙書省에 들어갔고, 살고 있는 곳이 또한 선생先生과 같은 마을이라 비로소 제자의 예를 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처 강론을 하기 전에 마침 선생先生께서 병이 나고 말았습니다.
평소에 수시로 중요한 말씀을 들었고 일찍이 《주역周易》을 가르쳐주시어 은총을 입었었는데, 불행히도 선생先生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고 종원宗元 또한 소주邵州로 나가게 됨으로써 마침내 크게 잘못되어 학업을 마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에 또 죽은 벗 능생凌生을 통해 《춘추종지春秋宗指》‧《춘추변의春秋辨疑》‧《춘추집주春秋集註》 등을 한 질 구하여 삼가 읽어보았습니다.
기후紀侯가 그의 나라를 완전히 떠나다.”라고 한 대목에서는 성인聖人의 도는 과 어울리는 것으로 단지 문왕文王주공周公의 마음에서만 법을 취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고,
부인夫人 강씨姜氏에서 제후齊侯를 만나다.”라고 한 대목에서는 성인聖人이 《효경孝經》의 대원칙을 세운 것은 그 직분을 밝히기 위한 것임을 보여주었고,
나라 사람이 나라의 하징서夏徵舒를 죽이다.”와 “정해일에 초자楚子나라로 쳐들어가서 공손녕公孫寧의행보儀行父나라로 들여보내다.”라고 한 대목에서는 성인이 포폄褒貶여탈予奪을 오직 법도에 맞게 하여 이른바 결점도 장점도 숨김없이 드러낸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반복해가며 읽노라니 매우 기뻤습니다.
만약 제가 지금보다 수십 년 앞서 태어났더라면 이 학문을 접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마침 늦게 태어났으니 잘 만났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형이 편지에서 말한 것은 모두 공자孔子대의大義로 이를 뛰어넘을 자가 없습니다.
공자孔子순식荀息에 대해 기록한 것은 을 세운 것을 폄하하는 뜻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 전에, 순식荀息이 군주의 사악한 마음을 받들어 애첩의 아들을 세우는가 하면 정의에 힘쓰지 않고 중이重耳를 밖으로 내쫓아 총애를 독차지한 것을 공자孔子구목仇牧공보孔父의 내용과 같은 형식으로 말한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형께서 순식荀息을 폄하한 것이라고 말했으니, 이 견해는 매우 좋습니다.
순식荀息은 진정 폄하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다면 《춘추春秋》에서 구목仇牧공보孔父에 대한 필법筆法도 다르지 않았으니, 구목仇牧공보孔父 역시 폄하합니까?
종원宗元이 일찍이 〈비국어非國語〉 60여 편을 저술했는데, 그중 한 편은 순식荀息 때문에 쓴 것입니다.
이제 적어서 보내드리니 제가 말한 것과 어떤지 보시기 바랍니다.
춘추미지春秋微指》에 “나라 사람이 와서 우호관계를 단절하자고 요구하였다.”라고 한 대목의 뜻을 설명하기를 “〈나라가〉 힘을 헤아려 물러가고 먼저 알린 뒤에 절교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로 보면 나라와 나라의 마음이〉 실로 전에는 서로 합치되었다가 나중에 달라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살펴보면 이전에 나라와 마음이 합치되었다는 글귀가 없고, 나중에 나라와 달라졌다는 근거가 없으니, 이 한 대목의 뜻은 이치는 매우 정밀하지만 사실과는 맞지 않는 점이 있다고 의심됩니다.
형이 이 또한 지적하여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옛날에 또 여화숙呂和叔이 하는 말을 듣자 하니, 형이 논한 ‘나라 상신商臣’ 한 대목의 뜻은 담씨啖氏조씨趙氏육씨陸氏도 모두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그 내용을 기록하여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춘추미지春秋微指》의 밑에 주석으로 넣어 후학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두 사람에게 보낸 이전 편지도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도착하는 그날 당장 한 권으로 엮어 후세에 전하겠습니다.
종원宗元이 이 에 처음 왔을 때 〈육선생묘표陸先生墓表〉를 지었습니다.
지금 이것을 받들어 올리니, 선영宣英과 함께 읽으십시오.
춘추春秋》의 도리는 해나 달과 같아서 함부로 찬양할 수 없습니다.
만약 찬양한다면 필시 공자孔子도척盜跖의 우열을 논하는 설과 같을 것이므로 그중 한두 가지만 들었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역주
역주1 答元饒州論春秋書 : 元和 7년(812)에서 9년 사이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元饒州는 饒州刺史 元洪을 가리킨다. 饒州의 관청소재지는 지금의 江西 鄱陽이다. 이 편지는 《春秋》를 주제로 삼아 《春秋》에 대한 관심과 학문적인 노력을 쏟은 것에 대해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며 심도 있게 논한 것이다.
