凡五徙職하고 六增官하여 至刑部員外郞하고 出刺連永兩州라
未至永에 而連之人愬君하니 御史按章具獄하여 坐流驩州라
幼弟訟諸朝
하니 天子黜
하고 罷御史
하며 小吏咸(減)死
하여 投之荒外
로되 而君不克復
하고 元和七年正月二十六日卒
이라
孤處道洎守訥이 奉君之喪하여 踰海水라가 不幸遇暴風하여 二孤溺死라
崔氏世嗣文章하니 君又益工하고 博知古今事하여 給數敏辯이라
08. 영주자사永州刺史 최군崔君의 임시 무덤 묘지명墓誌銘
문채와 운치가 생동하여 손에 잡힐 것만 같다.
박릉博陵 최군崔君은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산남서도절도사山南西道節度使 막부幕府로 들어가 장서기掌書記부터 시작하여 절도유후節度留後에 이르렀다.
대체로 다섯 번 관직을 옮기고 여섯 번 승진하여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에 이르렀으며, 지방으로 나가 연주連州와 영주永州 두 주州의 자사刺史가 되었다.
영주永州에 당도하기 전에 연주連州 사람이 최군崔君을 고소하자, 어사御史가 법률에 따라 죄안을 꾸몄고 이로 인해 환주驩州로 유배되었다.
그의 어린 아우가 조정에 억울함을 호소하니, 천자가 연수連帥를 쫓아내고 어사御史를 파직하였으며, 하급관리들이 사형을 감하여 변방으로 유배시켰으나 최군崔君은 결국 복직되지 못했고, 원화元和 7년 정월 26일에 죽었다.
아들 처도處道와 수눌守訥이 최군崔君의 유해를 받들고 바다를 건너오다가 불행히도 폭풍을 만나 두 아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
8월 갑자일에 토지신 제단에서 북쪽으로 400보 지점에 임시로 매장하였다.
최씨崔氏는 대대로 문장 솜씨를 계승했는데 최군崔君은 그중에서도 더욱 뛰어났으며, 고금의 역사사실을 두루 알아 민첩하고 언변이 뛰어났다.
전략과 계책에 뛰어나, 남쪽으로 촉蜀의 반군을 패퇴시키고 서쪽으로 융족戎族의 군대를 방어할 당시 그 계책이 모두 최군崔君에게서 나왔다.
뒤에 오석五石을 복용하여 몸에 종양이 생기고 정신이 어지러웠기 때문에 처음에 지녔던 재주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했다.
부인 하동류씨河東柳氏는 덕이 크고 행실이 정숙했는데, 최군崔君보다 10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최군崔君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고 가족들이 또한 바다에서 익사하는 화를 당해 합장할 여력이 없다.
그래서 3년 뒤에 고향의 장지로 이장하려 한다.
지금은 그저 한두 가지 큰 사항만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