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柳宗元(1)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유유주柳柳州에 관한 정사正史전기傳記
柳宗元字子厚 이라
유종원柳宗元의 자는 자후子厚이며, 그의 조상은 아마도 하동河東 사람인 것으로 보인다.
이라가 得罪武后하고 死高宗時하니라
그의 종증조從曾祖 유석柳奭중서령中書令으로 재직할 적에 무후武后에게 죄를 얻었고 뒤에 고종高宗 때에 죽었다.
父鎭 天寶末遇亂하여 하여 常間行求養이라가 後徙於吳하니라
아버지 유진柳鎭천보天寶 말에 전란을 만나 어머니를 받들어 모시고 왕옥산王屋山에 숨어 살면서 항상 남모르게 돌아다니며 먹을거리를 구해 와 봉양하였고 뒤에 지방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肅宗平賊 하여 擢左衛率府兵曹參軍하니라
숙종肅宗난적亂賊을 평정하자 유진柳鎭이 글을 올려 정사를 건의한 일로 좌위솔부左衛率府 병조참군兵曹參軍으로 발탁되었다.
하여 三遷殿中侍御史하고 以事觸竇參하여 라가
곽자의郭子儀삭방부朔方府에서 그를 보좌하였고, 세 번째 자리를 옮겨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었으며, 어떤 일로 두참竇參의 뜻을 거슬러 기주사마䕫州司馬폄적貶謫되었다.
하여 終侍御史하니라
뒤에 조정으로 돌아와 시어사侍御史로 벼슬을 마쳤다.
宗元少精敏絶倫하고 爲文章卓偉精緻하여 一時輩行推仰하니라
유종원柳宗元은 젊었을 적에 꼼꼼하고 민첩하여 그와 견줄 만한 자가 없었고, 지은 문장이 수준 높아 힘차고 치밀하여 당시 또래들의 추앙을 받았다.
하여 授校書郞하고 調藍田尉하니라
진사과進士科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에 제수된 뒤 남전위藍田尉에 등용되었다.
貞元十九年 爲監察御史裏行하니라
정원貞元( 덕종德宗의 연호) 19년(803)에 감찰어사이행監察御史裏行에 제수되었다.
하니 二人者奇其才하니라
유종원柳宗元왕숙문王叔文위집의韋執誼와의 관계가 우호적이어서 이 두 사람이 그의 재주를 기특하게 여겼다.
及得政하여 引內禁近하여 與計事하고 擢禮部員外郞하여 欲大進用하니라
그리하여 이들이 조정의 요직을 맡게 되자 궁궐 안으로 끌어들여 함께 국가대사를 상의하였고, 이어 그를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 발탁하여 앞으로 중용할 준비를 하였다.
俄而叔文敗 貶邵州刺史하고 不半道 貶永州司馬하니라
얼마 안 되어 왕숙문王叔文이 실패하자 유종원柳宗元소주자사邵州刺史폄적貶謫되어 임지로 가던 도중에 또 영주사마永州司馬폄적貶謫되었다.
旣竄斥하고 地又荒厲하여 因自放山澤間하니
유종원柳宗元이 조정에서 축출을 당하고 몸이 처해 있는 지방이 또 황량하고 험악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산천 속에 자신을 내맡겼다.
其堙厄感鬱 一寓諸文하여 하니 讀者咸悲惻하니라
주위 사방이 다 막힘으로 인해 시름과 고민이 꿈틀거리자 그와 같은 심사를 모두 문장 속에 담아 〈이소離騷〉를 모방한 작품 수십 편을 창작하였는데, 그 작품을 읽어본 사람은 누구나 비통함과 측은함을 느꼈다.
雅善蕭俛하여 詒書言情하고 又詒京兆尹許孟容이라
유종원柳宗元은 본디 소면蕭俛과 우호적인 관계였으므로 그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였고, 경조윤京兆尹 허맹용許孟容에게도 그와 같은 편지를 보냈다.
然衆畏其才高하여 懲刈復進이라 故無用力者러라
그러나 여러 사람이 그의 재주가 뛰어나서 징벌懲罰에서 벗어나면 다시 조정에 진출하여 등용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그를 위해 힘을 써준 자가 없었다.
