曾王父朝請大夫 徐州長史諱子夏는 遺貞白之操하여 表儀宗門이라
王父朝請大夫 滄洲淸池令諱從裕는 垂博裕之道하여 啓佑後胤이라
皇考湖州德淸令諱察躬은 弘孝悌之德하여 振揚家聲이라
惟公端莊無諂하고 徽柔有裕하니 峻而能容하고 介而能群이라
其在閨門也에 動合大和하되 皆由順正하여 愷悌雍睦하니 莫有間言이라 故宗黨歌之라
其在公門也에 釋回措枉하고 造次秉直하여 事不失當하고 擧無秕政이라 故官府誦之라
用沖退徑盡之志로 以弘正友道하여 信稱於外焉하고 用柔和博愛之道로 以視遇孤弱하여 仁著於內焉하니
自進士登高第
하여 調
河南府文學
하고 秩滿
에 惟明辟爲從事
하여 受太常寺協律郞
이라가 元戎卽世
에 罷職家食
이라
改度支判官하고 轉大理司直이라가 遷殿中侍御史하고 加度支營田副使라
旣佐從事나 實司中府하여 匪頒有制하고 會計明白이라 嗚呼라
分閫委政에 繄公而成務하고 朝右虛位하여 待公而周事하니
貞元十二年 歲在
正月九日壬寅
에 遇暴疾
하여 終於私館
하니 享年五十
이라
夫人吳郡陸氏
니 洎仲弟綜季弟續
과 等
으로 抱孤卽位
하여 牽率備禮
하고 祗奉
하여 歸於京師
라
以某年二月二十八日庚寅에 安厝於萬年縣之少陵原하니 禮也라
在髫知孝하여 呱呱涕洟하니 凡我宗戚이 撫視增慟이라
初에 公元兄以純深之行과 端直之德으로 名聞於天下라
常以先公之神未克遷祔
로 不正席
하고 不甘味
라가 及撰日定期
에 而
하여 志奪禮廢
라
公實敬承遺志
하여 行有日矣
로되 而
하여 不克終事
하니
惟公盡敬於孝養하고 致毁於居憂하여 表正宗姓하고 觀示他族이라
修詞以藻德하고 振文而導志하여 以爲理化之始는 莫尊乎堯라하여 作堯祠頌하고
以爲紀廣大之志하고 敍正直之節은 不嫌於親이라하여 作元兄侍御史府君墓誌라
當官貞固하여 確乎不拔하고 持議端方하여 直而不苛라
率性廉介하여 懷貞抱潔하여 嗣家風之淸白하고 紹遺訓於儒素라
常以無兄弟
하여 移其睦於朋友
하고 少孤
하여 移其孝於叔父
러니
朴魯甚騃하여 不能文字하니 敢用書宗人之辭以致其直이라 故質而俚라
01. 고故 숙부 전중시어사부군殿中侍御史府君의 묘판문墓版文
사실을 말한 부분은 질서가 있고, 심정을 말한 부분은 비통하다.
유씨柳氏의 윗대 조상은 황제黃帝에서부터 주周ㆍ노魯까지 이어져온다.
세상에 드러난 사람으로는 무해無駭가 있는데 그가 조부의 자字를 취해 전씨展氏라 했고, 금禽은 식읍食邑의 명칭을 취해 유씨柳氏라고 했다.
그 뒤에 자손이 번성해져 대대로 하동河東에 터를 잡았다.
증조부인 조청대부朝請大夫 서주장사徐州長史 휘 자하子夏는 바르고 청렴한 지조를 물려주어 종족의 본보기가 되었다.
조부인 조청대부朝請大夫 창주滄洲 청지령淸池令 휘 종유從裕는 도량이 넓고 관대한 도리를 물려주어 후손의 앞길을 열어주고 도와줬다.
부친인 호주湖州 덕청령德淸令 휘 찰궁察躬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에게 공손한 덕을 크게 드러내 집안의 명예를 드높였다.
공은 단정하고 장중하여 아첨하는 일이 없고, 선하고 인자하여 여유가 있었으므로 준엄하면서도 사람들을 포용하였고, 강직하면서도 사람들과 어울렸다.
가정에 있을 때는 언제나 큰 화합을 이루되 모든 일에 순리와 정도를 따름으로써 모두가 즐겁고 화목하여 서로 불평하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친족들이 그 덕을 노래하였다.
공직에 있을 때는 간교하고 부정한 자들을 제거하고 항상 정도를 지켜 매사에 합당함을 잃지 않았고 좋지 않은 정사가 없었기 때문에 관청에서 그 정사를 칭송했다.
겸양하고 진솔한 뜻으로 벗과 교제하는 도리를 넓히고 바르게 하여 외부에서 믿고 칭송하였고, 온유하게 널리 사랑하는 도리로 외롭고 약한 자들을 보살피고 대우하여 내부에서 어진 덕이 드러났다.
진사進士에서 우등으로 급제한 뒤에 하남부문학河南府文學에 임용되었고, 만기가 되어 위북절도사渭北節度使 논유명論惟明이 그의 종사관으로 초빙하여 태상사협률랑太常寺協律郞의 직책을 받았다가 절도사節度使가 세상을 떠난 뒤에 파직되어 집에서 지냈다.
