嶺南節度使所領者
이요 所建饗軍堂之制亦弘敞
하고 而文亦稱
이라
其外大海多蠻夷
하니 由
으로 西抵
에는 環水而國以百數
하니 則統于
라
內之幅員萬里
는 以
로 時聽敎命
하고 外之羈屬數萬里
는 以譯言贄寶
로 歲帥貢職
하니 合
之重
하여 以治于廣州
라
且賓有牲牢
와 嘉樂好禮
로 以同遠合疏
하고 軍有犒饋宴饗
와 勞旋勤歸
로 以群力一心
하니
必厚棟大梁과 夷庭高門이니 然後可以上充於揖讓하고 下周於步武니라
今
에 且專二使
하니 增德以來遠人
하고 申威以修戎政
이라
大饗宴合樂
하되 從其豐盈
하니라 先是爲堂於治城西北陬
하니 其位
는 公北向
하고 賓衆南向
하며 奏
于其西
하고 視泉池于其東
이라
隅奧庫仄하고 庭廡下陋하니 日未及晡면 則赫炎當目하여 汗眩更起하여 而禮莫克終이라
故凡大宴饗大賓旅에는 則寓于外壘하여 儀形不稱이라
公於是始斥其制하여 爲堂南面하니 橫八楹이요 縱十楹이라
其外는 更衣之次와 膳食之宇요 列觀以游目하고 偶亭以展聲하니 彌望極顧에 莫究其往이라
泉池之舊는 增濬益植하여 以暇以息하여 如在林壑이라
問工焉取하니 則師輿是供이요 問役焉取하니 則蠻隷是徵이며 問材焉取하니 則隙宇是遷이라
或益其闕하여 伐山浮海하고 農賈拱手하고 張目視具하니라
公與監軍使로 肅上賓하고 延群僚하니 將校士吏 咸次于位라
鉶鼎體節
하여 燔炰胾炙
와 羽鱗貍互之物
과 로 均飫于卒士
하고
禮成樂遍
에 以敍而賀
하고 且曰 是邦臨護之大
요 하니 非是堂之制不可以備物
이요 非公之德不可以容衆
이라
曠于往初라가 肇自今玆로 大和有人하여 以觀遠方이라 古之戎政이 其曷用加此리오하니라
矧玆具美하여 其道不廢니 願刻于金石하여 以永示後祀라
02. 영남절도사嶺南節度使의 향군당饗軍堂에 관한 기문
영남절도사嶺南節度使가 관장하는 지역은 중진重鎭이고 그가 세운 향군당饗軍堂의 규모도 크고 웅장하였는데 이 문장도 그에 부합된다.
당唐나라 제도에 의하면, 영남嶺南은 5개의 부府로 되어 있고 각 부府는 10개의 주州를 관할한다.
크고 작은 전차부대와 각종 군령은 모두 절도사節度使의 지시를 따른다.
그 밖으로 해변 지역에 많은 변방 민족이 있는데, 유구流求‧가릉訶陵으로부터 서쪽으로 대하大夏‧강거康居에 이르기까지 물로 둘러싸여 있는 나라가 100개국이나 되니, 이들은 압번박사押蕃舶使가 관할한다.
안으로 영남嶺南 지역 만 리는 관원과 수비병을 거느리고 황제의 명에 따라 〈직무를 수행하고〉 그 바깥쪽 외국 수만 리는 통역 관원을 두어 보화寶貨를 받아내서는 해마다 조정에 공물을 진상하는데, 〈영남절도사嶺南節度使는〉 이 두 사使의 막중한 임무를 한 몸에 지고 광주廣州에서 직무를 수행한다.
이 때문에 그가 빈객賓客을 접대하고 군무軍務를 다스리는 일은 당연히 그 어느 절도사와도 비교될 수 없다.
그리고 빈객을 접대하는 것에는 각종 날고기와 익힌 고기에다 좋은 음악과 겸손한 예절로써 멀고 소원한 이들과 더불어 하나가 되는 일이 있고, 군무를 다스리는 것에는 음식을 먹여주고 잔치를 열어주며 진영에서 돌아온 군사를 위로하고 동정하는 것으로 힘과 마음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일이 있다.
그러니 그가 주재하는 이곳의 대문과 계단이며 담 등 구조물을 다른 곳의 것과 같게 할 수 없다.
반드시 크고 굵은 기둥과 넓은 뜰, 높은 대문이 있어야 할 것이니, 그래야만 당상堂上에서는 빈객들과 예절을 차릴 수 있고, 아래 뜰에서는 군사들의 행보가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어사대부御史大夫 부풍공扶風公이 광주자사廣州刺史로 있으면서 절도사節度使와 압번박사押蕃舶使의 직까지 도맡았는데, 덕을 쌓아 먼 곳의 사람들을 오게 하고 위엄을 떨쳐 군정을 정비하였다.
