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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柳宗元(1)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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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興致摹寫 足稱山水
作新亭于馬退山之陽하니
因高丘之阻以面勢하여 無欂櫨節梲之華
不斲椽하고 不翦茨하고 不列墻하며
以白雲爲藩籬하고 碧山爲屛風하니 昭其儉也
是山崒然起於莽蒼之中하니 馳奔雲矗하여 亘數十百里하며 하니
諸山來朝하여 勢若星拱이라
蒼翠詭狀 綺綰繡錯하니
蓋天鍾秀於是하여 不限於遐裔也
然以壤接하고 俗參夷徼하여 不至하고 不及이라
巖徑蕭條하니 登探者以爲嘆하니라
歲在辛卯 我仲兄以方牧之命으로 試于是邦하니
夫其德及故信孚하고 信孚故人和하고 人和故政多暇
由是嘗徘徊此山하여 以寄勝槪라가
迺墍迺塗하여 作我攸宇하니 於是不崇朝而木工告成하니라
每風止雨收하고 煙霞澄鮮이면 輒角巾鹿裘 率昆弟友生冠者五六人하여而登焉이라
於是手揮絲桐하고 目送還雲할새 西山爽氣 在我襟袖하고 萬類 攬不盈掌하니라
夫美不自美하고 因人而彰하나니
이면 蕪沒於空山矣
是亭也 僻介하여 佳境罕到하니 不書所作하여 使盛跡鬱堙이면 是貽林澗之媿
故志之하노라


11. 옹주邕州 마퇴산馬退山모정茅亭에 관한 기문
흥취를 묘사한 문장이 족히 산수山水와 걸맞는다 하겠다.
겨울 10월에 마퇴산馬退山 남쪽에 새 정자를 지었다.
높은 구릉의 험난한 곳을 의지하여 적당히 안배하여 세웠는데 기둥 위의 두공이나 동자기둥 등 화려한 장식은 없다.
서까래는 깎아 다듬지 않았고 띠풀 지붕은 처마를 자르지 않았으며 담도 세우지 않았다.
흰 구름을 울타리로 삼고 푸른 산을 병풍으로 삼았으니, 그것은 검소함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이 산은 광활한 평원 가운데 높이 솟아 구름에까지 닿았고 마치 달리는 말처럼 백여 리를 뻗어 이어지는데, 꼬리는 거친 들판 위에 서려 있고 머리 부분은 큰 시내를 향해 물을 빨아들인다.
다른 여러 산들이 와서 조회하는 모양은 마치 수많은 별들이 북두성北斗星을 호위하는 것만 같다.
푸른 산의 기기묘묘한 형상은 비단 자락으로 비끄러매고 비단 폭을 이리저리 걸쳐놓은 듯 아름답다.
이는 하늘이 먼 변방이라 하여 차별을 두지 않고 수려한 정기를 모아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먼 변방에 접해 있고 변방 오랑캐의 풍속이 뒤섞인 지방이었기에 주왕周王거마車馬 자취가 이르지 못하고 사공謝公의 나막신도 미치지 못하였다.
바윗길이 워낙 궁벽하였으므로 이곳을 오르는 자들이 탄식해마지 않았다.
신묘년에 나의 중형仲兄이 지방관에 제수하는 명을 받고 이 고장에 부임하였다.
그는 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신임信任하였고, 신임했으므로 화목和睦하였고, 화목했으므로 정사政事가 적고 여가가 많았다.
그리하여 이 산을 오락가락하면서 수려한 경관에 정을 붙였다.
그러다가 흙을 개어 벽을 발라 내 집을 지었는데, 한나절이 되기 전에 목수가 작업을 마쳤다.
언제나 바람이 멎고 비가 그쳐 안개와 노을이 고울 때면 각건角巾과 사슴갖옷차림으로 형제와 젊은 벗 대여섯을 거느리고 산봉우리에 올라갔다.
그리고는 손으로는 거문고를 타고 눈으로는 돌아가는 구름을 보내노라면, 서산西山의 상쾌한 기운이 내 옷자락 안에 들어왔고, 팔방八方만상萬狀을 한 손에 걷어잡아도 거뜬하였다.
대체로 아름다움이란 절로 아름다울 수 없고 사람에 의해서야 드러난다.
난정蘭亭우군右軍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맑은 여울물과 긴 대나무가 쓸쓸한 산에 묻혀버렸을 것이다.
이 정자는 궁벽한 민령閩嶺에 위치하여 그 뛰어난 경치를 보러 오는 이가 거의 없으니, 이 정자를 세운 사실을 글로 쓰지 않아 거룩한 자취가 인멸되게 한다면, 이는 숲과 시냇물에게 부끄러움을 안겨주는 꼴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내용을 기록하였다.


