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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柳宗元(2)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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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3. 죽은 벗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 독고군獨孤君묘갈문墓碣文
別調
특이한 문체이다.
嗚呼
아, 슬프다.
有唐仁人獨孤君之墓 祔於其父太子舍人諱助之墓之後
나라의 어진 사람 독고군獨孤君의 무덤을 그의 부친 태자사인太子舍人 독고조獨孤助의 무덤 뒤쪽에 부장祔葬하였다.
自其祖贈太子少保諱問俗而上 其墓皆在 이라 故再世在此
태자소보太子少保에 추증된 그의 조부 독고문속獨孤問俗부터 그 윗대 조상들은 무덤이 모두 파수灞水 좌측에 있으나, 지금 왕후의 능을 그 곁에 조성하였기 때문에 두 대의 무덤이 이곳에 있게 된 것이다.
嗚呼 獨孤君之道和而純하고 其用端而明하여 內之爲孝하고 外之爲仁하여 黙而智하고 言而信이라
아, 독고군獨孤君의 도는 조화롭고 순수하며, 그 운용은 바르고 밝아서 안으로는 부모를 섬기는 가 되고 밖으로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이 되어, 침묵하더라도 지혜롭고 말을 하면 믿음이 있었다.
其窮也不憂하고 其樂也不淫이라
그는 곤궁해도 근심하지 않았고 즐거워도 방탕하지 않았다.
讀書推孔子之道하되 必求諸其中이라
옛글을 읽을 때는 공자孔子의 도를 추구하되 반드시 자기의 마음으로 체득할 것을 구했다.
其爲文深而厚하되 尤慕古雅하고 善賦頌하니 其要咸歸於道
글을 지을 때는 깊이 있고 중후하게 짓되 무엇보다 고상하고 우아한 문체를 좋아했으며 을 잘 지었는데, 그 핵심은 모두 도에 귀착되었다.
昔孔子之世하여 能得於孔子하니 後之仰其賢者 譬之如日月而莫有議者焉이라
옛날 공자孔子 당시에 안회顔回라는 사람이 있어 공자孔子에게 인정을 받았는데, 후대에 그의 거룩함을 흠앙하는 자들이 그를 해와 달에 비유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嗚呼 獨孤君之明且仁으로 如遭孔子 是有兩顔氏也
아, 만약 독고군獨孤君과 같은 밝은 지혜와 어진 덕으로 공자孔子를 만났더라면 두 안씨顔氏가 있게 되었을 것이다.
今之世有知其然者하여 其信於天下乎
지금 세상에 이 점을 아는 사람이 있어서 천하가 그것을 믿게 할 수 있는가?
使夫人也夭而不嗣어늘 世之惑者 猶曰尙有天道하니 噫乎甚邪
하늘이 이와 같은 사람을 요절하게 하고 자식조차 두지 못하게 했는데도 세상에 정신 나간 사람은 그래도 천도天道가 있다고 말하니, 아, 이는 너무 심하지 않은가.
君諱申叔이요 字子重이라
의 이름은 신숙申叔이며 자는 자중子重이다.
年二十二擧進士하고 又二年 用博學宏詞爲校書郞하며
22세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또 2년 뒤에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었다.
又三年 居父喪이라가而沒하니 蓋貞元十八年四月五日也
또 3년이 지나 부친이 죽어 상중에 있다가 소상小祥을 치르지 못하고 죽으니, 정원貞元 18년(802) 4월 5일이었다.
是年七月十日而葬하니 鄕曰某鄕이요 曰某原이라
이해 7월 10일 장례를 지냈는데, 그 은 아무 이고 은 아무 이다.
嗚呼 君短命하고 行道之日未久 故其道信於其友 而未信於天下
아, 은 명이 짧고 도를 행한 날이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도가 벗들에게는 믿음을 받았지만 온 세상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받지 못했다.
今記其知君者於墓하노라
이제 을 아는 사람들을 묘비에 기록한다.
韓泰安平 南陽人이요
한태韓泰는 자가 안평安平이며 남양南陽 사람이다.
李行諶元固
이행심李行諶은 자가 원고元固이다.
其弟行敏中明 趙郡贊皇人이요
그의 아우 이행민李行敏은 자가 중명中明이며 조군趙郡 찬황贊皇 사람이다.
柳宗元 河東解人이요
유종원柳宗元하동河東 해현解縣 사람이다.
淸河人이요
최광략崔廣略청하淸河 사람이다.
