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之
하고 西適
하며 東極
하고 南至
는 其間名山水而州者以百數
에 永最善
이라
環永之治百里
에 北至于
하고 西至于
하며 南至于
하고 東至于黃溪
은 其間名山水而村者以百數
에 黃溪最善
이라
祠之上은 兩山牆立하고 如丹碧之華葉騈植하여 與山升降하고 其缺者爲崖峭巖窟이요
黃神之上 揭水八十步하여 至初潭하니 最奇麗하여 殆不可狀이라
來若白虹하되 沈沈無聲하고 有魚數百尾하여 方來會石下라
南去又行百步하여 至第二潭하니 石皆巍然하여 臨峻流하여 若頦頷齗齶이라
自是又南數里는 地皆一狀이나 樹益壯하고 石益瘦하며 水鳴皆鏘然이라
又南一里하여 至大冥之川에 山舒水緩하고 有土田하니
莽旣死에 神更號黃氏하고 逃來하여 擇其深峭者潛焉이라하니라
黃與王聲相邇하고 而又有本하니 其所以傳言者益驗이라
神旣居是에 民咸安焉하니 以爲有道라하여 死乃俎豆之하고 爲立祠라
북쪽으로 진晉, 서쪽으로 빈豳, 동쪽으로 오吳, 남쪽으로 옛날 초楚나라와 월越나라가 인접한 일대까지는 이 중간에 산수로 이름난 주州가 백여 개나 되는데, 그중에 영주永州의 경치가 가장 아름답다.
그리고 영주永州의 관아를 둘러싼 백 리 안에서 북쪽으로 오계浯溪, 서쪽으로 상수湘水의 발원지, 남쪽으로 농천瀧泉, 동쪽으로 황계黃溪와 동둔東屯까지는 이 중간에 산수로 이름난 마을이 백여 개나 되는데, 그중에 황계黃溪의 경치가 가장 아름답다.
황계黃溪는 영주永州 관아까지의 거리가 70리이다.
동둔東屯에서 남쪽으로 600보를 가면 황신사黃神祠에 도달한다.
황신사黃神祠 위쪽에는 두 산이 장벽처럼 높이 서 있고 단사丹砂‧벽옥碧玉과도 같은 붉은 꽃과 푸른 잎들이 함께 어우러져 산 모양에 따라 들쭉날쭉하고 화초가 없는 곳은 깎아지른 절벽이거나 동굴이다.
황신사黃神祠 위쪽으로 옷을 걷고 물을 건너 80보를 가면 첫 번째 못에 이르는데, 그곳은 경치가 가장 신기하고 아름다워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이다.
못의 대체적인 모양은 거대한 항아리를 갈라놓은 것 같은데, 항아리의 사방 언저리는 수직으로 높이 솟아 천 자나 된다.
시냇물이 그 안에 담겨 있는데 깊이 잠긴 검푸른 물이 기름인 양 반짝인다.
흘러드는 물길은 흰 무지개처럼 빛나는데 수심이 워낙 깊어 소리가 없고 수백 마리나 되는 고기들이 바위 밑으로 모여들었다.
남쪽으로 또 100보를 가면 두 번째 못에 이르는데, 못 주변에는 바위들이 다 거대하고 급류 위에 늘어서 있어 그 모양이 마치 튀어나온 턱과 움푹 들어간 잇몸 같았다.
그 아래에는 큰 바위가 어지러이 늘어섰는데 그 위에 앉아 음식이라도 먹을 만했다.
붉은 머리에 검은 날개를 한 새가 크기는 고니만큼 큰 놈이 막 동쪽을 향해 서 있었다.
그곳에서 다시 남으로 몇 리를 가니 지세는 모두 같으나 수목樹木은 더 굵고 바위는 더 뾰족하였으며 좔좔 흐르는 물소리가 모두 듣기 좋았다.
또 남으로 1리를 가서 대명천大冥川에 이르니 산세가 완만하고 물길이 더딘 곳에 논밭이 있었다.
황신黃神이 생존시에 그곳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황신黃神의 전설을 소개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황신黃神은 성씨가 왕王으로 왕망王莽의 친족이다.
왕망王莽이 죽은 뒤에 신神은 성을 황씨黃氏로 바꾸고 이곳으로 도망하여 저 깊고 험한 곳을 택해 숨었다.”고 하였다.
당초에 왕망王莽이 일찍이 “나는 황제黃帝와 우순虞舜의 후손이다.”라고 하였으므로, 그의 딸의 봉호를 ‘황황실주黃皇室主’라고 불렀다.
황黃과 왕王은 음이 비슷하고 왕망王莽의 말도 근거가 있으므로 황신黃神에 관한 전설이 더욱 믿음이 간다.
황신黃神이 여기서 거주한 뒤에 백성들이 모두 편안하였으므로 도를 지닌 사람으로 여겨, 그가 죽자 제사를 지내고 사당을 세운 것이다.
그 후에 사당이 점점 주민들이 사는 곳으로 가까이 옮겨져서 지금의 사당은 산 북쪽 시냇가에 있다.
원화元和 8년 5월 16일 유람하고 돌아온 뒤에 이 내용을 기술하여 장래 유람을 좋아하는 자들을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게 하였다.〉