予覽子厚之文컨대 其議論處多鑱畫하고 其記山水處多幽邃夷曠이라
至於墓誌碑碣하여는 其爲御史及禮部員外時所作은 多沿六朝之遺일새 予不錄하고 錄其貶永州司馬以後稍屬雋永者凡若干首하여 以見其風槪云이라
惟柳州古爲南夷라 椎髻卉裳으로 攻劫鬪暴하여 雖唐虞之仁不能柔하고 秦漢之勇不能威라가
學者道堯舜孔子
하여 라 執經書
하고 引仁義
하여 旋辟唯諾
하여 中州之士
도 하니
刺史柳宗元始至
에 大懼不任
하여 以墜敎基
라 奠薦法齊時事
를 禮不克施
하여
하고 洎於贏財
하여 取土木金石
하며 徵工僦功
하여 完舊益新
하니
十月
에 成
이라 乃安神棲
하고 乃正法庭
하여 祗會群吏
하고
人去其陋하여 而本於儒하며 孝父忠君하고 言及禮義어든
01. 새롭게 중수한 유주柳州 문선왕묘文宣王廟의 비문
내가 유자후柳子厚의 문장을 열람해보니, 논변論辯을 전개한 부분은 핵심을 찌르는 작품이 많고, 산수山水를 기록한 부분은 깊숙하고 고요하며 평탄하고 광활한 경물에 관한 것들이 많다.
묘지墓誌와 비갈碑碣에 관한 작품은, 감찰어사監察御史 및 상서예부원외랑尙書禮部員外郞으로 재직할 때 쓴 것들은 육조六朝 때의 유풍을 답습한 경향이 많았으므로 초록하지 않았고, 영주사마永州司馬로 폄직된 이후에 쓴 것으로 비교적 준수하다고 분류할 만한 작품 약간 편을 초록하여 그 풍모와 기개를 드러내 보였다.
그러나 한창려韓昌黎(한유韓愈)보다 못한 작품이 많다.
중니仲尼의 도는 제왕이 천하를 교화하는 덕과 그 부침浮沈과 성쇠盛衰를 함께하였다.
그러나 유독 유주柳州는 옛날부터 남이南夷라고 하여 몽치 모양의 상투머리에다 풀잎으로 얽어 만든 옷차림으로 서로 공격하여 약탈하고 난폭하게 싸워댔으므로, 요堯‧순舜의 인자한 덕으로도 교화시킬 수 없었고 진秦‧한漢의 용맹한 군대로도 제압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우리 당唐나라가 들어선 뒤에야 비로소 올바른 법도를 따랐다.
그래서 관리를 배치하여 공물을 바치고 채복采服과 위복衛服이 모두 교화되자, 관을 쓰고 띠를 둘러 〈유자儒者의 복장으로〉 국법을 준수하고 문인들을 정계에 진출시켜 등용하였다.
글을 배우는 사람은 요堯‧순舜과 공자孔子의 도를 말하여 〈학문수양의 원천을〉 좌우에서 취하듯 〈도처에서 자연스럽게 얻는 수준에 이르렀다.〉 경서를 손에 쥐고 인의仁義를 인용하면서 행동거지를 예법禮法에 맞게 겸손하게 함으로써 중원中原의 선비들 사이에서도 간혹 그 수준을 따라갈 수 없다고 자책할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된 뒤에야 비로소 당唐나라의 덕이 크고 또 멀리까지 미쳤으며, 공자孔子의 도가 높고 또 환히 밝아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화元和 10년 8월에 유주柳州의 공자孔子 사당 건물이 허물어져 신위神位가 거의 훼손되었다.
자사刺史 유종원柳宗元이 처음 부임하여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교화의 기초가 무너지게 함으로써 정미일에 제물을 올리고 재계하는 계절제사에 관한 예를 진행할 수 없게 되지 않았는가 싶어 크게 두려웠다.
이에 초헌初獻‧아헌亞獻‧종헌終獻 등 세 제관祭官의 제복祭服 대금을 수합하고 그 경비를 더 충분히 확보한 뒤에 그것으로 흙‧목재‧쇠붙이‧돌 등 자재를 준비하고 인부들을 고용해 공사를 진행하여 옛 모습을 복원하여 새롭게 만들었다.
10월 을축일에 왕궁王宮의 정실正室이 완성되자, 마침내 위패를 봉안하고 정전正殿 마당을 정리한 뒤에 삼가 관리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길일을 잡아 문선왕文宣王의 영전에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옛날 부자夫子께서 구이九夷에서 살고 싶어 하시자, 그 당시 문인들도 성인聖人의 말씀에 의아심을 품었습니다.
그런데 부자夫子의 세대가 지나간 지 천여 년이 된 지금 그 가르침이 비로소 행해지고 이 고장에까지 파급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고루함을 버리고 유학儒學을 근본으로 삼았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면서 예절과 의리를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영령께서 거룩하고 찬란하게 이곳에 임하시어 후생들이 교화를 받게 되었으니, 〈그 다행스러움을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부자夫子께서는 신묘한 도로 교화를 행하셨으니, 저희가 지금 그 묘리를 감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삼가 그 교화에 순응하여 부자夫子의 넋을 편안하게 해드리렵니다.
일러주시고 가르쳐주신 말씀을 떠올리면 마치 바로 눈앞에 계신 듯합니다.
진정 영혼이 계실 터이니, 어찌 감히 경건히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거주하면 누추하지 않을 것이라 하신 옛날의 그 말씀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삼가 제사를 엄숙하게 올리면서 길이길이 존경하렵니다.
희생을 매어두는 비석을 마련하고 이 글을 새겨 넣어 사당 앞에 세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