역주2 裴封叔 : 작자의 둘째 姊夫 裴墐(?~817)이다. 封叔은 그의 자이며, 河東 聞喜 사람이다. 進士에 급제하고 崇文館校書郞‧殿中侍御史‧尙書比部員外郞 등을 역임한 뒤에 萬年令을 지냈다.
역주3 裴太常 : 太常博士 裴堪(?~825)을 가리킨다. 絳州 稷山 사람이다. 貞元 14년(798)에 太常博士를 거쳐 屯田員外郞‧和州刺史를 지내고 憲宗 때 倉部郞中‧節度行軍司馬‧諫議大夫‧同州刺史‧江西觀察使 등을 역임하였으며, 穆宗 초에 工部尙書로 致仕하였다.
역주4 晉人及姜戎敗秦師于殽 : 《春秋》 僖公 33년에 나온다. 姜戎은 성씨가 姜인 戎族이고, 殽는 ‘崤’와 같은 글자로 河南 서부에 있는 산 이름이다.
역주5 韓宣英及亡友呂和叔 : 韓宣英은 韓曄(?~?824)을 가리킨다. 京兆 萬年 사람이며 宣英은 그의 자이다. 八司馬의 한 사람으로 王叔文이 패배할 때 司封郞中에서 池州刺史로 貶謫되었다가 다시 饒州司馬로 貶謫되었다. 呂和叔은 呂溫(772~811)을 가리킨다. 河中 사람이며, 和叔은 그의 자이다. 德宗 貞元 14년(798)에 進士에 급제하고 이듬해에 博學宏詞科에 급제하여 集賢殿校書郞이 되었는데, 문장에 능하여 당시 동류들의 추앙을 받았다. 王叔文과 관계가 좋아 左拾遺로 승진하고 貞元 20년에 侍御史로 入蕃副使가 되어 吐蕃에서 한 해를 보냈다. 柳宗元 등이 모두 王叔文에 연루되어 貶謫된 뒤에 돌아와 유독 혼자 화를 면하였다.
역주6 韓安平 : 韓泰(?~831?)를 가리킨다. 安平은 그의 자이고, 雍州 三原 사람이다. 八司馬의 한 사람으로 王叔文이 패배할 때 神策行營節度司馬에서 虔州司馬로 貶謫되었다.
역주7 始得微指 : 微指는 《春秋微指》로, 唐나라 經學家 陸質(?~805)의 저술이다. 본명은 淳이었으나, 唐 憲宗의 이름자를 피해 개명하였다. 左拾遺‧太常博士‧信州刺史를 역임하였다. 經學 중에서도 《春秋》에 더욱 정통하였고 스승 啖助의 영향을 받아 《春秋左氏傳》보다 《春秋公羊傳》을 중시하였다. 啖助와 趙匡의 학설을 정리하여 《春秋微指》 이외에 《春秋集傳纂例》‧《春秋集傳辨疑》‧《春秋集註》를 저술하였다.
역주8 及先生爲給事中 與宗元入尙書同日 : 貞元 20년(804) 2월에 陸質이 給事中에 임용되었고, 같은 날 작자가 王叔文에게 발탁되어 禮部員外郞이 되었다.
역주9 : ‘必’ 또는 ‘畢’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 당초에 옮겨 쓰는 과정에서 ‘畢’이 음이 비슷한 ‘必’로 바뀌고, 이것이 또 모양이 비슷한 ‘及’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의심된다. 번역은 ‘及’자를 따랐다.
역주10 不幸先生疾彌甚 宗元又出邵州 : 永貞 원년(805) 9월에 陸質이 병으로 죽고, 같은 달 작자가 邵州로 貶謫되었는데, 임지에 도착하기 전인 11월에 다시 永州司馬로 폄적되었다.
역주11 凌生 : 凌準(?~808)을 가리킨다. 자는 宗一이며, 杭州 富陽 사람이다. 邠寧節度使 張獻甫에 의해 節度推官으로 발탁되었다가 殿中侍御史가 되었다. 八司馬 중 한 사람으로 王叔文이 패할 적에 翰林學士에서 連州司馬로 貶謫되었다. 元和 3년에 임지에서 죽었다.
역주12 紀侯大去其國 : 《春秋》 莊公 4년에 나온다.