宗元久汨振하여 其爲文 思益深이라
유종원柳宗元은 장기간 침체해 있다 보니 그가 쓴 문장은 사고력이 한층 더 깊어졌다.
嘗著書一篇하여 號貞符라하고 宗元不得召하여 內閔悼하고 悔念往咎하여 作賦自儆曰懲咎라하니라
일찍이 글 한 편을 저술한 뒤에 그 이름을 〈정부貞符〉라 하였고, 또 황제의 부름을 받아 조정으로 들어가지 못하자 마음속으로 시름하고 슬퍼하였으며, 이로 인해 지난날의 치욕스런 과오를 뉘우치고 회상한 끝에 를 지어 자신을 경계하면서 그 이름을 〈징구懲咎〉라고 붙였다.
元和十年 徙柳州刺史하니라
원화元和( 헌종憲宗의 연호) 10년(815)에 유주자사柳州刺史로 자리를 옮겼다.
時劉禹錫得播州하니 宗元曰
이 당시에 유우석劉禹錫이 명을 받들어 파주播州로 전보되자, 유종원柳宗元이 말하였다.
播非人所居
파주播州는 사람이 거주할 만한 곳이 아니다.
而禹錫親在堂하니 吾不忍其窮無辭以白其大人이라
그런데 유우석劉禹錫의 모친이 아직 건강하게 살아계시니 나는 차마 그가 역경 속에 죽어서 그의 선고先考에게 자기의 불효를 해명할 말이 없게 되는 것을 볼 수 없다.
如不往이면 便爲母子永訣하리라하고
만약 그의 모친이 함께 가지 못한다면 이들 모자母子는 영원히 작별하게 될 것이다.”
卽具奏欲以柳州授禹錫而自往播하니라
그리고는 즉시 조정에 주청하는 글을 올려 유주柳州유우석劉禹錫에게 넘겨주고 자기는 파주播州로 가게 해달라고 하였다.
會大臣亦爲禹錫請하여 因改連州하니라
때마침 대신大臣이 또 유우석劉禹錫을 위해 주청한 결과 이로 인해 그의 임지를 바꿔 연주連州로 부임하게 되었다.
柳人以男女質錢하여 過期不贖이면 子本均하여 則沒爲奴婢러니
유주柳州 사람들이 자녀子女를 볼모로 잡히고 돈을 빌려갔다가 갚을 기한이 지나도 갚지 못하면 자녀의 몸값과 빌려간 돈의 본전을 동일하게 간주하여 빚을 준 주인이 볼모로 잡은 자녀를 노비로 몰수하였다.
宗元設方計하여 悉贖之하되
유종원柳宗元이 이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강구하여 빌린 돈을 모두 갚아주고 자녀를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尤貧者 令書傭하여 視直足相當하면 還其質하고 已沒者 具己錢助贖하니라
빈곤한 정도가 심한 자에 대해서는 글씨 쓰는 일거리를 맡겨 쓰게 하여 그 노역으로 번 돈이 빌려간 빚의 가치와 맞먹는 정도가 되면 인질을 돌려보내도록 하였으며, 이미 몰수되어 노비가 된 자에 대해서는 유종원柳宗元이 자기의 개인 돈을 보태주어 빚을 갚도록 하였다.
南方爲進士者 走數千里從宗元游하니 經指授者 爲文辭皆有法하니
남방에서 진사進士 시험에 응시하려고 준비하는 자들이 천 리 거리를 멀다고 여기지 않고 찾아와 유종원柳宗元에게 수학하였으니, 그의 지도를 거친 사람은 문장을 지을 때 모두 일정한 법이 있었다.
世號柳柳州라하니라
세상에서는 그를 유유주柳柳州라고 불렀다.
十四年卒하니 年四十七이러라
원화元和 14년(819)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때의 나이가 47세였다.
宗元少時嗜進하여 謂功業可就라하다가 旣坐廢 遂不振이나
유종원柳宗元은 젊었을 적에 세상길에 진취하는 것을 추구하여 공훈과 업적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가, 이미 조정에서 폄적貶謫되어 폐기되자 마침내 일어나지 못했다.
然其才實高하여 名蓋一時하니라
그러나 그의 재능은 확실히 높아 이름이 한 시대를 압도하였다.