얼마 안 있어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 장헌보張獻甫가 그의 참모로 초빙하여 대리평사大理評事에 임용되고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았다.
탁지판관度支判官으로 바뀌었고 대리사사직大理寺司直으로 전보되었다가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옮기고 탁지영전부사度支營田副使로 승진되었다.
종사관으로 주장主將을 보좌했지만 실질적으로 내부의 재정을 맡아, 재물을 분배하는 일이 체계가 있고 회계가 빈틈없이 분명했으니, 아, 훌륭하다.
절도사節度使가 공에게 정무를 맡겨 공으로 인해 임무를 완성했고, 조정에서 자리를 비워놓고 공이 오기를 기다려 일을 맡기려 했다.
그래서 우리 가문이 공으로 인해 더욱 발전되었고, 인척들이 공에 의지해 더욱 빛났다.
정원貞元 12년인 병자년 정월 9일 임인일에 갑자기 병에 걸려 자택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0세이다.
부인은 오군吳郡 육씨陸氏인데, 공의 둘째아우 유종柳綜과 막내아우 유속柳續, 그리고 장조카 아무개 등과 함께 공의 어린 아들을 안고 신위神位 앞에 나아가 인도하여 예를 갖추게 했으며, 상유裳帷를 경건히 받들고 도성으로 돌아왔다.
모년 2월 28일 경인일에 만년현萬年縣 소릉少陵 언덕에 안장하니, 예법에 따른 것이다.
공에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이제 겨우 여섯 살이다.
어린데도 효를 알아 앙앙 울며 눈물을 흘려서 우리 집안 친척들이 어루만지고 달래면서 비통함이 더했다.
전에 공의 맏형께서 순수하고 깊은 행실과 반듯하고 곧은 덕으로 천하에 이름이 났다.
관직이 시어사侍御史까지 이르렀는데, 도끼를 가지고 조정에 올라가 국법이 엄숙하고 깨끗하게 정비되었다.
그리고 선친의 위패를 사당에 옮겨 봉안하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자리를 바르게 앉지도 못하고 음식을 맛있게 먹지 못하다가, 위패를 봉안할 날을 잡아 기다리고 있던 중에 하늘이 돌아보지 않아 세상을 떠나서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예의 절차가 중단되었다.
공은 실로 맏형의 유지를 삼가 받들어 봉행할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흉사가 또 닥쳐서 그 일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그러니 우리 종족의 깊은 한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공은 부모를 효성으로 봉양하는 도리에 정성을 다하고, 부모의 상중에 건강을 해칠 정도로 애통해하여, 유씨柳氏 종중의 본보기가 되었고 타성 일족에게 모범이 되었다.
그러므로 종중 사람들은 모두 ‘효성이 방여공方輿公과 같다.’고 했다.
시를 지어 자신의 덕을 아름답게 수양하고 문장을 엮어 자신의 심지를 바르게 이끌어가면서 국가를 다스리고 백성을 교화하는 일을 처음 시작한 사람은 요堯보다 더 높은 경우가 없다고 여겨 〈요사송堯祠頌〉을 지었다.
덕을 계승하는 도리는 조상을 잊지 않는 데에 있다고 여겨 〈시조비始祖碑〉를 지었다.
넓고 큰 뜻을 기록하고 바르고 곧은 절의를 서술하는 데에는 친족이라도 개의치 않아야 한다고 여겨 〈원형시어사부군묘지元兄侍御史府君墓誌〉를 지었다.
그 나머지 여러 가지 형태로 읊어낸 시 작품도 모두 고풍古風에 부합되었다.
그러므로 종중 사람들은 모두 ‘문장이 오흥수吳興守와 같다.’고 했다.
관리가 되어서는 바르고 꿋꿋하여 흔들리지 않았고, 지론이 단정하여 곧으면서도 각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종중 사람들은 모두 ‘바르기가 위태사衛太史와 같다.’고 했다.
타고난 성품이 청렴하고 곧아 바른 마음과 정갈한 지조를 지녀 청백한 가풍을 이어받고 유학儒學의 유훈遺訓을 계승하였다.
그러므로 종중 사람들은 모두 ‘맑기가 노사사魯士師와 같다.’고 했다.
이상 네 가지 덕을 겸비하였으니, 성인聖人의 덕을 두루 갖추었으되 크기가 작을 뿐이라는 말은 곧 공의 경우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저 소자小子는 평소에 형제가 없어 화목의 정을 벗에게 쏟았고, 어려서 부친을 여의어 효도를 숙부에게 쏟으려 했다.
그런데 하늘이 나를 궁지로 몰아 내 뜻을 빼앗아 갔으므로 끝없는 통한이 밀려온다.
매우 우둔하고 고지식하여 글을 잘 짓지 못하기에 감히 종중 사람들의 말을 기록하여 그 곧음을 드러냈기 때문에 말이 투박하고 비속하다.
곡哭을 거두고 사적을 기록하노라니 슬퍼서 명문銘文을 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