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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柳宗元(2)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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情文經緯
하여 累日不解하니 帝尤嘉異하여 遷爲이라
旌直優賢하여 道光師儒
出拜道州刺史하니
太學生魯郡季償 廬江何蕃等 投業奔走하여 稽首闕下하고 叫閽籲天하여 願乞復舊하되
朝廷重更其事하여 如己巳詔
翌日 會徒北嚮如初하고 行至하니 公使追奪其章하고 遮道願罷하여 遂不果獻하니
生徒嗷嗷하여 顧眄徘徊
昔公之來 仁風扇揚하여 暴慠革面하고 柔輭有立이라
聽聞嘉言 樂甚鍾鼓하고 瞻仰德宇 高逾嵩岱
及公當職施政하여 示人準程 良士勇善하고 僞夫去飾하며 惰者益勤하고 誕者益恭이라
沈酗腆酒 斥逐郊遂하고 違親三歲 罷退鄕黨하니 令未及下 乞歸就養者二十餘人이라
禮順克彰하고 孝悌以興하니 則又講貫經籍하여 俾達奧義하고 簡習孝秀하여 俾極儒業이라
冠屨裳衣 由公而嚴하고 進退揖讓 由公而儀러니
公征甚遐하니 吾黨誰師리오
遂相與咨度署吏하고 布告諸儒하여 願立貞珉하여 侔高狀明이라
乃訪於學古之士하여 紀公名字하여 垂憲於後하니라
公名城이요 字亢宗이라
家於北平하고 隱於條山이라
惟公端粹沖和하고 高嶷懿醇이라
道德仁明 孝愛 薰襲里閈하고 布聞天下
守節貞固하여 患難不能遷其心하고 怡性坦厚하여 榮位不足動其神이라
義震於周行하고 爲司業 愛加於生徒하니 宜乎立石하여 俾後是憲이라
其辭曰
惟玆陽公
履道葆醇이라
爰初隱聲하여
基仁이라
德充而形하여
乃作諫臣하니
抗志勵義하여
直道是陳이라
帝求하여
開朗蒙滯하고
宣明德敎하여
大和潛布하고
玄機密照
群生聞禮하고
後學知孝
進退作則하고
動言是傚하니
匪公之軌
人用奚蹈리오
麤厲貪凌
待公順之하고
欺僞譎詐
待公信之
少年申申하여
咸適其宜하니
榎楚廢弛하되
尊嚴而威
公褒其良하여
俾升於堂하니
袞衣
公棄不用
懲咎內訟이라
旣訟於內
猶公之誨
匪仁孰親이며
匪德孰尊
今公于征
孰表儒門
生徒上言하고
稽首帝閽이나
曾莫我聞이라
涕濡하여
塡街盈衢하고
遠送於南
望慕踟躕
立石書德하여
用揚懿則하니
嗚呼斯文
遺愛罔極이라


02. 국자사업國子司業 양성陽城이 끼친 사랑을 기념하는 갈문碣文
감정과 문장이 잘 어우러졌다.
정원貞元 4년(788) 5월에 황제께서 인장과 붉은 인끈으로 양공陽公을 은거지에서 불러내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삼았다.
그 뒤 7년이 지나 양공陽公이 조정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바른말을 올려 며칠 동안 물러나지 않자, 황제께서 매우 가상하고 기특하게 여겨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전보시켰다.
이는 그의 곧음을 표창하고 현능賢能함을 우대한 것으로, 그의 유자儒者의 사표로써 빛을 발했다.
그리고 4년 뒤 9월 기사일에 도주자사道州刺史로 제수되어 조정을 나가게 되었다.
그러자 태학생太學生 노군魯郡 출신 계상季償, 여강廬江 출신 하번何蕃 등 160명이 학업을 폐하고 달려가 궁궐 밑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궁궐 문을 향해 무고함을 호소하면서 양공陽公의 관직을 환원해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 일을 변경하는 것을 어렵게 여겨 기사일의 하명대로 시행하도록 했다.
