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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柳宗元(1)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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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5. 위로하고 안부를 물어준 것에 대해 사례謝禮하는 내용으로 서천西川 무원형武元衡 상공相公께 올린
子厚諸啓 非爲而已 中多奇峭沈鬱之旨
유자후柳子厚가 쓴 여러 수의 계문啓文사륙문四六文으로 썼을 뿐만 아니라, 웅건하고 함축적인 뜻이 많다.
予不能盡錄하여 錄凡五首
내가 모두 초록抄錄할 수 없어 모두 5수만 초록抄錄하였다.
某啓하노라
아무개는 를 올립니다.
某愚陋 不知周防하여 失於하여 陷在大罪
저는 우둔한 나머지 뜻은 크지만 행동은 거칠어 환난患難을 치밀하게 방비할 줄 몰라 험난한 길에서 넘어져 큰 죄에 빠졌습니다.
伏匿于今七年이라
그리하여 영남嶺南에서 엎드려 숨죽여 지낸 지도 이제 7년이 되었습니다.
追念往愆 寒心飛魄하니 幸蒙在宥하여 得自循省이라
지난날 허물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가슴이 떨리고 넋이 날아갈 지경이지만, 다행히도 목숨만은 살려주는 은혜를 입어서 스스로 반성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豈敢徹聞于之上하고 見志於之際하여 以求心於萬一者哉리오
어찌 감히 〈저의 힘겨운 사정을〉 조정에 알리고 〈풀려나고픈 생각을〉 대신大臣들에게 드러내어 〈원상으로 복귀되기를〉 만의 하나라도 바라겠습니까.
相公以으로 不遺垢汚하여 先賜榮示
상공相公께선 만물을 포용하는 대지大地와 같은 덕과 하늘처럼 넓고 못처럼 깊은 도량으로 때가 묻은 저를 버리지 않으시고 영광스럽게 먼저 서찰을 내려주셨습니다.
奉讀流涕하여 以懼以悲하고 屛營舞躍하여 不敢寧處
서찰을 받들어 읽노라니 눈물이 흐르는 가운데 두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으며, 황공스럽기도 하고 희열이 넘치기도 하여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었습니다.
이는 맹명孟明이 세 번 패했어도 거두어준 것과 같고, 조말曹沫더러 한번 공을 세워보라고 독려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之倫으로 得自拂飾하여 以期效命於鞭策之下
갈비뼈가 부러지고 종지뼈가 잘린 자들과 같은 부류인 저로 하여금 스스로 떨쳐 일어나 상공相公의 지도 아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此誠大君子幷容廣覽하여 棄瑕錄用之道也니라
이는 실로 대군자大君子가 모든 것을 포용하고 널리 살펴보아 하자를 도외시하고 채용하는 도리입니다.
自顧孱鈍 無以克堪이니 祗受大賜 豈任負戴리오
스스로 돌아볼 때 우둔하여 제 자신도 제대로 추스를 수 없으니, 베푸신 큰 은혜를 삼가 받았으나 어찌 그 짐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精誠之至 炯然如日이나 拜伏無路하니 不勝惶惕이라
상공相公을 향하는 정성이야 해처럼 빛나지만 찾아가 인사 드릴 길이 없으니 황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輕冒威重하여 戰汗交深이라
함부로 위엄을 범하였기에 두려워 식은땀이 납니다.
역주
역주1 上西川武元衡相公謝撫問啓 : 元和 6년(811) 永州司馬로 있을 때 쓴 편지이다. 武元衡(758~815)은 河南 緱氏 사람으로, 자는 伯蒼이다. 德宗 建中 4년(783)에 進士에 급제하였다. 比部員外郞‧左司郞中‧御史中丞을 역임한 뒤에, 憲宗 元和 2년(807)에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제수되고 臨淮郡公에 봉해졌다. 元和 5년에 劍南西川節度使로 부임하여 자기는 검소하게 생활하고 백성을 관대하게 다스렸다. 이때 어려운 처지에서 힘겨워하는 작자에게 편지를 보내 위로하고 안부를 물었으므로 고마운 뜻을 표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이다. 啓는 일반적으로 奏疏, 公文, 書簡文을 가리킨다. 관리가 상급관리에게 아뢰는 글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역주2 四六 : 六朝 때 완성된 일종의 韻文으로, 네 자 및 여섯 자의 구절로 대구를 이루고 平仄을 맞춘 정형화된 문장형식이다. 騈體文이라고도 한다. 여기서는 다소 유연하게 지어 平仄을 맞추지는 않았다.
역주3 狂簡 : 《論語》 〈公冶長〉에 나오는 말로, 뜻하는 바는 크나 행동은 소홀하고 거칠다는 뜻이다.
