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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柳宗元(2)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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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子作春秋千五百年 이라
하고 焦思慮하여 以爲論注疏說者百千人矣
攻訐狠怒하고 以辭氣相擊排冒沒者 其爲書 處則充棟宇하고 出則汗牛馬하니 或合而隱하고 或乖而顯이라
後之學者 窮老盡氣하여 左視右顧하되 莫得而本하니
則專其所學하고 以訾其所異하여 黨枯竹하고 護朽骨하여 前世多有之
甚矣 聖人之難知也
有吳郡人陸先生質하니 以其師友天水 能知聖人之旨
故春秋之言 及是而光明하여 使庸人小童으로 皆可積學以入聖人之道하고 傳聖人之敎하니 是其德豈不侈大矣哉
先生字某
旣讀書 得制作之本하여 而獲其師友
於是合古今하고 散同異하여 聯之以言하고 累之以文이라
蓋講道者二十年이요 書而志之者又十餘年 其事大備하여 爲春秋集注十篇 辯疑七篇 微指하니라
明章하고 發露하니
其道以生人爲主하고 以堯舜爲的하여 苞羅旁魄하고 膠轕下上하되 而不出於正하며 其法以文武爲首하고 以周公爲翼하여 揖讓升降하고 好惡喜怒하되이라
旣成 以授世之聰明之士하여 使陳而明之 故其書出焉 而先生爲巨儒
用是爲天子爭臣 尙書郞國子博士給事中皇太子侍讀하여 皆得其道하고 守人知仁이라
永貞年 할새 言其所學하고 爲古君臣圖以獻하여 而道達乎上이라
是歲 嗣天子踐阼而理할새 尊優러니 先生以疾聞하니 臨問加禮
某月日終於京師하고 某月日葬於某郡某里하니라
嗚呼 先生道之存也以書 不及施於政하며 道之行也以言이요 不及覩其理하니 門人世儒 是以增慟이라
將葬 以先生爲能文聖人之書通於後世라하여 遂相與諡曰文通先生이라하니라
後若干祀 有學其書者過其墓라가 哀其道之所由하여 乃作石以表碣하니라


06. 급사중給事中 황태자시독皇太子侍讀 육문통陸文通 선생先生묘표墓表
공자孔子가 《춘추春秋》를 지은 이후 1,500여 년 동안 〈그것을 풀이하고〉 ‘’이라고 이름을 붙인 사람이 다섯인데, 지금은 그중에서 세 사람이 쓴 것만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지필紙筆을 들고 노심초사하여 을 쓴 사람은 수백 수천 명에 이른다.
남의 잘못을 들춰내 크게 화를 내고, 곱지 않은 말투로 배격하면서 알력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서술한 책이 매우 많아 이것들을 거두어 소장하면 온 집안에 가득 차고 운반할 때는 수레를 끄는 마소가 땀을 흘릴 정도인데, 그것들이 어떤 경우는 주장이 서로 합치된다 하여 숨겨주어 그냥 넘어가고 어떤 경우는 서로 어긋난다 하여 드러내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후대에 배우는 사람은 늙어서 기력이 쇠할 때까지 이것저것을 자세히 살펴보아도 그 근본 뜻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기가 배운 것에만 치중하고 다른 것은 비방하여, 케케묵은 옛 설에 동조하고 해묵은 옛사람을 비호하다 보니, 부자父子끼리 서로 상처를 입히고 군신君臣끼리 서로 비방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던 경우가 앞 세상에는 많았다.
이렇듯 《춘추春秋》에 담긴 성인聖人의 마음을 알기란 정말 어려웠다.
오군吳郡 사람 육선생陸先生 이 있어, 그의 스승과 벗인 천수天水 사람 담조啖助조광趙匡을 통해 능히 성인聖人의 뜻을 알았다.
그 때문에 《춘추春秋》의 말씀이 오늘날에 이르러 세상에 환히 드러나, 평범한 사람이나 어린아이로 하여금 학문을 쌓아 모두 성인聖人의 도에 들어가고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게 하였으니, 그 공덕이 어찌 넓고 크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생의 는 아무개이다.
