推
下到今 橫堅鉤貫
하며 又且數十家
를 通爲書
하여 號覃子史纂
이라
後若干年에 柳先生來永州하여 戚其文不大於世하여 求其墓以石銘하니라
매우 가난하였으나 성품이 강직하고 범상치 않아 남이 베풀어주는 것을 구차하게 받지 않았다.
그는 많은 경전을 읽고 여러 유가儒家가 경전에 관해 말한 내용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태사공太史公‧반고班固의 책에서부터 오늘날의 역사서까지 다각도로 연구하고 수십 명의 학설을 이해한 다음, 〈자기의 주관을 형성하여〉 책을 저술하고 그 이름을 《담자사찬覃子史纂》이라 하였다.
또한 《육자鬻子》‧《노자老子》‧《관자管子》‧《장자莊子》‧《자사자子思子》‧《안자춘추晏子春秋》‧《맹자孟子》 이후 오늘날의 제자서諸子書까지 취하여 검토하였는데, 그 학술의 범위가 유가儒家‧묵가墨家‧명가名家‧법가法家에서부터 개‧돼지와 풀‧나무 등 동식물에 관한 것까지 포함되었다.
이는 모두 세상에 유익한 것들로서 이것을 엮어 《담자자찬覃子子纂》이라 했으니, 여기에 또 백여 종의 제자諸子가 수록되었다.
그는 학문에 치중하고 세상에 나가 벼슬을 얻는 데에는 힘쓰지 않았다.
출척사黜陟使가 그의 저서를 가져가 조정에 이름을 알림으로써 태자교서太子校書라는 직함을 제수하였다.
모년 모월 모일에 영주永州 기양현祁陽縣 모향某鄕에서 죽었다.
죽을 때 그가 탄식하기를 “차라리 명예가 있고 곤궁한 게 나을까, 아니면 명예가 없고 풍족한 게 나을까?
차라리 강직하여 쓰러지는 게 나을까, 아니면 세상과 뒤섞여 편히 사는 게 나을까?” 하였다.
그로부터 몇 년 뒤에 유선생柳先生이 영주永州에 와서 그의 글이 세상에 크게 이름나지 못한 것이 서글퍼 그의 묘를 찾아와 돌에 명문銘文을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