韓愈評其文曰 雄深雅健 似司馬子長하니 不足多也라하니라
한유韓愈가 그의 문장을 평론하기를 “웅혼雄渾하고 심오深奧하며 단정端整하고 힘이 있는 것은 사마자장司馬子長과 비슷하니 최인崔駰채옹蔡邕의 수준으로는 그를 능가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旣沒 柳州人懷之하여 託言降柳州之堂하고 人有慢者輒死하니라
유종원柳宗元이 죽은 뒤에 유주柳州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한 나머지 가탁하여 말하기를 ‘그의 신령이 유주柳州의 관청마루에 내려왔다.’ 하였고, ‘그를 깔보고 함부로 행동한 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하였다.
廟於羅池하니 이라
나지羅池에다 사당을 세웠는데 한유韓愈가 비문을 통해 그 말들이 사실임을 입증하였다.
역주
역주1 柳柳州本傳 : 唐나라 正史 《新唐書》 제168권에 수록된 〈柳宗元列傳〉의 기록을 발췌하여 轉載한 것이다.
역주2 其先蓋河東人 : 河東은 본디 秦나라 때의 郡名으로 관청소재지는 지금의 山西省 夏縣 서북쪽이었다. 뒤에 蒲州로 바뀌었다가 唐 玄宗 때 다시 河東郡으로 고쳤다. 작자의 선대 본적은 지금의 山西 永濟縣인 河東郡 解縣이었으며, 이 때문에 柳宗元을 柳河東이라 부르기도 한다.
역주3 從曾祖奭爲中書令 : 《舊唐書》 〈柳宗元列傳〉에는 柳奭이 작자의 從曾祖로 되어 있으나, 작자가 쓴 〈先侍御史府君神道表〉와 〈伯祖妣趙郡李夫人墓志銘〉에 의하면 高伯祖가 옳은 것으로 보인다. 柳奭은 작자의 5대조 柳子夏의 仲父인 柳則의 아들로, 柳子夏와는 사촌형제간이다. 柳奭(?~659)의 자는 子淵으로, 太宗 貞觀 때 中書舍人으로 있다가 그의 외손녀 王氏가 皇太子(唐 高宗) 妃로 책봉되었기 때문에 中書侍郞으로 옮기고 다시 中書令으로 승진하였다. 뒤에 王氏가 武則天과의 사랑싸움에서 밀려 庶人으로 폐위되자, 吏部尙書로 강등되고 愛州刺史로 貶謫되었으며 결국 피살되었다. 《舊唐書 권51 高宗廢后王氏》
역주4 奉母隱王屋山 : 天寶는 唐 玄宗의 연호이고, 王屋山은 지금의 山西 陽城과 垣曲 두 縣 사이에 있는 산이다. 天寶 14년(755) 11월에 節度使 安祿山과 史思明이 반란을 일으켜 長安과 洛陽이 반란군의 수중에 넘어가고 玄宗이 피신한 가운데 8년 동안 이어진 전쟁으로 전국의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이 당시 柳鎭(739~793)은 그의 가족들이 모두 吳 지방으로 피난을 떠나 생활을 꾸려갈 수 없자, 홀로 어머니 德淸君夫人을 모시고 王屋山으로 들어가서 먹을거리를 구걸해다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柳河東集 권12 先侍御史府君神道表》
역주5 鎭上書言事 : 郭子儀와 李光弼 등 아홉 명의 節度使의 적극적인 진압과, 반란의 주동자인 安祿山과 史思明이 각기 자신의 아들들에 의해 살해되는 등 반란군의 자중지란으로 인해, 반란이 일어난 지 7년 2개월 만인 廣應 1년(763) 1월에 대란이 평정되어 상황이 차츰 호전되어 갔다. 이때 柳鎭이 조정에 〈三老五更議〉를 올려 太學을 일으켜 인재를 양성하고 농사를 장려하여 식량을 증산하는 정책을 펼 것을 건의하였다. 《柳河東集 권12 先侍御史府君神道表》
역주6 佐郭子儀朔方府 : 朔方府는 朔方節度使 幕府의 준말이다. 이 당시 郭子儀가 朔方節度使로 있었는데 柳鎭이 郭子儀에 의해 左金吾衛倉曹參軍에 제수되었고 節度推官으로 있으면서 書札과 狀奏에 관한 일을 전담하였다.