또 연회를 확대하고 악대樂隊를 확충하였으나 재정의 상황에 맞추었고 〈과도하게 하지는 않았다.〉 이전에는 광주성廣州城 서북 모퉁이에 건물이 있었는데, 그 위치에서는 절도사節度使가 북쪽을 향하고 빈객들이 남쪽을 향하며, 서쪽에서 악대가 음악을 연주하고 동쪽으로는 못을 바라보게 되어 있었다.
또 건물이 앉은 지대가 낮고 반듯하지 않으며 뜰과 행랑채가 낮고 허름하였으므로, 해가 저물지 않으면 뜨거운 열기가 눈앞에 닥쳐 땀이 흐르고 어지러워 예식을 마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큰 연회나 군대행사는 바깥의 높은 공간에서 거행하였으므로 모양새가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공公께서 비로소 그것을 허물고 남쪽에 건물을 새로 짓게 하였으니, 기둥이 가로로는 여덟 개이고 세로로는 열 개였다.
예전의 연회장소는 동쪽 행랑채로 바뀌고 서쪽도 그렇게 되었다.
그 밖에 탈의실과 주방 건물이 있고, 누각을 늘어 세워 경치를 둘러볼 수 있게 하고 정자를 확대하여 음악소리가 퍼지게 하였는데, 이리저리 둘러봐도 막힌 데가 없다.
예전에 못이 있던 곳은 바닥을 더 깊이 파고 나무를 심어 한가로이 쉬게 만들어 마치 숲속 골짜기에 있는 것 같았다.
장인匠人을 어디에서 취했는가 하면 군인들이 제공했고, 일꾼들을 어디에서 취했는가 하면 남방 민족 노복들을 동원했으며, 재목을 어디에서 취했는가 하면 빈 건물에서 옮겨왔다.
간혹 빠진 재목이나 물자를 보충하기 위해 산에서 베어오고 섬에서도 가져왔으며, 농부와 상인들은 따로 하는 일은 없고 음식을 정성껏 제공하였다.
마침내 10월 갑자일에 완공되어 공이 새 건물에서 연회를 베풀 것을 명하였다.
당아幢牙‧용독茸纛‧금절金節‧석우析羽‧패기旆旗‧여수旟旞 등 의장대의 깃발이 모두 건물 아래를 장식한 가운데 큰 북과 작은 북을 두드리고 쇠방울과 징을 울려댔다.
공은 감군사監軍使와 함께 귀빈을 정중히 모시고 동료들을 맞이하였으며 장졸과 관리들이 모두 제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풀잎 옷과 모직 옷을 입은 각지의 부족민들이 올려다보며 줄을 섰는데 천 명도 넘었다.
국그릇과 솥에 통째로 담거나 앞뒤 다리를 담아 굽고 삶은 고깃덩이에다 조류와 어류와 자라 등의 음식이며 단지에 가득 넘치는 주류酒類가 사졸들에게 골고루 제공되었다.
흥왕무興王舞와 복이기服夷伎, 그리고 두드리고 불어대는 음악소리와 날고 뛰는 괴이한 마술 등이 여기저기에서 펼쳐졌다.
의식이 끝나고 음악이 끝나자 차례대로 축하하기를 “이 지역은 백성을 다스리는 범위가 크고 또 다섯 직위를 겸하였으니, 이 건물의 규모가 아니고서는 각종 기물을 구비할 수 없고 공의 덕이 아니고서는 이 많은 사람들을 포용할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형편없던 변방이 이제부터 달라져서 백성들을 크게 융화시킬 인물이 나오시어 변방을 살피시니, 옛 변방 정책이 어찌 이보다 더 나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말하기를 “화원華元은 이름난 대부였으나 양을 잡아 〈병사들에게 먹이면서〉 자기 전차를 모는 마부에게는 주지 않았고, 곽거병霍去病은 훌륭한 장군이었으나 고기를 남기면서도 사졸들이 굶주린 기색을 띠게 하였다.
이들은 그러고서도 능력을 칭송받아 지금까지 전해진다.
그런데 더구나 공께서는 이처럼 미덕을 갖추고 바른 도리를 폐하지 않았으니, 금석金石에 새겨 후세에 영원히 보였으면 한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상의하여 나에게 와 고하며 글을 부탁하였다.
나는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마침내 이 바위에 이처럼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