曾祖彦師는 朝散大夫尙書駕部郞中이요 祖瑾 懷州武德縣令이요 考淸은 朝議郞試大理寺丞 贈右贊善大夫라
公以忠肅循其中하고 以文術昭於外하며 推經旨以飾吏事하고 本法理以平人心이라
始命蘄州 蘄春主簿하여 句會敏給하여 厥聲顯揚이라
仍以左領軍衛兵曹爲安南經略巡官하여 申固扞衛하여 有聞彰徹이라
轉金吾衛判官하고 三歷御史하여 績用弘大하여 揚於天庭이라
加檢校尙書禮部員外郞하고 換山南東道節度判官이라가 復轉郞中이라
遷檢校太子右庶子 兼安南都護 御史中丞하여 充本管經略招討處置等使하니라
公自爲吏로 習於海邦하고 凡其比較勤勞하여 利澤長久라
去之則
稱亂
하고 復至而寇攘順化
러니 及受命專征
하여 得陳嘉謨
하여는 誓拔禍本
하고 納於夷軌
라
道阻而通百貨
하고 地偏而具
하며 儲偫委積
하여 師旅無
하고 繕完板榦
하여 控帶兼
라
이 怙力背義
하니 公於是陸聯長轂
하고 海合艨艟
하여 再擧而克殄其徒
하고 廓地數
하여 以歸於我理
하니라
酋帥 負險蔑德
하니 公於是外申皇威
하고 旁達明信
하여 一動而悉朝其長
하고 取州二十
하여 以被於華風
이라
易
以冠帶
하고 化姦宄爲誠敬
하여 皆用周禮
하고 率由漢儀
라
公患浮海之役
이 可濟可覆
하여 而無所恃
하여 乃刳
하여 以闢坦途
라
鬼工來幷
하고 人力罕用
하여 束成通溝
하고 摩霄之阻 硩爲高岸
하여 而終古蒙利
라
公患
하여 乃復銅柱 爲正制
하여 鼓鑄旣施
에 精堅是立
이라
固圉之下에 明若白黑하여 易野之守 險逾丘陵이나 而萬世無虞라
奇琛良貨 溢於
하고 殊俗異類 盈於
하니 優詔累旌其忠良
하고 太史嗣書其功烈
이라
明年에 其孤某官與宗人號奉裳帷하여 率其家老하고 咨於叔父延唐令某하여 卜宅於潭州某原이라
乃刻玆石하여 著公之閥하여 以志於丘竁하여 以告於幽明이라
05. 당唐 고중산대부故中散大夫 검교檢校 국자좨주國子祭酒 겸안남도호兼安南都護 어사중승御史中丞 충안남본관경략초토처치등사充安南本管經略招討處置等使 상주국上柱國 무성현개국남武城縣開國男 식읍삼백호食邑三百戶 장공張公의 묘지명墓誌銘 서문 포함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가 중흥했을 때 마원馬援은 먼 지역에서 큰 뜻을 펼쳤고, 진晉나라 무제武帝가 통일했을 때 도황陶璜은 풍속이 다른 곳에서 은택을 베풀었으니, 치적은 그의 은덕과 함께 이루어지고 공적은 융성한 시운時運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지금 황제께서 즉위하시어 멀리 해변에까지 교화가 미치니, 이때 공이 그 업적을 다시 이루어 교지交趾를 다스리는 일이 옛사람의 뒤를 계승하게 되었다.
공의 휘諱는 아무요, 자는 아무요, 아무 군郡 사람이다.
증조부 언사彦師는 조산대부朝散大夫 상서가부랑중尙書駕部郞中을 역임했고, 조부 근瑾은 회주懷州 무덕현령武德縣令을 역임했으며, 선친 청淸은 조의랑朝議郞 시대리사승試大理寺丞을 역임하고 우찬선대부右贊善大夫에 추증되었다.
모두 아름다운 덕이 있었는데 이것이 쌓이고 쌓여 훗날의 복이 되었다.
공은 충성과 공경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문장과 학술이 밖으로 드러났으며, 경전經典의 뜻을 미루어 정사를 처리하고 법치法治를 근간으로 삼아 인심을 화평하게 하였다.
처음에는 기주蘄州의 기춘현주부蘄春縣主簿에 임명되었는데 재정의 회계가 정확하고 민첩하여 그 명성이 드러났다.
이어서 좌령군위병조左領軍衛兵曹로 있다가 안남경략순관安南經略巡官이 되어 공고하게 변방을 지켜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금오위판관金吾衛判官으로 전보된 뒤에 세 차례 어사御史를 역임하면서 이룬 공적이 커 황제의 귀에도 들리게 되었다.
검교檢校 상서예부원외랑尙書禮部員外郞으로 승진되고 산남동도절도판관山南東道節度判官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예부낭중禮部郞中으로 전직되었다.
