孔子沒而百家之言이 各出其見하여 以相揣摩하니 而柳子厚爲之辯析하고 竝有指歸하니 可觀覽이라
穆公在孔子前幾百歲
하고 列子書言鄭國
에 皆云
하니 不知向何以言之如此
오
是歲
는 이요 秦惠王韓列侯趙武侯二年
이요 魏文侯二十七年
이요 燕釐公五年
이요 齊康公七年
이요 宋悼公六年
이요 魯穆公十年
이라
雖不槪於孔子道나 然其虛泊寥闊하여 居亂世에 遠於利하여 禍不得逮於身하고 而其心不窮하니
其文辭類莊子나 而尤質厚하여 少爲作하니 好文者可廢耶아
然觀其辭에 亦足通知古之多異術也니 讀焉者愼取之而已矣니라
공자孔子가 세상을 떠난 뒤로 백가百家의 말이 저마다 그 견해를 드러내어 서로 옳으니 그르니 따졌는데, 유자후柳子厚가 그 시비를 가려 분석하고 아울러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였으니, 그 문장을 살펴볼 만하다.
유향劉向은 수많은 서적을 널리 섭렵한 것으로 옛날에 이름난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쓴 〈열자목녹원서列子目錄原序〉에는 그답지 않게 열자列子가 정鄭 목공穆公 때 사람이라고 말했다.
정鄭 목공穆公은 공자孔子보다 거의 100년 전에 살았고, 《열자列子》에 정鄭나라 일을 말할 때 모두 자산子産과 등석鄧析을 거론하였으니, 유향劉向이 무엇 때문에 그와 같이 말했는지 모르겠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정鄭 수공繻公 25년(B.C. 398)은 초楚 도왕悼王 4년인데 이때 정鄭나라를 포위하여 이기자, 정鄭나라가 자기 재상 사자양駟子陽을 죽였다고 하였는데, 자양子陽은 곧 열자列子와 같은 시대 사람이다.
이해는 주周 안왕安王 4년, 진秦 혜왕惠王ㆍ한韓 열후列侯ㆍ조趙 무후武侯 2년, 위魏 문후文侯 27년, 연燕 이공釐公 5년, 제齊 강공康公 7년, 송宋 도공悼公 6년, 노魯 목공穆公 10년이었다.
혹시 유향劉向이 노魯 목공穆公 때라고 말해야 할 것을 실수로 정鄭 목공穆公으로 잘못 말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처럼 어긋나겠는가.
나중에 《열자列子》를 주석한 장담張湛은 그저 《열자列子》의 내용이 목공穆公 이후의 일들이 적지 않은 것을 알고 이상하게 생각했을 뿐, 그가 살았던 시기를 추정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열자列子》는 후세 사람이 추가하고 고친 부분이 많아 이미 본래의 모습이 아니다.
아무튼 장주莊周가 《열자列子》의 어구語句를 모방하였으니, 그가 거론한 하극夏棘ㆍ저공狙公ㆍ기성자紀渻子ㆍ계함季咸 등의 사적은 모두 《열자列子》로부터 나왔으며, 이와 같은 사례는 이루 다 적을 수 없을 정도이다.
《열자列子》의 내용이 비록 공자孔子의 도道와는 부합하지 않지만, 그 마음은 담박하고 원대하여 난세에 살면서도 사적인 이익을 멀리함으로써 재앙이 그 자신에게 미치지 않았고, 이로 인해 그 마음이 고달프지 않았다.
이는 《주역周易》에서 말한 “세속을 피해 숨어 살아도 걱정하는 일이 없다.”라고 한 도리가 어쩌면 이와 비슷할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취할 만한 점이 있다고 본다.
그 문자文字와 어구語句는 대체로 《장자莊子》와 비슷하지만 훨씬 더 질박하고 후중하여 고의로 꾸미고 조작한 흠이 적으니, 문장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이것을 버릴 수 있겠는가.
〈양주楊朱〉와 〈역명力命〉 두 편은 과연 양주楊朱의 설을 말한 글일까 의심되고, 그 안에 언급한 위공자모魏公子牟와 공천孔穿은 모두 열자列子 이후 인물이니, 이런 부분은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의 문장을 살펴보면 충분히 옛날에 서로 다른 학술이 많았다는 것을 환히 알 것이니, 이 책을 읽는 사람이 신중히 가려 취하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