역주4 夷途 : 險夷之途의 준말로 험난한 길이란 뜻이다. ‘夷’자는 평탄하다는 뜻이지만 ‘險’자에 무게가 있다.
역주5 嶺下 : 五嶺 아래, 곧 嶺南이란 뜻으로 永州를 가리킨다. 五嶺은 大庾嶺‧越城嶺‧騎田嶺‧萌渚嶺‧都龐嶺의 총칭으로, 江西‧湖南‧廣東‧廣西 네 省 사이에 위치한 長江과 珠江 유역의 분수령이다.
역주6 廊廟 : 조정을 가리킨다.
역주7 樽俎 : 정치수완이 뛰어나 힘들이지 않고 정무를 수행하는 大臣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단순히 대신이란 뜻으로 사용하였다. ‘樽’은 술동이이고, ‘俎’는 육고기를 올려놓는 도마로, 한가로운 연회석이란 뜻으로 쓰인다. 《新序》 〈雜事〉에 “樽俎 사이를 벗어나지 않고도 천 리 밖의 일을 아는 사람이란 晏子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주8 含弘光大之德 廣博淵泉之量 : 《周易》 坤卦 〈彖辭〉에 “坤卦는 대지가 두터워 만물을 싣는 것을 상징하니 그 덕이 대지의 무궁함과 부합한다. 크고 넓어 온갖 만물이 모두 이로 인해 형통한다.[坤厚載物 德合无疆 含弘光大 品物 咸亨]”라고 한 것과, 《中庸》에 “〈중용의 덕은〉 드넓으며 깊고 근본이 있어 수시로 밖에 드러난다. 드넓은 것은 하늘 같고, 깊고 근본이 있는 것은 못 같다.[溥博淵泉 而時出之 溥博 如天 淵泉 如淵]”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이다. 곧 땅처럼 중후한 덕과 하늘처럼 넓은 도량이라는 뜻이다. ‘廣博’은 ‘溥博’과 같다.
역주9 收孟明於三敗 : 孟明은 春秋 때 秦나라 大夫 孟明視로, 百里奚의 아들이다. 西乞術‧白乙丙과 함께 鄭나라를 습격한 뒤 滑나라를 멸망시키고 崤山을 경유할 적에 晉나라의 공격으로 전군이 섬멸되고 포로가 되었다. 석방되어 돌아와서는 3년 뒤에 군대를 거느리고 晉나라를 정벌하러 나갔다가 彭衙에서 또 패하였다. 그러나 穆公은 지난날의 허물을 문제 삼지 않고 오히려 더 후하게 대우하였다. 이듬해에 또 晉나라 군대와 河水에서 싸워 크게 이겼다. 《春秋左氏傳 僖公 33년》
역주10 責曹沫於一擧 : 曹沫은 春秋 때 魯나라 대부로, 曹劌라고도 한다. 처음에 군대를 거느리고 齊나라와 세 번 싸워 그때마다 패하였다. 그 뒤 莊公 13년(B.C. 681)에 魯나라와 齊나라가 지금의 山東省 東阿縣과 陽谷縣 사이에 있는 柯 고을에서 회담을 하게 되었다. 曹沫이 이때 비수로 齊 桓公을 위협하여 볼모로 잡고 빼앗아간 魯나라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여 그의 요구대로 협약이 이뤄진 뒤에 풀어주었다. ‘一擧’는 계속 실패하다가 나중에 한 번 크게 성공한 것을 말한다. 《史記 刺客列傳》
역주11 折脅臏脚 : 范睢는 戰國 때 魏나라 사람이다. 처음에 魏나라 中大夫 須賈를 따라 사신의 일행으로 齊나라에 갔다가 귀국한 뒤에 魏나라 재상 魏齊는 그가 齊나라와 내통했다고 의심하였다. 그리하여 혹독하게 매를 때려 갈비뼈가 부러지고 이빨이 다 빠졌는데 측간에다 던져버렸다. 范睢는 그 뒤에 가까스로 秦나라로 도망하여 성명을 바꾸고 재상이 되어 應侯에 봉해졌다. 司馬喜는 戰國 때 宋나라에서 종지뼈가 잘려나가는 형벌을 받은 뒤에 세 번이나 中山國의 재상이 되었다. 두 사람 모두 처음에는 엄청난 고난을 당했으나 좌절하지 않고 노력하여 결국 크게 성공한 사례에 해당되므로 武元衡이 작자에게 그들처럼 해볼 것을 기대하였다는 것이다. 《史記 권79 范睢蔡澤列傳, 권83 鄒陽列傳》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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