춘추春秋》를 읽은 뒤에 공자孔子가 이 책을 저술한 근본 뜻을 알고 훌륭한 스승과 벗을 만났다.
그리하여 고금의 학설을 수합하고 해석이 같고 다른 것을 가려내어, 그것들을 말로 이어가고 글로 축적하였다.
대체로 도를 강론한 것이 20년이고 강론한 것을 글로 기록한 지 또 10여 년이 지난 뒤에 그 사업이 크게 이루어져 《춘추집주春秋集注》 10편과 《춘추집전변의春秋集傳辯疑》 7편, 《춘추미지春秋微指》 2편이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대중大中의 도를 환히 드러내고 공기公器를 펼쳐냈다.
그 도는 백성을 중심으로 하고 을 표적으로 하여, 광대한 사상을 포괄하고 형이상形而上, 형이하形而下를 종횡으로 들락거려도 바른 도를 벗어나지 않았으며, 그 법은 문왕文王무왕武王을 머리로 하고 주공周公을 날개로 하여 읍하고 사양하고 올라가고 내려가며, 좋아하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노하더라도 그런 일들이 잘못이 없었다.
저술이 완성된 뒤에 세상의 총명한 선비들에게 전수하여 그 가르침을 드러내 밝히게 하였기 때문에 책이 나오자 선생은 거유巨儒가 되었다.
이로 인해 천자의 간관諫官상서랑尙書郞국자박사國子博士급사중給事中황태자시독皇太子侍讀이 되어 모두 그 직무를 제대로 수행했고, 두 자사刺史로 부임하자 그 고장 사람들이 을 알게 되었다.
영정永貞 연간에 동궁東宮을 모시면서 그가 배운 바를 강론하고 〈고군신도古君臣圖〉를 지어 올려, 그의 가 위에 도달했다.
이해에 다음 천자가 즉위하여 천하를 다스리게 되어 사유師儒를 존경하고 우대하였는데, 선생이 병이 났다고 아뢰자 천자가 직접 방문하여 위문하는 예를 표하였다.
모월 모일에 경사京師에서 세상을 떠났고, 모월 모일 모군某郡 모리某里에 묻었다.
아, 선생은 그 도가 책에만 보존되었을 뿐 정사에는 미처 시행되지 못했으며, 그 도가 말로만 행해졌을 뿐 그로 인해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은 미처 보지 못했으니, 문인門人들과 세상 유자儒者들이 이 때문에 더 애통해했다.
장례를 치를 무렵에 선생께서 성인聖人의 글을 잘 풀이하여 후세에 통하게 할 수 있었다는 이유로 마침내 서로 논의하여 시호諡號문통선생文通先生이라 하였다.
그 뒤 몇 년이 지났을 때 그의 글을 배운 자가 그의 묘를 지나던 중, 자기의 도가 이 묘의 주인으로부터 나왔음을 애처로이 여겨 돌을 다듬어 표석表石을 세웠다.


역주
역주1 : 작자가 永州로 폄적된 초기에 쓴 작품이다.
陸文通 先生은 陸質(?~805)을 가리킨다. 자는 伯沖으로, 지금의 江蘇 蘇州인 吳郡 사람이다. 그의 본명은 淳이었으나 唐 憲宗의 이름자를 피해 개명하였다. 代宗 大曆 말에 淮南節度使 陳少游의 從事官이 되었다가 조정으로 들어가 左拾遺ㆍ太常博士를 역임하고 貞元 4년(788)에 刑部員外郞이 되었다. 6년에 倉部郞中이 되고, 11년에 左司郞中이 되었다. 19년 信州刺史, 20년에 台州刺史가 되었고, 永貞 원년에 給事中ㆍ太子侍讀이 되었다. 이해 9월에 죽었다. 죽은 뒤에 그의 제자들이 諡號를 文通先生이라 하였다. 당시의 대학자이며 특히 啖助ㆍ趙匡으로 이어져온 《春秋》의 학통을 계승하여 《春秋》에 정통하였다. 《春秋微指》ㆍ《春秋集傳纂例》ㆍ《春秋集傳辨疑》ㆍ《春秋集註》 등을 저술하였다. 작자는 陸質로부터 《周易》을 배웠고 그의 여러 저술을 탐독하는 등 관계가 밀접하였다.
