攻訐狠怒하고 以辭氣相擊排冒沒者는 其爲書 處則充棟宇하고 出則汗牛馬하니 或合而隱하고 或乖而顯이라
後之學者 窮老盡氣하여 左視右顧하되 莫得而本하니
則專其所學
하고 以訾其所異
하여 黨枯竹
하고 護朽骨
하여 前世多有之
라
有吳郡人陸先生質
하니 以其師友天水
이 能知聖人之旨
라
故春秋之言이 及是而光明하여 使庸人小童으로 皆可積學以入聖人之道하고 傳聖人之敎하니 是其德豈不侈大矣哉아
於是合古今하고 散同異하여 聯之以言하고 累之以文이라
蓋講道者二十年
이요 書而志之者又十餘年
에 其事大備
하여 爲春秋集注十篇
과 辯疑七篇
과 微指
篇
하니라
其道以生人爲主
하고 以堯舜爲的
하여 苞羅旁魄
하고 膠轕下上
하되 而不出於正
하며 其法以文武爲首
하고 以周公爲翼
하여 揖讓升降
하고 好惡喜怒
하되 而
이라
旣成에 以授世之聰明之士하여 使陳而明之라 故其書出焉에 而先生爲巨儒라
用是爲天子爭臣
과 尙書郞國子博士給事中皇太子侍讀
하여 皆得其道
하고 에 守人知仁
이라
永貞年
에 할새 言其所學
하고 爲古君臣圖以獻
하여 而道達乎上
이라
是歲
에 嗣天子踐阼而理
할새 尊優
러니 先生以疾聞
하니 臨問加禮
라
嗚呼라 先生道之存也以書요 不及施於政하며 道之行也以言이요 不及覩其理하니 門人世儒는 是以增慟이라
將葬에 以先生爲能文聖人之書通於後世라하여 遂相與諡曰文通先生이라하니라
後若干祀에 有學其書者過其墓라가 哀其道之所由하여 乃作石以表碣하니라
06. 당唐 고故 급사중給事中 황태자시독皇太子侍讀 육문통陸文通 선생先生의 묘표墓表
공자孔子가 《춘추春秋》를 지은 이후 1,500여 년 동안 〈그것을 풀이하고〉 ‘전傳’이라고 이름을 붙인 사람이 다섯인데, 지금은 그중에서 세 사람이 쓴 것만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지필紙筆을 들고 노심초사하여 논論ㆍ주注ㆍ소疏ㆍ설說을 쓴 사람은 수백 수천 명에 이른다.
남의 잘못을 들춰내 크게 화를 내고, 곱지 않은 말투로 배격하면서 알력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서술한 책이 매우 많아 이것들을 거두어 소장하면 온 집안에 가득 차고 운반할 때는 수레를 끄는 마소가 땀을 흘릴 정도인데, 그것들이 어떤 경우는 주장이 서로 합치된다 하여 숨겨주어 그냥 넘어가고 어떤 경우는 서로 어긋난다 하여 드러내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후대에 배우는 사람은 늙어서 기력이 쇠할 때까지 이것저것을 자세히 살펴보아도 그 근본 뜻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기가 배운 것에만 치중하고 다른 것은 비방하여, 케케묵은 옛 설에 동조하고 해묵은 옛사람을 비호하다 보니, 부자父子끼리 서로 상처를 입히고 군신君臣끼리 서로 비방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던 경우가 앞 세상에는 많았다.
이렇듯 《춘추春秋》에 담긴 성인聖人의 마음을 알기란 정말 어려웠다.
오군吳郡 사람 육선생陸先生 지質이 있어, 그의 스승과 벗인 천수天水 사람 담조啖助와 조광趙匡을 통해 능히 성인聖人의 뜻을 알았다.
그 때문에 《춘추春秋》의 말씀이 오늘날에 이르러 세상에 환히 드러나, 평범한 사람이나 어린아이로 하여금 학문을 쌓아 모두 성인聖人의 도에 들어가고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게 하였으니, 그 공덕이 어찌 넓고 크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춘추春秋》를 읽은 뒤에 공자孔子가 이 책을 저술한 근본 뜻을 알고 훌륭한 스승과 벗을 만났다.
그리하여 고금의 학설을 수합하고 해석이 같고 다른 것을 가려내어, 그것들을 말로 이어가고 글로 축적하였다.
대체로 도를 강론한 것이 20년이고 강론한 것을 글로 기록한 지 또 10여 년이 지난 뒤에 그 사업이 크게 이루어져 《춘추집주春秋集注》 10편과 《춘추집전변의春秋集傳辯疑》 7편, 《춘추미지春秋微指》 2편이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대중大中의 도를 환히 드러내고 공기公器를 펼쳐냈다.
그 도는 백성을 중심으로 하고 요堯ㆍ순舜을 표적으로 하여, 광대한 사상을 포괄하고 형이상形而上, 형이하形而下를 종횡으로 들락거려도 바른 도를 벗어나지 않았으며, 그 법은 문왕文王ㆍ무왕武王을 머리로 하고 주공周公을 날개로 하여 읍하고 사양하고 올라가고 내려가며, 좋아하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노하더라도 그런 일들이 잘못이 없었다.
저술이 완성된 뒤에 세상의 총명한 선비들에게 전수하여 그 가르침을 드러내 밝히게 하였기 때문에 책이 나오자 선생은 거유巨儒가 되었다.
이로 인해 천자의 간관諫官과 상서랑尙書郞ㆍ국자박사國子博士ㆍ급사중給事中ㆍ황태자시독皇太子侍讀이 되어 모두 그 직무를 제대로 수행했고, 두 주州의 자사刺史로 부임하자 그 고장 사람들이 인仁을 알게 되었다.
영정永貞 연간에 동궁東宮을 모시면서 그가 배운 바를 강론하고 〈고군신도古君臣圖〉를 지어 올려, 그의 도道가 위에 도달했다.
이해에 다음 천자가 즉위하여 천하를 다스리게 되어 사유師儒를 존경하고 우대하였는데, 선생이 병이 났다고 아뢰자 천자가 직접 방문하여 위문하는 예를 표하였다.
모월 모일에 경사京師에서 세상을 떠났고, 모월 모일 모군某郡 모리某里에 묻었다.
아, 선생은 그 도가 책에만 보존되었을 뿐 정사에는 미처 시행되지 못했으며, 그 도가 말로만 행해졌을 뿐 그로 인해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은 미처 보지 못했으니, 문인門人들과 세상 유자儒者들이 이 때문에 더 애통해했다.
장례를 치를 무렵에 선생께서 성인聖人의 글을 잘 풀이하여 후세에 통하게 할 수 있었다는 이유로 마침내 서로 논의하여 시호諡號를 문통선생文通先生이라 하였다.
그 뒤 몇 년이 지났을 때 그의 글을 배운 자가 그의 묘를 지나던 중, 자기의 도가 이 묘의 주인으로부터 나왔음을 애처로이 여겨 돌을 다듬어 표석表石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