역주13 夫人姜氏會齊侯于禚(작) : 《春秋》 莊公 2년에 나온다. 禚은 齊‧魯‧衛 세 나라의 접경에 있는 지명으로, 지금의 山東 長淸縣 경내이다. 《春秋公羊傳》에는 ‘郜’으로 되어 있다. 夫人 姜氏는 魯 桓公의 아내이자 莊公의 어머니이고, 齊侯는 그의 친정 오라비인 齊 襄公이다. 이들이 간통을 한 것을 魯 桓公이 알고 노하자, 齊 襄公이 力士를 시켜 魯 桓公을 살해하였다. 그런 뒤에도 姜氏가 간통을 하기 위해 齊侯와 만났는데, 孔子의 생각은 莊公이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를 극도로 슬퍼하고 원수를 증오하는 효성이 미진함으로 인해 어머니로 하여금 악행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역주14 : 작
역주15 楚人殺陳夏徵舒 : 《春秋》 宣公 11년에 나온다.
역주16 丁亥……納公孫寧儀行父于陳 : 《春秋》 宣公 11년에 나온다. 公孫寧과 儀行父는 모두 陳나라 大夫이다.
역주17 書荀息 : 《春秋》 僖公 10년에 “晉나라 里克이 그의 임금 卓을 시해하였고 그 화가 大夫 荀息에게까지 미쳤다.[晉里克弑其君卓 及其大夫荀息]”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晉 獻公 때 大夫 里克은 姜氏의 소생인 申太子의 師傅였고, 荀息은 驪姬의 소생인 奚齊와 卓의 師傅였다. 獻公이 驪姬를 총애하여 申太子와 大戎 狐姬의 소생인 重耳, 小戎 狐姬의 소생인 夷吾 등 여러 公子를 변방으로 축출한 뒤에 곧 이어 申太子를 죽이고 奚齊를 세자로 세웠다. 荀息은 이와 같은 사건을 묵인 또는 동조하였고, 獻公이 죽은 뒤에 奚齊가 즉위하였다. 里克이 奚齊를 죽이자 荀息이 卓을 또 임금으로 옹립하였는데, 里克이 卓을 또 죽이고 夷吾를 임금으로 앉혔다. 그러자 荀息이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고 하면서 자살하였다. 夷吾가 곧 晉 惠公이며, 그가 재위한 지 14년 뒤에 외국에서 떠돌던 重耳가 秦 穆公의 도움으로 19년 만에 고국에 돌아와 임금이 되어 五霸의 하나인 晉 文公이 되었다.
역주18 孔子同於仇牧孔父爲之辭 : 孔子가, 《春秋》 桓公 2년의 기록에 “宋나라 華父督이 그의 임금 與夷를 시해하였고 그 화가 大夫 孔父에게까지 미쳤다.[宋督弑其君與夷 及其大夫孔父]”라고 하고, 莊公 12년의 기록에 “宋나라 南宮長萬이 그의 임금 捷을 시해하였고 그 화가 大夫 仇牧에게까지 미쳤다.[宋萬弑其君捷 及其大夫仇牧]”라고 하여, 그 문장 형식이 僖公 10년 荀息에 관해 기록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역주19 鄭人來渝平 : 《春秋》 隱公 6년의 기록이다.
역주20 楚商臣 : 《春秋》 文公 1년에 “겨울 10월 정미일에 楚나라 世子 商臣이 그의 임금 頵을 시해하다.[楚世子商臣弑其君頵]”라고 한 부분을 가리킨다.
역주21 啖趙陸氏 : 啖助‧趙匡‧陸質을 가리킨다. 啖助는 趙州 사람인데 뒤에 關中으로 옮겼다. 자는 叔佐이다. 玄宗 天寶 말기에 臨海尉‧丹陽主簿를 지낸 뒤에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春秋》에 조예가 깊어 《春秋左氏傳》‧《春秋穀梁傳》‧《春秋公羊傳》의 장단점을 상고하고 빠진 부분을 보충하여 10년 만에 《春秋集傳》을 완성하였다. 趙匡은 河東 사람이며, 자는 伯循이다. 啖助의 제자이다. 陸質 등과 함께 啖助의 《春秋集注總例》를 다듬어 《春秋集傳纂例》를 편찬하였다.
역주22 蕭張前書 : 이 편지 첫 부분에서 언급한바, 元洪이 이전에 쓴 〈報張生書〉와 〈答衢州書〉를 가리킨다.
역주23 與宣英讀之 : 이때 饒州司馬 韓曄이 元洪의 부관으로 함께 있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역주24 : ‘蹠’으로 쓰기도 한다. 春秋 때 魯나라 사람으로, 魯나라 大夫 柳下惠의 아우이다. 불량배 수천 명을 모아 천하를 휩쓸고 다니면서 제후들을 침해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跖이 黃帝 때 큰 도적의 이름이었는데, 柳下惠의 아우가 그와 비슷하다 하여 그를 그렇게 불렀다고도 한다.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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