이튿날 제생諸生들이 모여 첫날처럼 궁궐을 향해 호소한 뒤에 그 행렬이 연희문延喜門에 이르자, 양공陽公이 사람을 보내 그들의 탄원서를 빼앗고 앞길을 막아서며 시위를 그만둘 것을 원하였으므로 결국 탄원서를 올리지 못했다.
제생諸生들은 시끌벅적 떠들어대며 어찌할 줄 모르고 서성거렸다.
지난날 공이 국자감國子監에 들어왔을 때 어진 교화의 바람이 일어나 사납고 거만한 자는 태도를 바꾸고 나약한 자는 의지를 굳게 세웠다.
훌륭한 말을 들을 적에는 아름다운 음악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워했고, 덕이 깃든 모습을 우러러볼 적에는 숭산嵩山대산岱山보다 더 높아 보였다.
공이 직무를 맡아 정사를 시행하면서 사람들에게 일정한 준칙을 제시해 보이자, 어진 선비는 선행에 더욱 힘쓰고 위선자는 가식을 없앴으며, 게으른 자는 더욱 근면해졌고 허황된 자는 더욱 공손해졌다.
술독에 빠져 술만 마시는 자는 도성 밖으로 내쫓고 부모를 찾아뵙지 않은 지 3년이 된 자는 물리쳐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니, 그 명령이 미처 떨어지기도 전에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귀향을 신청한 자가 20여 명이었다.
어른에게 예로써 순종하는 행동이 드러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에게 공손한 기풍이 일어난 뒤에는 또 경전을 익혀 통달하여 깊은 뜻을 깨우치게 하고, 효자孝子수재秀才를 선발해 가르쳐 유자儒者의 학문을 철저히 성취하게 하였다.
갓과 신발, 옷차림 등의 복장이 공으로 인해 근엄해졌고, 나아가고 물러나며 읍하고 사양하는 등의 동작이 공으로 인해 법도에 들어맞게 되었다.
그런데 공께서 아주 멀리 떠나려 하시니, 우리는 이제 누구를 스승으로 삼을 것인가.
마침내 서리署吏들과 서로 의논하고 유생儒生들에게 널리 알려 비석을 세워서 그 높은 덕과 밝은 지혜를 기록하자고 했다.
그리하여 옛것을 배운 사람을 찾아와 공의 이름과 자를 기록하여 후대에 전해 모범으로 삼게 하였다.
공의 이름은 이고 자는 항종亢宗이다.
고향집은 북평北平에 있고 중조산中條山에 은거했다.
공은 천성이 정직하고 순수하며 부드럽고 온화한 데다 기상이 높고 아름다우며 순후하였다.
도덕道德과 인자함과 명철함, 그리고 효성과 우애의 교화가 고향마을에 영향을 끼치고 온 천하에 알려졌다.
절개를 굳게 지켜 재앙과 역경도 그 마음을 바꾸지 못했고, 성격을 평탄하게 수양하여 명예와 지위도 그 정신을 움직이지 못했다.
사간司諫으로 있을 때는 그 의리가 길 가는 사람까지도 떨게 했고, 사업司業으로 있을 때는 제생諸生들에게 사랑이 미쳤으니, 마땅히 비석을 세워 후인들이 이를 모범으로 삼게 해야 할 것이다.
명문銘文은 다음과 같다.
거룩해라 우리의 양공陽公께서는,
정도를 지키시고 순후함 지녀,
처음에는 명성을 감춰 숨기고,
어진 본성 위에서 진보하였네.
그 덕이 충만하여 밖에 드러나,
마침내 간의대부諫議大夫 간관諫官이 되니,
지조 아니 굽히고 의리를 세워,
바른 도를 황제께 바쳐 올리자,
황제께서 사유師儒로 발탁해서는,
우리 성균成均 부관副官을 맡기셨다네.
무지몽매 어두움 트이게 하고,
은혜로운 가르침 환히 베풀어,
큰 화기 자연스레 널리 퍼지고,
깊은 도 빈틈없이 비추었다네.
유생이 예에 대해 가르침 듣고,
후학들은 효도를 알게 되었네.
진퇴읍양進退揖讓 법도에 맞게 행하고,
언어동작言語動作 모두를 본받았으니,
공께서 모범 아니 보이셨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그리 했으랴.
