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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柳宗元(1)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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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文自有法度
러니 爲余言 邑有聞人濮陽吳君하니 長鬣而廣顙하고 好學而善文이라
居鄕黨 未嘗不以信義交於物하고 敎子弟 未嘗不以忠孝端其本이라
以是卿相賢士 率與亢禮라하니라
余嘗聞而志乎心이러니
會其子偘 更名武陵하고 升進士라가 得罪來永州
因奉其先人文集十卷하여 再拜請余以文冠其首하니 余得徧觀焉하니라
其爲辭賦 有戒苟冒陵僭之志하고 其爲詩歌 有交王公大人之義하고 其爲誄誌弔祭 有孝恭慈仁之誠하되
而多擧六經聖人之大旨하여 發言成章 有可觀者
近世之居位者 或未能盡用古道
故吳君之行不昭하고 而其辭不薦하니이나 而終伏其志
嗚呼有可惜哉로다
武陵又論次誌傳三卷繼于末하니及他才行甚具云이라


03. 복양濮陽 오군吳君 문집文集의 서문
문장이 절로 법도가 있다.
박릉博陵최성무崔成務가 일찍이 신주자사信州刺史종사관從事官으로 있었는데,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 고을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복양濮陽 오군吳君이 있는데, 그는 약관弱冠의 나이에 수염은 길고 이마는 넓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을 잘 짓는다.
마을에서는 신의信義로써 남들과 교제하지 않은 적이 없고 자제들을 가르칠 때는 충효忠孝로 그 근본을 바로 세우지 않은 적이 없다.
이 때문에 재상과 훌륭한 선비들이 모두 그를 대등한 예의로 대한다.”라고 하였다.
나는 그때 그 말을 듣고 마음에 새겨두었다.
그런데 그의 아들 무릉武陵으로 이름을 바꾸고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가 지금 마침 죄를 얻어 〈내가 있는 이곳〉 영주永州로 왔다.
그래서 그의 선친의 문집 10권을 받들고 나를 찾아와 절을 하며 나에게 머리글을 써달라고 청하였으므로 나는 〈비로소〉 그 문집을 두루 볼 수 있었다.
그의 사부辭賦에는 탐욕을 부리고 주제넘게 행동하는 것을 경계하는 뜻이 담겨 있고, 그의 시가詩歌에는 왕공王公 대인大人들과 교제하는 도리가 담겨 있으며, 만사輓詞묘지명墓誌銘제문祭文에는 효성스럽고 공손하고 자애롭고 후덕한 정성이 담겨 있었다.
대부분 육경六經성인聖人의 요지를 끌어와 논리를 전개하고 문장을 이루어 읽어볼 만하였다.
옛날의 사도司徒는 반드시 뛰어난 인재를 구하여 향리를 거쳐 천관天官에 올려 보냈고, 옛날의 태사太史는 반드시 민간의 풍속을 알아보기 위해 그 지방의 시가詩歌를 채집하여 천자의 궁궐에 바쳤으니, 그렇게 하여야 인재人材가 버려지지 않고 백성들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근세의 집정자執政者는 혹 옛 방법을 그대로 따르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오군吳君의 덕행이 드러나지 않고 그 문장이 바쳐지지 않았으니, 비록 왕에게서 말단의 관직을 얻었으나 끝내 그 뜻을 실현하지 못했다.
아, 애석하다.
오무릉吳武陵이 또 3권을 편집하여 본집 끝에 첨부하였는데, 여기에 그 〈오군吳君의〉 종족種族 계통 및 기타 재능과 덕행에 관한 내용이 매우 자세히 실려 있다.


역주
역주1 濮陽吳君文集序 : 작자가 永州司馬로 있던 元和 3년(808)에 쓴 작품이다. 濮陽 吳君은 吳武陵(?~834)의 아버지를 가리키는데, 이름은 알 수 없다. 濮陽은 지금의 河南으로, 吳武陵 선대의 본적이며 뒤에 信州로 이사하였다. 吳武陵은 元和 2년에 進士에 급제하고 이듬해에 어떤 일로 인해 작자가 있는 永州로 유배되어 서로 친밀하게 지냈다. 이때 그의 아버지의 문집을 간행하기에 앞서 작자에게 서문을 써달라고 부탁하여 그에 응한 것이다.
역주2 博陵崔成務 嘗爲信州從事 : 博陵은 지금의 河北 安平이다. 博陵 崔成務는 博陵郡 군내의 귀족가문인 崔成務라는 뜻이며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信州從事는 信州刺史의 從事官, 곧 信州刺史에게 소속된 관리라는 뜻이다.
역주3 弱齡 : 弱冠의 나이로, 20세를 가리킨다.
역주4 古之司徒……由鄕而升之天官 : 《禮記》 〈王制〉에 “鄕大夫에게 명하여 우수한 인재[秀才]를 뽑아 司徒에게 올려 보내게 하였는데 이 사람을 選士라 부르고, 司徒가 또 選士 중에서 우수한 자를 뽑아 太學에 올려 보내게 하였는데 이 사람을 俊士라 부른다.”라고 하였다. 司徒와 天官은 모두 周나라 때 관명으로, 地官司徒와 天官冢宰를 가리는데 天官冢宰는 백관을 통솔한다. 《禮記》 〈王制〉의 내용은 지방 학교에서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여 상급 교육기관인 太學으로 올려 보낸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太學이 아닌 天官으로 올려 보냈다고 했고, 吳武陵의 선친이 크게 등용되지 못한 것을 말하기 위한 前提語라는 점을 고려할 때, 덕행과 재능이 뛰어나 곧장 관리로 임용할 만한 인물을 발탁하여 임용을 주관하는 기관에 올려 보냈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역주5 古之太史……陳詩以獻于法宮 : 《禮記》 〈王制〉에 “〈천자가 제후국에 순행하여〉 제후국의 太師에게 명하여 그 지역의 민간가요를 노래하게 하고 이를 통해 그 지역의 풍속을 살펴보았다.”라고 하였는데, 太師는 음악을 관장하는 각 제후국의 관원이다. 본서의 太史는 역사를 기록하는 史官이므로 太師와는 다르지만, 《禮記》 〈王制〉의 이 부분을 인용한 《禮記集說》 등 여러 자료에 ‘太史’로 표기한 사례가 많은 것으로 보아 통용한 것으로 보인다. 法宮은 제왕이 정무를 처리하는 正殿이다.
역주6 一命于王 : 一命은 周나라 때 관리의 등급이 一命부터 九命까지 있었으므로 등급이 가장 낮은 관리를 그에 견준 것이고, 王은 周나라 때 천자이므로 후대의 황제를 그에 견준 것이다. 곧 황제에 의해 가장 낮은 관리로 보임되었다는 말이다.
역주7 官氏 : 본디 官職과 姓氏라는 뜻이나, 여기서는 단순히 宗族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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