안남부도호安南副都護가 되어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고, 경략부사經略副使로 충원되었다.
검교태자우서자檢校太子右庶子 겸안남도호兼安南都護 어사중승御史中丞로 옮겨 본관경략초토처치등사本管經略招討處置等使로 충원되었다.
공은 안남安南의 관리가 되면서부터 해변지역의 특성을 익히고 비교적 정성을 다해 다스렸으므로 이익과 혜택이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공이 그곳을 떠나면 이료夷獠가 난을 일으키고 공이 다시 오면 도적들이 복종하여 순하게 변했는데, 군대 운영의 전권을 위임받아 훌륭한 계책을 펼칠 수 있게 되자, 화의 근원을 뽑아버리고 평탄한 길로 바꿔놓아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이에 조정에 바치는 공물을 통일하고 조세의 징수를 공평히 할 것을 명했다.
백성을 다스릴 때는 조처하는 방도를 빠짐없이 강구하고, 고을의 구역을 획정할 때는 지형에 따라 세부 구조를 만드는 법을 갖추었다.
도로는 험난해도 온갖 물자가 유통되고 지역은 궁벽해도 다섯 관리가 구비되었으며, 비축된 물자가 풍부하여 군대에는 굶주림을 호소하는 소리가 없었고, 성벽을 보수하고 증축하여 지형이 험난한 변방을 수비하는 책무를 다했다.
문단국文單國의 환왕環王이 세력을 믿고 의리를 저버리자, 공이 이에 육지에서는 전차를 줄 세우고 바다에서는 전함을 한곳으로 모아, 두 번 군사를 출동하여 그 무리를 토벌하고 영토 수천 리를 확장하여 우리나라의 치하로 귀속되게 하였다.
그리고 오만烏蠻의 수령이 험준한 지형을 믿고 부덕한 짓을 행하자, 공이 이에 밖으로는 황제의 위엄을 펼치고 곁으로는 분명한 신의를 전달하여, 한 번 출동으로 그 수령을 항복받고 20주州를 취하여 중화中華의 풍속이 퍼지게 하였다.
갖옷과 풀로 만든 옷을 관대冠帶 차림으로 바꾸게 하고, 간교한 심술을 성실한 마음으로 변하게 하여, 모두 주周나라의 예법을 쓰고 한漢나라의 의식을 따르게 했다.
공은 바다로 다니는 일이 제대로 건널 수도 있지만 뒤집어질 수도 있어 믿을 수 없음을 염려하여, 연오連烏를 깎아 평탄한 길을 열었다.
솜씨 좋은 장인들을 불러 모으고 일반인은 적게 동원하였는데, 큰 바다가 좁혀져 툭 트인 도랑으로 변하고 하늘을 찌르던 험한 벼랑이 허물어져 약간 높은 언덕이 됨으로써 앞으로 영원히 그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공은 변방의 경계선에 관한 기준이 이랬다저랬다 하여 일정치 않은 것을 염려한 나머지, 동주銅柱를 복구해 그 기준을 확고하게 정해야겠다는 생각에서 구리를 주조하여 단단한 기둥을 세웠다.
변방을 튼튼히 한 동주銅柱 아래에 경계가 흑백처럼 분명해졌으므로, 평야를 지키는 것이 험난한 구릉을 지키는 것보다 어렵다고는 하나 만세토록 걱정할 일이 없게 되었다.
진기한 보물과 값진 재물이 옥부玉府에 넘쳐나고 풍속이 다른 지역의 이민족이 고가藁街에 가득하게 되자, 황제께서는 치하하는 명을 내려 여러 차례 그 충성과 재능을 표창하였고 태사太史는 역사서에 연이어 그 업적을 기록했다.
그리하여 국자좨주國子祭酒로 승진되고 무성남武城男에 봉해졌으며, 식읍食邑 300호를 받았다.
재차 책훈策勳하여 상주국上柱國에 이르고 세 번 승진되어 중산대부中散大夫에 이르렀다.
모년 모월 재직 중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약간 년이다.
천자께서 애도하고 상심과 위로의 말씀이 있었다.
이듬해에 공의 아들 아무가 종친들과 통곡하며 상여를 모시고 와서 집안 어른들을 인솔하고 숙부 연당령延唐令 아무에게 물어, 담주潭州 아무 언덕에 장지를 정했다.
모월 모일 안장하니, 사람들의 의견이 모두 좋다고 하였고 점괘도 길한 것으로 나왔다.
이에 이 돌을 새겨 공의 공적을 드러내고 묘지에 부장하여 저승과 이승에 고한다.
당형천唐荊川이 말하였다.
“일종의 특별한 격조로 분류할 만한 문장으로 육조체六朝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