거칠고 사나우며 탐욕스런 자,
공을 만나 그 태도 온순해지고,
속이고 꾸며대며 간교 부린 자,
공을 만나 그 마음 진실해졌네.
감정 격한 소년들 여유로워져,
모두가 평정심을 되찾고 보니,
회초리 그 따위를 쓰지 않아도,
공 위상 존엄해져 위엄 있었네.
우리 공이 뛰어난 유생 표창해,
당상堂上에 올라오게 우대해주자,
야위었던 사람이 살이 붙어서,
곤룡포를 입은 듯 영예로웠네.
공께서는 버려져 쓰이지 않자,
스스로 그 허물을 반성했으니,
안으로 자신 허물 반성하는 게,
유생 훈계 그것과 흡사하였네.
아니면 그 누가 가까이하며,
아니면 그 누가 존경하리오.
이제 우리 공께서 멀리 가시면,
누가 있어 유가儒家의 표상이 될까.
유생들 조정에다 탄원서 내고,
궁궐 문에 엎드려 간청했으나,
무심해라 저 하늘 너무 높아서,
애절한 우리의 말 듣지 못했네.
푸른 옷깃 유생들 눈물 적시며,
큰길이라 대로를 가득 메우고,
남쪽에 멀리 나와 전송하면서,
우러러 바라보며 머뭇거렸네.
비석 세워 양공陽公의 덕을 기록해,
아름다운 모범을 널리 전하니,
아, 내 이 글 지어 기리는 뜻은,
공께서 끼친 사랑 끝없기 때문.


역주
역주1 : 작자가 長安에서 集賢殿正字로 재직하던 貞元 14년(798) 9월에 쓴 문장이다. 이때 작자의 나이는 26세였다. 陽城(736~805)은 定州 北平 사람으로, 자는 亢宗이다. 가난하여 책을 구할 수 없어 자청하여 集賢院의 글씨 쓰는 서리가 되었으며, 그곳에서 6년 동안 밖에 나오지 않고 남모르게 책을 읽은 결과 학문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게 되었다. 貞元 4년(788) 5월에 재상 李泌의 천거로 諫議大夫가 되었다. 貞元 11년(795)에 裴延齡‧李齊運 등 간신들이 재상과 대신들을 모함하고 陸贄 등 어진 신하들이 모두 억울하게 쫓겨나는데도 감히 구제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陽城이 상소하여 裴延齡의 간교함과 陸贄 등의 억울함을 논하였고 이로 인해 國子司業으로 폄직되었다.
3년이 지난 이때 太學生 薛約이 벌을 받아 連州로 귀양 가게 되었는데, 그의 집에 숨겨두고 함께 술을 마셨고 薛約이 체포되어 귀양길을 떠날 때 교외까지 나가서 전송하였다. 그러자 죄인을 비호하였다는 이유로 道州刺史로 좌천되었다. 본문 첫머리에서 사실과 달리 황제가 諫議大夫 陽城이 집요하게 간하는 것을 가상히 여겨 國子司業으로 전보시켰다고 말한 것은, 황제의 허물을 표면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新唐書 권194 卓行 陽城列傳》 碣은 비석에 새기는 글로, 문체의 하나이다.
역주2 四年五月……卽隱所起陽公爲諫議大夫 : 四年 앞에 德宗의 연호인 貞元을 생략하였다. 陽城이 進士에 급제한 뒤에 지금의 河北省 淪縣에 있는 中條山에 은거하고 있었다. 이때 李泌이 재상이 되어 그가 학문과 행실이 뛰어난 점을 인정하여 조정에 천거하자, 德宗이 諫議大夫를 제수하여 長安尉 楊寧에게 예물을 들려 보내 불러냈고, 도성으로 들어왔을 때 붉은색 朝服인 緋衣와 銀魚袋를 하사하였다. 銀印은 銀魚袋를 가리킨다.
諫議大夫는 正4品下로, 국정의 잘잘못을 간하고 황제를 시종하는 임무를 맡는다. 貞元 4년인 이때 左諫議大夫와 右諫議大夫로 나누고 정원은 각 4인으로 정했는데, 左諫議大夫는 門下省에 소속되고 右諫議大夫는 中書省에 소속되었다. 陽城이 左諫議大夫였는지 右諫議大夫였는지는 알 수 없다.