역주
역주1 邕州馬退山茅亭記 : 이 글은 獨孤及(725~777)의 《毘陵集》 권17에도 〈馬退山茅亭記〉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何焯의 《義門讀書記》 권36에 “《文苑英華》에 獨孤常州가 쓴 글로 되어 있는데 그것이 맞는 것 같다.” 하고, 또 “신묘년은 元和 6년(811)인데 이때는 柳子厚가 이미 당시 문체의 틀을 벗어난 뒤이다. 그런데 어찌 이와 같은 글을 썼겠는가.” 하면서 강하게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런 다음, 60년 전 신묘년인 天寶 10년(751)의 역사사실을 근거로 제시하여 獨孤及의 작품이 맞다고 하였다. 그리고 본문에 “신묘년에 나의 仲兄이 지방관에 제수한다는 명을 받고 이 고장에 부임하였다.”라고 한 부분의 ‘仲兄’을 작자의 재종형인 柳寬이라 할 때 柳寬은 신묘년 8월 7일에 이미 죽었는데, 본문의 첫머리에는 10월에 정자를 지었다고 하였으므로 시점이 맞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柳寬은 柳宗元의 숙부 항렬이며, 元和 5년 8월부터 8년까지 崔詠이 邕州刺史 兼邕管經略使로 재직하였으므로 그 사이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 수 없는 상황이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작자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柳河東集》을 위시하여 대부분의 자료에 柳宗元의 작품으로 표기되었고, 《粤西文載》 권30에는 〈邕州柳中丞作馬退山茅亭記〉로 되어 있는 등 일반적으로 柳宗元의 작품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 《唐宋八家文抄》를 편집한 茅坤까지도 의심하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邕州의 관청소재지는 지금의 廣西省 南寧市이고, 馬退山은 廣西 邕寧縣 북쪽 15리 지점에 있는 산이다.
역주2 十月 : 《毘陵集》에는 ‘十二月’로 되어 있다.
역주3 尾蟠荒陬 首注大溪 : 구불거리며 길게 뻗은 산줄기를 龍에 견주어 하는 말이다.
역주4 荒服 : 五服의 하나로, 왕성으로부터 2,000리에서 2,500리 떨어진 지방이다. 흔히 먼 변방을 가리킨다.
역주5 周王之馬跡 : 周王은 周 穆王을 가리킨다. 周 穆王이 여덟 마리의 준마가 끄는 수레를 타고 마음이 내키는 대로 천하를 돌아다녔으므로 하는 말이다.
역주6 謝公之屐齒 : 謝公은 晉나라 謝安을 가리킨다. 謝安이 山水 유람을 좋아하였는데, 산에 오를 때 신는 나막신을 특별하게 만들어, 산을 올라갈 때는 앞굽을 빼고 내려올 때는 뒷굽을 빼버림으로써 몸이 균형을 이루게 했다고 한다. 여기서는 名山 유람을 좋아하여 먼 곳까지 찾아다니는 여행객을 범칭한 것이다.
역주7 山椒 : 山巓과 같다.
역주8 (以)[八]極 : 八方과 같다. 저본에는 ‘八’이 ‘以’로 되어 있는데, 《柳河東集》에 근거하여 바로잡았다.
역주9 蘭亭也 不遭右軍 : 蘭亭은 지금의 浙江省 紹興縣 蘭渚에 있는 정자이고, 右軍은 右軍將軍을 지낸 晉나라 王羲之(303~361)를 가리킨다. 晉 穆帝 永和 9년(353) 3월 3일에 王羲之를 위시하여 謝安‧孫綽 등 명사 41인이 會稽 山陰에 있는 蘭亭에 모여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풍류를 즐겼었는데, 王羲之가 그때 지은 시들을 모아 엮은 책에 서문을 짓고 또 직접 써서 후대에 그 사실을 전하였다.
역주10 淸湍修竹 : 王羲之가 쓴 〈蘭亭集序〉에서 蘭亭이 자리 잡은 곳의 주위 경물을 묘사한 내용에 나오는 문구이다. “이곳에는 높은 산 가파른 봉우리에 울창한 숲과 긴 대나무가 있고, 또 맑은 개울물, 급히 흐르는 여울이 좌우의 경치와 서로 어울린다.[此地有崇山峻嶺 茂林修竹 又有淸流激湍 映帶左右]”라고 하였다.
역주11 閩嶺 : 福建 북부의 산봉우리를 가리킨다.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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