역주7 貶䕫州司馬 : 貞元 4년(788)에 陝虢觀察使 盧岳이 죽은 뒤에 그의 아내가 재산을 분배하면서 첩의 자식은 제외하자, 그 첩이 조정에 억울함을 호소한 일이 있었다. 이때 御史中丞 盧佋가 오히려 그 첩에게 중죄를 가하려 하자 侍御史 穆贊이 그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자 盧佋가 재상 竇參과 짜고 穆贊이 뇌물을 받았다고 모함하여 그를 체포해 감옥으로 송치하였다. 殿中侍御史 柳鎭이 이 사건을 재심하라는 천자의 명을 받고 조사하여 허위임을 밝혀냈다. 이로 인해 柳鎭이 竇參의 유감을 사 그 이듬해에 夔州司馬로 貶謫되었다. 《柳河東集 권12 先侍御史府君神道表 注》
역주8 第進士博學宏詞科 : 進士는 唐나라 때 禮部에서 시행하는 인재선발시험이다. 隋 煬帝 大業 원년(605)에 창설된 제도인데 唐나라에 와서 크게 중시되어 기타 과거는 유명무실해졌다. 아무리 직위가 높은 관료라도 進士科를 거치지 않은 자는 각광을 받지 못했다. 博學宏詞科는 唐나라 開元 19년(731)에 창설된 과거제도의 하나이다. 이를 통해 학문이 깊고 문장이 뛰어난 자를 선발하였다. 작자가 21세 때인 貞元 8년(792) 2월에 進士에 급제한 뒤에, 24세 때인 796년에 博學宏詞科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2년이 지난 26세 때 합격하였다.
역주9 善王叔文韋執誼 : 王叔文(753~806)은 尙書戶部侍郞으로 조정의 재정을 관장하면서 柳宗元‧劉禹錫‧王伾 등과 우호적인 관계를 갖고 이들을 응원하면서 환관의 병권을 빼앗고 탐관오리를 축출하는 등 개혁을 도모하다가 환관 俱文珍 등에게 저지당해 실패하였다.
韋執誼는 裴延齡‧韋渠牟 등과 궁궐에 출입하면서 德宗의 자문에 응했고, 順宗이 즉위해서는 王叔文의 적극적인 응원으로 재상이 되었다.
역주10 倣離騷數十篇 : 〈離騷〉는 역경을 만났다는 뜻으로, 전국시대 楚나라 대부 屈原(?B.C. 339~?B.C. 278)이 지은 〈離騷經〉의 약칭이지만, 여기서는 〈離騷經〉을 포함하여 屈原이 지은 여러 편의 작품, 곧 楚辭를 말한다. 屈原이 소인배들의 모함으로 조정에서 쫓겨나 황량한 산천에서 자신의 억울하고 불우한 처지를 슬퍼했던 일이 柳宗元이 볼 때 자기의 처지와 비슷하였으므로 楚辭를 본뜬 작품을 썼다는 것이다.
역주11 崔蔡 : 崔駰과 蔡邕의 합칭이다. 崔駰(?~92)은 자가 亭伯으로, 東漢의 문학가이다. 《詩經》‧《周易》‧《春秋》에 정통하여 박식하고 재주가 많았다.
蔡邕(132~192)은 자가 伯喈로, 東漢의 문학가이자 서법가이다. 박식하고 문장을 잘 지었으며 음률에도 정통하였다.
역주12 愈因碑以實之云 : 韓愈가 柳宗元이 죽고 4년 뒤인 823년에 지은 〈柳州羅池廟碑〉 말미에 “柳宗元의 신령이 관청마루에 내려와 그의 部將 歐陽翼 등이 보고 절을 하였다.”느니, “사당에 큰 제사를 지낼 적에 지나가는 손님 李儀가 술에 취해 堂上에서 신을 모독하다가 병이 나서 부축을 받고 사당문을 나서자마자 즉사하였다.”느니 하는 내용을 기술하면서, 柳宗元의 신령이 그 고장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재앙과 복을 내렸다고 하였다. 《昌黎集 권31》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