余謂守原은 政之大者也라 所以承天子하여 樹霸功하고 致命諸侯하니
而晉君이 擇大任하되 不公議於朝하고 而私議於宮하며 不博謀於卿相하고 而獨謀於寺人이라
雖或衰之賢이 足以守하고 國之政이 不爲敗라도 而賊賢失政之端이 由是滋矣라
爲謀臣
하고 將中軍
이어늘 晉君疏而不咨
하며 外而不求
하고 乃卒定於內豎
하니 其可以爲法乎
아
然而能霸諸侯者
는 以土則大
하고 以力則强
하고 以義則
也
라
然猶羞當時陷後代 若此커든 況於問與擧又兩失者면 其何以救之哉리오
05. 진晉 문공文公이 원읍原邑을 지킬 자를 물은 것에 관한 의논
진晉 문공文公이 주周 양왕襄王에게 원읍原邑을 하사받은 뒤에 누구를 파견하여 지킬 것인지 결정하기 어려워 환관宦官 제㪍鞮에게 의견을 물어 마침내 조쇠趙衰에게 맡겼다.
내가 생각건대, 누구를 파견하여 원읍原邑을 지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진晉나라 정사에서 큰일이니, 그 이유는 장차 천자의 명을 받들어 패업霸業의 기초를 세우고 제후들에게 천자의 명을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허물없는 사이인 환관宦官과 상의함으로써 천자의 거룩한 명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런데 진晉나라 군주는 이처럼 중요한 담당자를 선택하면서 조정에서 공개적으로 토론하지 않고 자기 궁중 안에서 사적으로 상의하였으며, 대신들과 널리 의논하지 않고 단독으로 환관과 상의하였다.
비록 조쇠趙衰의 유능함이 족히 지켜낼 만하고 나라의 정사가 이로 인해 무너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진 신하를 멀리해 자존심을 침해하고 정사를 잘못하는 단초가 이로 인해 생겨날 수 있다.
더구나 진晉나라에 그 당시 함께 토론할 만한 신하가 없지는 않았지 않은가.
호언狐偃은 계책을 짜내는 신하였고 선진先軫은 중군中軍을 관장하고 있었는데, 진晉나라 군주는 이들을 일체 멀리하여 묻지 않고 외면하여 의견을 구하지 않고는 마침내 환관의 의견에 따라 결정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후대의 법이 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진晉 문공文公이 장차 제齊 환공桓公의 사업을 계승하여 천자를 보좌할 생각이었으니, 이는 원대한 뜻이었다.
그런데 제齊 환공桓公은 관중管仲을 신임하여 패업霸業이 흥성하였고 수조竪刁를 임용하여 쇠패하였다.
그렇다면 문공文公이 원읍原邑을 얻어 국토를 확장한 것은 곧 패업霸業을 이룰 수 있는 시발점으로서 제후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문공文公은 제齊 환공桓公이 흥성하게 된 연유를 어기고 제齊 환공桓公이 쇠패한 발자취를 다시 밟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능히 제후들의 패자가 되었던 것은 토지가 크고 병력이 강했으며, 명분의 측면에서도 천자가 제후의 패자霸者로 책봉하였기 때문이다.
제후들이 사실 진晉나라를 두려워하긴 했으나 어찌 마음속으로 승복시킬 수 있었겠는가.
그 후 환관인 경감景監의 추천으로 인해 위앙衛鞅이 진秦나라 재상이 되었고, 환관인 홍공弘恭과 석현石顯의 참소로 인해 한漢나라 소망지蕭望之를 압박하여 자살하게 하였으니, 이처럼 잘못된 일이 일어나게 한 것은 진晉 문공文公이었다.
아, 유능한 신하를 얻어 큰 고을 지켰으니, 물은 것이 잘못된 물음이 아니고 천거한 것도 잘못된 인물을 천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에 부끄러움을 당했고 후대를 잘못에 빠뜨린 것이 이와 같았으니, 하물며 물은 목적도 이루지 못하고 천거한 인물도 유능하지 못해 이 두 가지가 다 잘못되었다면 어떤 방법으로 이 사태를 만회할 것인가.
나는 이 때문에 진晉 문공文公의 허물을 지적하여 《춘추春秋》에서 허許나라 세자世子 지止와 진晉나라 조돈趙盾에 대해 비판한 원칙에 첨부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