墓表는 墓碑와 같다. 비석을 무덤 앞이나 주변에 세워 그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드러내 밝힌다는 뜻으로, 墓表文의 약칭이다.
역주2 以名爲傳者五家 今用其三焉 : 聖人의 저술을 ‘經’이라 하고 그것을 풀이한 글을 ‘傳’이라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傳’은 孔子가 편수한 《春秋》를 풀이한 글이다. 五家는 《春秋左氏傳》ㆍ《春秋公羊傳》ㆍ《春秋穀梁傳》ㆍ《春秋鄒氏傳》ㆍ《春秋夾氏傳》을 가리키고, 三은 三傳으로 이미 없어진 《春秋鄒氏傳》ㆍ《春秋夾氏傳》을 제외한 나머지를 가리킨다.
역주3 觚牘 : 고대에 글을 쓸 때 사용했던 죽간과 목판을 말한다. 변역에서는 편의상 紙筆로 바꾸었다.
역주4 以至於父子傷夷 君臣抵(詆)悖者 : 漢나라 초기에 魯 申公이 穀梁學을 江公에게 전수하고 董仲舒와 公孫弘은 公羊學을 전공했는데, 漢 武帝가 公羊學을 중시하여 그것을 戾太子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戾太子는 사적으로 穀梁學에 관해 들어보고 그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의 손자인 漢 宣帝가 즉위해서는 다시 穀梁學을 중시하여 劉向ㆍ蕭望之ㆍ韋賢ㆍ夏侯勝 등에게 함께 연구하게 함으로써 穀梁學이 성행하게 되었다. 劉向의 아들 劉歆이 祕書를 교감하던 중 《春秋左氏傳》을 보고 매우 좋아하여 그의 아버지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劉向은 穀梁의 풀이가 옳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春秋考 권3 統論》
역주5 啖助洎趙匡 : 啖助(724~770)는 자가 叔佐이며 趙州 사람이다. 春秋三傳을 종합하여 《春秋統例》 6권을 저술하였다. 趙匡은 자가 伯循이며 河東 사람이다. 啖助에게 배워 《春秋》를 잘 알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趙夫子’로 불렀다. 洎는 ‘及’과 뜻이 같다.
역주6 (三)[二] : 저본에는 ‘三’으로 되어 있으나, 《柳河東集》에 근거하여 ‘二’로 바로잡았다.
역주7 大中 : 大中之道의 약칭으로, 聖人之道와 같다. 작자가 중시하는 철학명사의 하나이다. 그가 의미하는 大中의 道, 곧 聖人의 道는 三綱五倫의 도리와 仁‧義‧禮‧智‧信의 덕목을 이상적으로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大中은 본디 《周易》 大有卦에 “햇빛이 비록 부드럽지만 존귀한 지위에 처해 있어 그 덕이 廣大하고 中正하다.[柔待尊位大中]”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역주8 公器 : 본디 천하가 공용하는 물건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大中과 상대되는 철학명사로, 천하의 모든 일에 적용되는 올바른 처사를 의미한다. 大中은 體이자 經이고, 公器는 用이자 權이다.
역주9 不過乎物 : 《禮記》 〈哀公問〉에 “仁人은 행하는 일에 잘못이 없고, 효자는 어버이를 섬기는 일에 잘못이 없다.[仁人不過乎物 孝子不過乎物]”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역주10 刺二州 : 陸質이 台州와 信州의 刺史가 된 것을 가리킨다.
역주11 侍東宮 : 永貞 원년(805) 4월 9일에 順宗이 給事中 陸質을 太子侍讀으로 삼은 것을 가리킨다. 東宮은 태자가 거처하는 궁전인데 여기서는 태자를 가리킨다.
역주12 師儒 : 經師로, 경서를 가르치는 學官을 가리킨다.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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