역주3 後七年 廷諍懇至 : 貞元 11년(795) 4월에 陽城이 상소하여 裴延齡의 간교함과 陸贄의 무죄를 논한 일을 가리킨다.
역주4 國子司業 : 唐나라 國子監에 소속된 관원이다. 唐나라 제도에 정원은 2인이고 품계는 從4品下였는데, 諸生을 훈도하는 정무를 맡아 國子監ㆍ太學ㆍ廣文館ㆍ四門學ㆍ律學ㆍ書學ㆍ算學 등 7개 학교를 총괄하였다.
역주5 四年九月己巳 : 四年은 貞元 11년부터 계산하여 4년째 되는 해인 貞元 14년을 말한다. 만으로는 3년이다. 九月己巳는 9월 23일이다.
역주6 百六十人 : 《舊唐書》 〈陽城列傳〉에는 ‘二百七十人’으로 되어 있고, 《新唐書》 〈卓行傳〉에는 ‘二百人’으로 되어 있다.
역주7 延喜門 : 長安 皇城 동부의 북문이다. 皇城과 宮城 사이에 가로로 뻗은 길의 동쪽 출구이다.
역주8 友悌 : 陽城이 中條山에 은거할 때 그의 아우들인 陽堦ㆍ陽域과 옷을 서로 바꿔 입었고 장성해서도 장가를 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일단 장가를 가게 되면 다른 성씨가 중간에 끼어들게 되므로 형제가 함께 살더라도 더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그의 아우들도 죽을 때까지 장가를 가지 않았다. 《新唐書 권194 陽城列傳》
역주9 司諫 : 여기서는 諫議大夫를 가리킨다.
역주10 覆簣 : 覆一簣의 준말이다. 평지에 산을 만들기 위해 처음에 한 삼태기의 흙을 쏟아 엎는다는 뜻인데, 이 과정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면 마침내 높은 산을 이룰 수 있다고 권면하는 뜻이 들어 있다. 《論語》 〈子罕〉에 “비유하자면 흙을 쌓아 산을 만들 때 한 삼태기의 흙을 더 올리지 못하고 멈춘 것도 내가 멈춘 것이고, 비유하자면 평지에 비록 한 삼태기의 흙을 쏟아 엎었더라도 나아간 것은 내가 나아간 것이다.”라고 한 데서 인용하였다.
역주11 師儒 : 敎官 혹은 學官을 가리킨다.
역주12 貳我成均 : 貳는 다음이란 뜻으로, 여기서는 副官을 가리킨다. 成均은 周나라 때 太學의 이름으로, 국립학교의 범칭이다. 여기서는 國子監을 가리킨다. 國子監의 장관은 祭(좨)酒이고 司業은 祭酒의 다음 벼슬이다.
역주13 癯者旣肥 : 바른 도리를 깨달아 마음이 즐거운 것을 말한다. 曾子가 살이 찐 子夏를 보고 그 이유를 묻자, 子夏가 “내가 안으로 들어와 先王의 의리를 보니 그것이 영광스러웠고, 밖에 나가 부귀의 즐거움을 보니 또 그것이 영광스러웠습니다. 이 두 가지가 내 마음속에서 싸움을 벌이는데 승부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야위었으나 지금은 先王의 의리가 이겼기 때문에 살이 쪘습니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韓非子 喩老》
역주14 (加)[如] : 저본에는 ‘加’로 되어 있으나, 《柳河東集》에 근거하여 ‘如’로 바로잡았다.
역주15 謂天蓋高 : 天蓋는 둥근 하늘이 수레의 덮개처럼 지상을 덮고 있다는 뜻으로, 하늘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황제를 뜻한다.
역주16 靑衿 : 《詩經》 〈鄭風 子衿〉에 “푸르디푸른 우리 님 옷깃, 생각하면 언제나 마음에 걸려.[靑靑子衿 悠悠我心]”라고 한 데서 나온 것으로, 선비나 太學의 유생이 입는 옷을 말한다. 후세에 유생의 대명사로 흔히 사용되었다.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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