韓愈退之 昌黎人이요
한유韓愈는 자가 퇴지退之이며 창려昌黎 사람이다.
王涯廣津 太原人이요
왕애王涯는 자가 광진廣津이며 태원太原 사람이다.
呂溫和叔 東平人이요
여온呂溫은 자가 화숙和叔이며 동평東平 사람이다.
崔群敦詩 淸河人이요
최군崔群은 자가 돈시敦詩이며 청하淸河 사람이다.
劉禹錫夢得 中山人이요
유우석劉禹錫은 자가 몽득夢得이며 중산中山 사람이다.
李景儉致用 隴西人이요
이경검李景儉은 자가 치용致用이며 농서隴西 사람이다.
嚴休復玄錫 馮翊人이요
엄휴복嚴休復은 자가 현석玄錫이며 풍익馮翊 사람이다.
京兆杜陵人이라
위사韋詞는 자가 치용致用이며 경조京兆 두릉杜陵 사람이다.
子厚之誌文 所取者甚少하니
유자후柳子厚지문誌文에 관해서는 선택한 작품 수가 매우 적다.
蓋以子厚爲御史及禮部員外時所作 大都未免爲唐以來四六綺麗之遺
그 이유는 유자후柳子厚어사御史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 재직할 때 지은 것들이 대부분 나라 이전 시기부터 내려오던 사륙문四六文 문체의 화려한 틀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而謫永州司馬以後 則文近於西漢矣
하지만 영주사마永州司馬로 폄적된 이후에는 그 문체가 서한西漢의 그것에 가까웠다.
故其所爲遊山記與士大夫書幷他雜著 皆與韓昌黎相頡頏者也
그래서 그가 지은 산수유람기와 사대부에게 보낸 편지 및 기타 잡저는 모두 한창려韓昌黎와 서로 어깨를 겨룰 만한 것들이다.
姪輩讀書當深思而識之니라
너희 내 조카들은 글을 읽을 때 마땅히 이 점을 깊이 생각하여 알고 있어야 한다.
역주
역주1 : 본문의 내용에 따르면, 이 작품은 작자의 나이 30세 때인 貞元 18년(802) 藍田尉로 재직할 당시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獨孤君은 이름이 申叔(776~ 802), 자가 子重으로 河南 洛陽 사람이며 작자보다 3년 연하이다. 貞元 13년(797)에 進士에 급제하고, 2년 뒤 博學宏詞科에 급제하여 校書郞을 지냈다.
역주2 灞水之左 : 灞水는 關中八川의 하나이다. 陝西省 藍田縣 서북쪽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渭水로 들어간다. 左는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했을 때의 방위로, 동쪽을 가리킨다.
역주3 今王(父)[后]營陵於其側 : ‘后’가 저본에는 ‘父’로 되어 있으나, 何焯의 《義門讀書記》에 근거하여 바로잡았다. 왕후는 唐 德宗의 후비인 昭德王后를 가리킨다. 貞元 3년(787)에 죽어 지금의 陝西 乾縣인 奉天에 능을 조성하였으며, 능호는 靖陵이다.
역주4 顔回 : 春秋 때 魯나라 사람으로, 자는 子淵이다. 孔子에게 인정을 받은 제자로서 덕행이 뛰어났다.
역주5 : 練服ㆍ練祭의 약칭으로 小祥을 말한다. 부모가 죽은 지 1년 만에 지내는 제사를 小祥이라 하는데, 이때 상주가 마전한 천으로 지은 옷을 입기 때문에 練이라 한다.
역주6 : 무덤을 조성한 자리라는 뜻이다.
역주7 崔廣略 : 廣略은 崔郾(768~836)의 자이다. 이름자인 ‘郾’자가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역주8 韋詞致用 : ‘韋詞’가 《舊唐書》에는 ‘韋辭’로 되어 있고 韋辭(773~830)의 자는 踐之라고 하였다. ‘致用’은 앞서 이미 李景儉의 자를 표기한 다음, 이어 轉寫하는 과정에 잘못 중복된 것이 아닐까 의심된다. 그러나 李景儉의 자가 《舊唐書》에는 ‘寬中’으로 되어 있으므로 이 두 사람의 자가 각기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唐宋八大家文鈔 校注集評》의 주에는, 陳景雲의 《柳集點勘》에 “唐나라 사람은 두 개의 자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매우 많다.”라고 한 내용을 소개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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