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元十八年月日
에 趙公矜
이 年四十二
에 客死於柳州
하니 官爲斂葬於城北之野
라
元和十三年
에 孤來章始壯
하여 自
徒行求其葬
이나 不得
이라
明日求諸野하니 有叟荷杖而東者하여 問之하니 曰 是故趙丞兒耶아
辛亥啓土하니 有木焉하고 發之하니 緋衣緅衾 凡自家之物皆在라
誠來章之孝로 神付是叟하고 以與龜偶하니 不然이면 其協焉如此哉리오
六月某日就道하여 月日葬於汝州龍城縣期城之原하니라
에 犯難來歸
하여 擢授襄城主簿
하고 賜
하며 後爲襄陽丞
이라
06. 고故 양양승襄陽丞 조군趙君의 묘지명墓誌銘
상황이 기괴하고 문장 또한 기괴하니, 고금의 걸작이다.
정원貞元 18년(802) 모월 모일에 천수天水 조공趙公 긍矜이 나이 42세 때 객지인 유주柳州에서 죽었는데, 관가에서 시신을 거두어 성 북쪽 들판에 묻었다.
원화元和 13년(818)에 그의 아들 내장來章이 비로소 장성하여 양주襄州로부터 걸어서 유주柳州로 와 아버지의 장지를 수소문하였으나 찾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와 관계가 있는 사람들의 이름자를 써서 벽보로 내걸어 그들을 널리 찾아보았으나 모두 이미 세상을 떠나 그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내장來章이 날마다 들판에서 울었는데, 그렇게 하기를 19일 동안 하였다.
사람의 일이 막다른 지경에 이르게 되면 만에 하나 있을 수 있는 희망을 점괘에 의지하기 마련이다.
5월 갑진일(21일)에 점쟁이 진점秦誗가 거북점을 쳐 점괘가 나왔는데, “금金이 비스듬히 묵획墨劃을 침범하여 화방火方이 이로 인해 귀해졌다.
그 무덤은 곧 축방丑方을 마주보고 길 오른쪽에 있다.
남방에 존귀한 신령이 있으니, 그는 토지신으로 거기에서 무덤을 지키고 있다.
을사일에 들판에 나가면 서녘 사람을 만날 것이다.
그는 두 눈이 움푹 들어가고 구레나룻이 나 있으니, 그를 통해 실정을 알 수 있다.
7일 후에 땅을 파 널을 열면, 부친의 영령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 이튿날 들판에 나가 둘러보고 있을 때 지팡이를 메고 동쪽으로 오는 한 노인이 있어 물었더니, “이 사람이 죽은 조현승趙縣丞의 아들인가?
나는 조신曹信인데 조승趙丞의 무덤이 내 무덤에서 가깝다.
아, 지금은 무덤이 이미 내려앉아 평지가 되었으니, 토지신 사당이 있는 곳에서 북쪽으로 200걸음을 걸어가라.
내가 그대를 위해 땅 위에 띠풀을 묶어 표시해두겠다.”라고 했다.
신해일(28일)에 흙을 파니 널이 그 속에 있었고, 뚜껑을 열었더니 붉은 관복과 검붉은 이불을 위시하여 자기 집의 물건들이 모두 있었다.
유주柳州 사람들은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는 분명 신령이 내장來章의 효성에 감동하여 그 노인을 통해 거북점과 들어맞게 했던 것이니,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 정도까지 들어맞을 수 있었겠는가.
6월 모일 길을 떠나, 모월 모일 여주汝州 용성현龍城縣의 기성期城 들판에 장례를 지냈다.
부인은 하남河南 원씨源氏로,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한 자리에 합장하였다.
조긍趙矜의 부친의 이름은 점漸으로, 남정현위南鄭縣尉를 지냈다.
조부의 이름은 천지倩之로, 운주사마鄆州司馬를 지냈다.
증조부의 이름은 홍안弘安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국자좨주國子祭酒를 지냈다.
당초에 조긍趙矜은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무양현주부舞陽縣主簿를 지냈다.
채주蔡州 군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빠져나와 조정에 귀순하여 양성주부襄城主簿로 발탁되고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았으며, 나중에 양양현승襄陽縣丞이 되었다.
그 집안의 분묘는 조긍趙矜의 증조부 이하가 모두 〈한 장소에 합장되어 있고〉 존비尊卑의 서열이 분명하다.
이때 종원宗元이 유주자사柳州刺史를 맡고 있었으므로 그 일을 도왔고, 그를 동정하여 이 묘지명墓誌銘을 써 세상에 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